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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있는 날'의 덕수궁 오후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5-31 22:06:22
  • 수정 2024-05-31 22: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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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덕수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죽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했다. 같은 해 창덕궁이 완성, 광해군은 이곳을 떠났고,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였다. 




조선 후기에 덕수궁은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킨 일이 있고,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고종 말년 조선 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기자,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897년(광무 1)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해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고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도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광무 8)에 궁에 큰불이 나서 전각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그러나 곧 복구에 착수해 이듬해인 1905년(광무 9)에 즉조당(卽阼堂)를 비롯해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준명전(浚明殿), 흠문각(欽文閣),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됐고, 중화문(中和門), 조원문(朝元門) 등이 세워졌다. 이후 1906년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되었다. 이후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됐고 궁의 정문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고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됐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910년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됐다.




한편,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897년(광무 1)에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년(융희 1)까지 거처했고, 1904년(광무 8)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 홍씨(明憲太后洪氏)가 인수당에서 별세했고, 황태자비 민씨(閔氏)도 석어당에서 별세했다. 1907년(융희 1)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했고, 고종의 순헌귀비 엄씨(純憲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했다. 고종은 1907년 왕위를 물려주고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했다.




이와 같이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고, 궁내의 각 건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활용됐다.






그 뒤 별다른 사건을 겪지 않다가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됐고,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이 자리에 들어오게 되어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석조전은 6.25전쟁 중에 내부가 불탔다. 이후 덕수궁은 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됐고, 석조전은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됐다./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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