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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역 이야기 12] 시작의 역사 인천역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4-06-09 21:23:21
  • 수정 2024-06-10 09: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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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역

한국철도 탄생역인 '인천역' 전경

[이승준 기자] 한반도의 철도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침략적 성격을 띠고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초창기 대부분 철도 역사들은 임시가설물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놓여진 인천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인선 철도 부설이 미국인 J.R.Moise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인천 역사는 미국 철도역 사의 구성형식에 영향을 받았다. 인천역사는 1899년 9월 18일 부분개통 이후 1900년 5월 에 이르러 연면적 약 300m2(91평)에 단층 흙벽돌조, 아연철판의 경사지붕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는데, 무계획적인 가설건물에 불과했던 이런 역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표준설계에 의해 정비된다. 


인천역

인천역하지만 그 표준설계라는 것도 장래의 증축 가능성과 이용객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증개축, 신축이 계속해서 이뤄지게 된다. 이 때문에 1922년 6월에 창간된 ‘조선의 건축’의 조선건축잡보란에는 매달 1-4건의 철도역사 증축 및 개축 관련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역사가 소실되어 신축된 경우도 많았는데, 인천의 역시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던 역사를 임시역사를 거쳐 1960년 9월 17일 오늘의 역사로 신축 준공한 경우이다. 


# 인천역 또는 제물포역 


2009년 발행된 ‘앵글에 비친 그 시절’(한국박물관 100주년 및 한국철도 기념 특별전 기념 책자)에 의하면 본래 경인선 인천역의 위치는 답동이었다. 하지만 역사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부지의 일본인 지주의 반대로 갑작스럽게 위치가 변경되면서, 기공식 역시 인천역사 예정지가 아닌 우각헌에서 진행하게 된 것이다. 




또한 당시 인천역을 일컬어 제물포역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가 인천이라는 지명보다 제물포항이 익숙한 외국인들을 위해 영문‘Chemulpo)로 표기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 인천은 1888년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이 들어섰을 만큼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이자 조선의 얼굴이 었다. 


# ’자장면‘과 ’노가다‘가 태어난 곳


패루/인천역 맞은편, 거대한 중국식 전통 대문이 관광객을 맞는다. 섬세한 조각과 화려한 붉은 빛을 마주하는 순간 저절로 카메라에 손이 간다. 패루는 차이나타운의 대표 상징물로 총 4개의 패루(중화문, 인화문, 선린문, 한중문)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답게, 인천역과 인천을 배경으로 태어난 것들이 많다. 1882년 49여 명 의 중국 상인이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청나라 군대를 따라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중 상당수가 조선에 장기간 머무르면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고 이후에도 인천 지역 무역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공화춘, 송죽루 등의 청요릿집이 생겨난 것이다. 


개항장지게꾼/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개항장은 서구 문물 유입의 길목인 동시에 활발한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던 국제무역항이 되었다. 이 조형물은 근대 사진자료를 기초로 개항장 일다에서 화물  선적 작업을 하던 지게꾼들의 모습을 재현했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화교들이 기존의 요릿집이 아닌 작은 식당에서 국수요리를 만들어 팔면서 자장면 이 전국에서 사랑을 받는 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공사 현장의 일용근로를 못하는 ’노가다‘라는 속어 역시 인천이 그 배경이다. ’노가다‘는 경인선 부설 당시 침목 등을 운반할 때 현장 닌부들 사이 호흡을 맞추기 위해 구령으로 ’노‘는 우두머리 또는 으뜸이라는 뜻의 ’도‘를, ’가다‘는 모양거ㅘ 덩치를 뜻하는, 힘든 노동 중에 재미를 위해 탄생한 합성어였다. 


# 일제를 막으로 했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다


인천역에는 여객 취급 설비뿐만 아니라 인천항을 통과하는 화물을 취급하기 위한 선로가 부설되어 있는데, 실제 경인철도 탄생이 인천(제물포)항에서 바롯했기 때문이다. 인천항이 국제항의 조건을 갖추면서 일본은 청일전쟁과 함께 조일잠정활동조관을 체결하면서 경인철도 부설권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열간들의 방해와 을미사변으로 조선정부는 15년 뒤 조선정부가 철도룰 사들인다는 조건으로 미국인 J.R.Moise에게 철도부설권을 부여할 수 있게 됐다.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이런 배경으로 J.R.Moise는 1897년 경인선 기공식을 인천 우각헌에서 거행하지만, 1899년 년 1월 31일 공사자금 조달 문제로 일본 경인철도인수조합에 이를 양도하면서 결국 일제 의 손에 의해 경인철도가 완공되게 되었다. 경인철도는 이후 1899년 9월 18일 인천역에서 개업예식을 개최했고, 한강철교 공사 이후 1900년 11월 12일 경성역(훗날 서대문역) 부근에서 성대한 개통식을 거행했다. 


# 뱃길, 철길 그리고 하늘 길의 도시, 인천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경인철도는 1963년 복선화에 착공해 1965년 9월에 완공했다. 이에 따라 여객수와 화물량이 증가하면서 1961년 1일 평균 이용객 23,400명에서 65년 37,000명으로, 70년대에는 59,000명으로 늘어났다. 이어 수도권 인구집중과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1974년 경인철도의 전철화로 77년에는 134,000명, 97년에는 478,000명으로 증가했다.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이처럼 인천은 개항의 시작점이었고 한국전쟁의 서울수복을 이루어낸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이자 대한민국의 발전을 알리는 출발점이었다. 오늘날에도 인천은 서울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로, 뱃길과 철길, 그리고 하늘길이 함께하는 길의 도시로 세계에서 당당히 그 역사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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