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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과학기술의 꽃,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국보 지정
  • 민병훈 기자
  • 등록 2020-03-09 09:42:32
  • 수정 2023-12-21 11: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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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감영 측우기 바닥면에 새겨진 명문

[민병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근대시기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를 비롯해 조선 시대 측우(測雨) 제도를 계통적으로 증명해주는 2점의 측우대인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와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를 국보로 지정했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13일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를 개최해 세 점의 과학 유물에 대한 국보 지정 심의를 가결하였으며했고, 30일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지정명칭은 위 순서대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로 최종 결정햇다. 


이 3점의 ‘국보’는 1971년(측우기)과 1985년(측우대) 두 번에 걸쳐 보물로 지정, 멀게는 근 50년 만에 국보로서 가치가 새롭게 인정받은 것이다. 1442년(세종 24년) 조선에서 강수량 측정을 위해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한 이후 그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들로, 측우기의 경우 1911년 세계 기상학계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하고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이미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는 조선 시대 충남 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錦營)에 설치됐던 것으로, 1915년 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 1859∼1918)가 국외로 반출한 뒤 1971년 일본에서 환수돼 서울 기상청이 보관해 오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으리라 예상된다. 지금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만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제작시기와 크기 등에 대해서는 중단의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확인된다. 명문에 의하면 이 측우기는 1837년(헌종 3년)에 만들었고 높이는 1자(尺) 5치(寸), 지름 7치, 무게 11근으로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1.9cm, 지름 14.9cm, 무게는 6.2kg에 해당한다.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또한, 바닥면의 명문을 통해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의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측우기의 명문은 15세기 세종대 강우량 측정제도가 19세기까지 계승돼 원칙에 맞게 꾸준히 유지됐음을 보여준다. 형체 역시 자세히 보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중.하단 총 3개의 금속기로 구성됐고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했고 접합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고자 했다.

  대구감영 측우대 앞면

문화재청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과학적 조사와 실험을 시행한 결과, 각 접합부는 빗물이 고였을 때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납땜을 해 고정한 흔적이 있고, 높이가 주척(周尺)을 기준으로 1자 5치(1척 5촌)의 근사치에 해당하고 각 단은 약 5치의 크기로 만들어져 몸체 자체가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서의 기능을 했음을 확인했다. 


이는 기존에 빗물의 양을 조선 시대 도량형 표준자인 주척을 사용해 별도로 쟀을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 온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세종 대 확립된 측우기 제도는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770년(영조 46년) 다시 부활했다. 영조는 세종대의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제작해 팔도감영에 보내고, 측우대는 세종 대 척도를 고증해 1740년에 만든 신제척(新制尺) 가운데 포백척(布帛尺)을 따라 높이 1자(尺), 길이와 폭 8치(寸), 구멍의 깊이 1치로 하게했다. 이렇듯 영조 대에 새롭게 확립된 측우대 제작을 증명해 주는 유물이 국보 제330호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大邱 慶尙監營 測雨臺)’이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전후면에 ‘측우대(測雨臺)’라고 새기고 ‘건륭 경인년(1770년) 5월에 만듦(乾隆庚寅五月造)’이라는 제작시기가 새겨져 있어 1770년(영조 46)에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크기는 상면 길이와 폭이 36.7×37.0cm, 높이 46cm, 윗면 가운데 구멍은 지름이 15.5cm로서, 포백척의 1자가 약 46cm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측우대는 영조 대의 제도를 그대로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측우대 규격을 공식화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준다는 점에서 역사.학술면에서 가치가 크다.   


이번에 함께 지정된 국보 제331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昌德宮 摛文院 測雨臺)’는 1782년(정조 6)에 제작된 것으로, 측우대 제도가 정조 연간(1776~1800)에도 이어졌음 알려주는 유물이다. 비록 함께 있었던 측우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명문과 ‘동궐도(東闕圖)’ 등 회화자료를 통해 창덕궁 이문원(摛文院) 앞에 놓였던 사실이 확인되며, 정면에 조선 시대 강수량 제도의 역사를 설명해 놓은 긴 명문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9.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이 측우대의 명문은 첫째, 측우기는 1442년(세종 24년)에 구리로 주조했고 높이 1자 5치, 지름 7치라는 사실, 둘째, 1770년(영조 46년)에 세종 대의 제도를 따라 측우기를 만들고, 창덕궁, 경희궁, 팔도(八道), 강화부, 개성부에 뒀다는 사실, 셋째, 1782년(정조 6년) 여름에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내렸고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이문원 뜰에 측우기를 설치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조선 전기에 확립된 강수량 측정제도에 연원을 두고 있다. 조선 후기까지 그 전통이 지속됐음을 증명해주는 사례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조선 시대 측우기와 측우대는 농사를 천하의 큰 근본으로 삼았던 당시, 기상(氣像)을 기록하고 다음 해 농사일에 준비카 위한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특히, 가뭄과 홍수 대비를 위한 측우기를 고안하고, 고을 수령이 직접 우량(雨量)을 왕실에 보고토록 한 제도는 세계 과학사와 농업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이었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를 비롯해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제작시기와 연원이 명확할 뿐 아니라 농업을 위한 과학적 발명과 그 구체적인 실행을 증명해주는 유물로서 인류문화사의 관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1837년에 제작됏으나 실물의 크기가 세종 대 측우기 제도에 기원을 두고 있고, 두 점의 측우대 역시 규격과 명문을 통해 그 계통을 따랐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유로 세계 과학계에서도 인정한 현존 유일의 측우기와 함께 측량의 역사를 증명하는 두 점의 측우대를 함께 국보로 지정해 우리나라 전통과학의 우수성과 그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릴 필요성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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