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손유순의 도자기 인생 4] “도예가가 되겠다는 꿈을 향해 달렸다”
  • 손유순 본지 자문위원
  • 등록 2020-09-16 05:04:45

기사수정

분청사기박지모란문병/粉靑沙器剝地牡丹文甁

분청사기는 15세기에서 16세기를 거치며 하얗게 분장한 면 위에 철화(鐵畵), 선각(線刻), 박지(剝地)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며 그 표현방식은 익살스러움이 있고 정돈되지 않은 듯 수더분하며, 그 형태와 문양은 자유롭고, 구애받을 것 없는 분방함, 박진감 넘치는 표현으로 현대적이면서 가장 한국적인 미(美)의 원형을 간직한, 가장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도공이 만드는 막사발은 보물(이도다완井戶茶碗)이 되어 일본인들이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한일 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 도자기에 대한 경모감을 갖고 그들이 데려간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분청상감 기법에는 선상감과 면상감이 있는데 특히 면상감에서 특징을 보인다. 면상감은 박지기법으로 이행된다. 선상감은 처음에는 고려 상감무늬를 답습하다가 1420년대 이후에는 조선적인 무늬로 신선하게 변한다. 분청상감 기법은 조선백자에 영향을 주어 상감백자가 약간 제작 되었으나 15세기 후반 이후로는 상감 기법은 도자 무늬로서 크게 이용되지 않는다. 분청사기 기법에는 유색과 태토가 고려청자상감 그릇과 구별하기에 매우 모호한 것이 많다. 


1972년 도예에 입문 하던 당시에는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술을 숨기려고만 했습니다. 누구 한 사람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드러내놓고 도자기법을 전수하지 않았어요. 기술자들은 배우려고 하는 나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돈이나 벌어서 시집이나 가라”라며 비웃었어요. 조각칼을 만지는 것도 싫어했다. 기술자들의 어깨너머로 조각칼 사용하는 손놀림과 문양 새기는 방법을 슬쩍슬쩍 엿봤다. 시간이 흐르면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술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고 다들 어깨너머로 배우고 있었다.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하면서 나름의 방법대로 연구하고 터득하고 배웠다.


그 시절 선배나 동료들은 퇴근 하면 예쁜 구두 신고 예쁜 옷 사 입고 멋을 부리곤 했죠, 근데 저는 틈만 나면 기물에 조각하는 연습을 했어요. 직장에서 쉬는 시간에도 기술자들 몰래 조각을 배우기 위해 문양 새기는 연습을 했다.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매일 연습을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조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도자기 주문량이 늘면서 기술자 한명이 더 필요하게 된 것이다. 도자기 주문이 100개 들어오면 보통 150여개 정도를 만든다. 기물이 가마에 들어가서 터지는 것, 실패율까지 계산해서다. 한데 주문량이 많다보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조각사라도 하루에 할 수 있는 양이 한정돼 있다.  


하루는 기술자가 보조역할 하는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모두에게 조각칼을 갖고 와서 자완에 보상당초 문양을 새겨 보라고 했는데 저만 합격했지요. 평소에 꾸준히 조각 연습을 한 게 빛을 본 것이다. 나중에는 난이도가 높은 기물에 투각과 부각, 양각 등의 조각, 또 도예분야의 다양한 기술도 터득했다. 낮은 보수를 받았지만 도예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그 꿈을 향해 달렸다.


# 소정 손유순/1990 - 현재  소정도예연구소장, 1999 - 2000 명지대학교 산업대학원 도자기기술학과 강사, 2001-경기도세계도자기엑스포 개막식(김대중 대통령 접견), 2002-국제도자 워크샵 초대작가 – 한국도자재단, 2004-경기도으뜸이 도자기 부문 선정(청자 참나무재유 개발)-경기도지사, 2014-사단법인) 다온시문화협회 시인, 본지 도자기 부문 자문위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