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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의 공연산책 46] 이재진 교수의 시화전
  • 박정기 자문위원
  • 등록 2020-09-26 09:57:57
  • 수정 2020-09-26 13: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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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로 이재진 교수의 연구실에서 '이재진 제3회 시화전'을 관람했다.


이재진 교수(1941~)는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독일 문학을, 쾰른(Köln)대학에서 연극학을 전공했다. 극작가들 중 레싱, 실러, 클라이스트, 뷔히너, 헤벨, 베데킨트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특히 브레히트와 뒤렌마트에 전념했다. 뒤렌마트의 '로물루스 대제' 등 많은 작품을 연출했고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 등 여러 희곡을 번역했다. 방송과 공연을 통해 어린이.청소년극과 라디오 드라마 활성에도 노력했다. '브레히트 후기 희곡 작품의 3차원적 구조에 관하여' '베데킨트 드라마에 나타나는 여성상과 신화적 특성' 등의 논문이 있다. 단국대학교 명예교수다. 


극단 가교의 창단대표 이승규 연출과 공군복무를 함께 했기에 가교 초창기의 '노부인의 방문'을 비롯한 독일희곡작품 공연이 이재진 교수의 번역으로 이루어졌다.


요한 볼프강 괴테, 프레드리히 쉴러, 프레드리히 횔덜린, 노발리스, 하인리히 하이네, 에두라르트 뫼리케, 프리드리히 니체, 스테판 게오르게, 후고 폰 호프만슈탈, 라이너 마리아 릴케, 헤르만 헤세, 고트프리트 벤, 게오르그 트라클, 칼 크롤로브, 파울 첼란 등 독일 시인들의 명시와 비견되는 이재진 교수의 시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감탄사를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Ich laufe, also bin ich. I walk, therefore I am'라는 제목처럼 이재진 교수의 전체 시가 실존주의적이면서도 자연주의적인데다가 서정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이 세계라는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시어로 함축시켜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재진 교수의 시를 소개한다.



# 이재진  제3회 시화전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urro ergo sum

Ich laufe, also bin ich/I walk, therefore I am


2020. 9. 1. - 9. 30

연지예제


그래서 나는 걷는다 


나는 걷는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살아있기에 그래서 나는 걷는다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내일이 내게 다가온다 

지나간 날을 되돌아 보려고 그래서 나는 걷는다

나는 조용히 걷는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기억속에 간직한다 

잊고 싶은 것이 너무 많기에 그래서 나는 서둘러 걷는다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강물이 나를 따라 흐른다

강물이 흘러가기에 그래서 나는 따라 걷는다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부를 수 있다

너를 부르고 싶어 그래서 나는 네게로 걷는다

나는 걷는다 저 앞에 무언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보려고

두려움을 떨쳐버릴려고 그래서 나는 서둘러 걷는다 

나는 걷는다 저 앞이 무엇이 있는지 두려워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그래서 나는 걷는다

혹시 그곳에 희망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것을 보려고

그래서 나는 걷는다.


산그늘


늘 비취던 강물속에서 네 얼굴을 찾아

 그곳을 마냥 서성인다.


힘들 때도 두 손을 모을 줄 모른다며 

나를 꾸짖으며 

내 대신 손을 들어 기도해 주던 

너의 그 하얀 손도

나는 잊고 말았다.


어느 때 보다 큰 소리로 

길 잃고 방황하는 나를 위해 

 높은 곳을 향해 애원하며 부르짖던 너의 울음소리가 

하늘 끝에 가로막혀 

 언제부턴가 되울려 오지 않았다. 


어느 곳에도 너는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너를 불러보았다

아무 소리도 되돌아 오지 않기에 

텅 빈 가슴을 안고 

네 얼굴을 새로이 찾아 길을 떠난다. 


네 얼굴울 찾아 길을 해멘다

벌판을 맴돌다가

 강가를 거닐다가

그리고는 끝내 산으로 올라가 본다 

그곳에 혹 네 얼굴이 남아있으려나 하고.


산에 오르면서 

힘들여 뒤따르다가 

앞장서 가며 네가 뒤돌아보던 

산그늘에 그을린 네 그 얼굴을 

다시 기억해 보리라.


산은 깊었다

그곳에도 여전히 너는 없었다. 


말없이 걷는다


당신이 나를 위해 조용히 기도할 때

나는 무심히 걸었습니다

당신이 차갑게 나를 미워할 때

나는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당신이 토라져 멀리 나를 떠날 때 

나는 아무 말 없이 산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홀로 높은 곳으로 오를 때 

여전히 나는 강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매정하게 세월은 흐를 것입니다

걸으며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발걸음에 서운함은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간혹 옛날을 생각하면 아쉬움은 묻어나올 것입니다 


당신이 되돌아서서 내게 다가오면 

그래도 나는 걷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걸음을 멈출 것입니다 

돌아서서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주려고!


 기억속으로 


 구름이 흘러가면 그 자리에 한 점 옛 그림이 남는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옛 이야기가 그 틈으로 새어나오고

  나뭇잎 사이로 기나긴 젊은 시절이 어른거려 다가온다

 빗방울이 호수에 떨어지며 작은 기억들을 노래하는구나.


  골목에서 애들이 떠들어대면 마당에 내 어린 얼굴이 보인다

  달이 뜬 대낮에 어두움을 즐기는 철없는 늙은 아이

  별들이 대화하는 침묵 속에서 지나간 이야기를 되뇌인다

  하늘의 신비를 배우며 낡은 몸뚱이를 사랑하려고.


  이제 떠나면서 무슨 미련이 남아 있을까만 그래도 

  이 몸이 썩어 먼지가 되면 앞장서서 떠난 내 영혼을 쫓아가 

  둘이 하나 되어 하늘을 맴돌다가 빗방울을 타고 떨어지리라

  토라진 연인들의 찌프린 이마 위에나 당신의 차가운 머리 위에. 


산으로 바다로


삶의 언저리가 점차 희미해 지고

지나온 시간이 오히려 맑아진다 

기억은 고통으로 다시 찾아오고

앞길은 막연하게 멀어진다. 


 너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나의 아픔이 살아나고 있었다. 


나는 산으로 들어갔다

나는 바다로 나아갔다

바다는 침묵하고 있었다

산은 조용했다.


 산에는 늘 정막이 잠들어 있었다

 바다에는 언제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산속으로 소리쳐 보았다

산의 정막에 갇혀 차거운 나의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바다 속으로 소리쳐 보았다

파도 소리에 묻혀 기나긴 나의 추억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바다의 그런 침묵을 배웠다

 나는 산의 그런 정막을 사랑했다. 


깊은 산속으로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고요한 산의 정기를 타고 은은히 나의 앞길이 미소짓기 시작했다 

넓은 바닷가로 걷고 또 걸었다 

사나운 파도소리에 실려 이내 나의 추억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나는 바다로 산으로 길을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정막을 배우고 침묵을 사랑한다.

 

흐트러진 생각을 긁어모으며


나는 걷는다

길을 걸으면서 

머릿속에 자연스레 샘물처럼 흘러내리는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퍼내 작은 그릇에 담을 것이다. 

길을 걸으며 

발길에 채여 흐트러지는 생각들을 

나는 다시 긁어모을 것이다. 

언젠가 

당신들에게 몰래 보여줄 기쁨에 마냥 취한 채! 

그런 저런 이야기들을 모아 한 그릇에 담아내고 싶으면 

술집의 뿌연 연기를 피해 

들로 산으로 나는 나돌아 다니기만 하면 된다.

 그래 나는 걷는다

바닷가로 들판으로 산으로

그곳에 내가 찾던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친구여, 내게 길을 물으면


친구여,

내게 길을 묻는다면

내게 어데로 가는지 물으면 

아무 말 없이 나는 당신의 손을 잡을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기가 죽어 머리를 떨군 채

당신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멀리 어느 곳을 가리킬 것이다. 


내가 너무 풀이 죽어 당신 어깨에 손을 얹지도 못하면 

조용히 나를 술집으로 데려가면 됩니다

그곳에 가면 내가 얼마나 희한한 놈인지 금방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을 혼자 기억해 내다가 

우리가 서로 미워했던 순간까지 다시 들춰낼 겁니다

미친놈처럼 실실거리다 지친 손으로 

더욱 날뛰는 벽 속 그림자와도 어깨동무할 겁니다.


늘 젖어있던 내 눈가에 혹 눈물자국이 말라 있거든 

친구여, 조용히 나를 엄마의 무덤으로 데려다 주면 됩니다

둥근 무덤에 엎어져 울지 않고 

먼 산만 바라본다고 나를 너무 나무라면 안 됩니다

눈물 보이기도 부끄러워하는 수줍은 나를 

무덤 속의 엄마는 재미있어 하시다가 

끝내는 내 대신 흙(!)눈물을 흘리실 겁니다. 


친구여, 글을 쓰겠다고 밤을 새우다 빈손으로 당신을 찾아오면 

조용히 나를 바닷가 언덕으로 데려다 주면 됩니다

언덕에 서서 어린아이처럼 하루 종일 중얼대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 별들보다 더 많은 이야기에 흡족해 하다가 

그 중 하나라도 별똥이 되어 떨어질까 두려워 

서둘러 집에 돌아와 허옇게 부운 머리에서 하나씩 꺼내보지만 

이내 욕심을 버리고 늙은 아이는 잠이 들고 말 것입니다.


갑자기 외롭다며 잃어버린 옛 사랑을 찾겠다고 나서면 

친구여, 조용히 나를 달빛 아래로 인도해 주면 됩니다

호수는 고요히 어둠의 고통 속에서 반짝이건만 

어디에 그래 차가운 달빛은 그 임을 비춰주고 있을까

달이 구름 속에서 나와 온 세상에 미소를 나누어주면 

놓쳐버린 기억들이 영원한 이방인의 외로움을 깨우쳐 줄 겁니다

밤은 하얀 달빛 속에 그리 오래 웅크리고 있는데. 


늙어가는 몸뚱이에 광대의 광기가 다시 꿈틀거리면 

친구여, 조용히 나를 무대 위로 끌고 가면 됩니다 

조명 꺼진 텅 빈 객석에 광대는 중얼댈 겁니다

이제 나는 돌아오리라 

텅 빈 무대로

아무도 그곳에 서 있지 않는다 해도

친구여, 내가 금방 되돌아 나오게 된다 하더라도!


내게 길을 물으면, 친구여!

아무 말 없이 나는 당신의 손을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힘없이 가리킬 것입니다. 


새벽기도


새벽길을 나선다

소복같이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하얀 눈은 온통 뽀얗게 길을 덮고 있었다

길 위에 성벽 위에 그리고 얼굴 위에 시원하게!


늙은 아이는 내내 울고 있었다

눈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하얀 눈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무언지 모를 

작은 긴 헤어짐 때문이었으리라

사실 울고 있음을 그 아이는 알지 못했다 

그래 

늙은 아이는 아마 울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쏟아져 내려 떨어져 깨어지는 아쉬움의 조각들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모아 받으며 

늙은 아이는 고통의 순간을 숨겼다

아픔의 소리는 절규되어 아이의 가슴속에 크게 깊이 박히었다 

뜨거운 고통을 그래 듣지 못했다

늙은 아이는 그래서 보지 못했다

끝내 그래 쓰라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가 그 사이 사정없이 쏟아질 것이다

바람에 나뭇잎은 정신없이 흔들릴 것이다

철새가 많이도 다녀갈 것이다

눈이 소복이 내리고 또 마구 내려앉으리라. 


산을 찾아 절을 찾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견디며 시를 몇 줄 긁어본다 

쓰다가 일어나 내려앉은 하늘의 별들을 세워본다

별들은 늙은 아이의 나이 보다는 더 많은데

할 말을 모두 잊고 멍하니 앉아있다.

  

걸으며 감사하며


아이야,

함께 언제 걷자구나 

산으로 들로 강으로

강을 함께 걷다보면 

저절로 살아있음을 하늘에 감사드리게 될 것이다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조각에, 조용히 흐르는 강물에 

생각없이 날아오르는 새들에게도 

바람에 흔들리는 잡풀에도 

이런 것들은 어떤 성스러운 책보다도 

어떤 지혜로운 가르침 보다도 

어떤 감미로운 노래소리보다도 

더 깊이 우리의 가슴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아이야, 비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을 따라 걷자 

앞으로 더는 찾아갈 길이 없다고 조바심을 갖지는 말자 

이제 다리가 아파 더 나가지도 못하면 

멈추어 서면 그만이다

아이야 그곳으으로 함께 걷자구나

모르는 사람들처럼 서로 떨어져서 

어쩌다 눈빛만을 보내면서 

그래도 다녀오면 

머릿속에 뿌연 기억들은 서로 뒤엉켜 남아있을 것이다.


술잔에도 밤하늘이 


밝은 대낮에도 우리는 밤하늘을 경험할 수 있다. 

술잔 속을 잘 들여다보면 그곳에 우주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함께 산에 오르려 하지 않는다 

오! 너 도시에 사는 바쁜 자들아 

운명을 잊고 삶을 잃고 사는 

밝음 속에 살기에 어둠을 보지 못하는  

밤하늘이 보이지 않으니 꿈을 꾸지 못하는 

별똥의 저주를 받지 않아 행복에 찌든 자들아 

그 어둠 속에서 너의 삶이 시작되었고 

 그 곳에서 너의 죽음이 이루어지나니!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눈꺼풀을 잠시 두 손으로 들어올리며

조용히 창가로 가 밖을 올려다보아라 

맑은 밤하늘이 넓게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으면 

너는 그 사이에서 순간 하느님의 슬픔을 보게 될 것이다

깊이 고여 있는 창조주의 차가운 외로움을 

그동안 너무 잊혀 있었기에 덮쳐오는 

그분의 서운함을!

그리면 기도하듯 잠시 눈길을 맞추고 잠자리에 들면 되리라. 


이제 나는 작은 산에 오른다 

옆에 누가 발길을 맞추어 걷던 

허리에 통증이 제법 다가와 산에 오름을 힘들게 해도 

조금이라도 가까이 그분에게 다가가 보리라

어느새 서둘러 하지만 나는 그 길을 따라 내려갈 것이다

높은 곳에서 찾지 못했던 그분을 부르며 헤매다가 

술잔 속에 결국 떠오르는 우주의 뜻을 나는 읽을 것이다. 


 

낙원을 다시 찾아 


이브가 아담을 데리고 토라져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에덴동산을 박차고 떠났을 때 

그래도 신은 서운해 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하고자 떠나는 작은 인간들의 용기를 기뻐하며, 

간신히 앞을 가리기 시작한 우매한 인간들의 앞길을 축복해 주었을 것입니다. 

낙원을 떠나는 두 인간은 초라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떠나는 이들은 죄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실 낙원을 떠남으로서 

새로이 낙원을 건설하였습니다. 

낙원은 늘 되돌아봄 속에만 존재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곳은 낙원이 아닌 것입니다.

낙원을 떠난 인간은 신에게 도전하였습니다. 

아랫도리를 가리기 시작한 인간들은 점차 선과 악을 만들어 냈습니다. 

선함이 무엇이며 악함이 무엇입니까? 

인과응보란 무엇이며, 

권선징악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모두가 신에게 도전하기 위해 만든 

동화 속의 이야기 입니다. 

자연에는 살아 있음만이 존재합니다. 

자연에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에는 착함과 악함이 하나로 혼합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낙원을 찾아 떠날 수 없습니다. 

이곳이 낙원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되돌아 보며 낙원을 되찾아냈던 것입니다. 


먼 길을 떠나며


말 없이 먼 길을 향해 걸을 것이다 

그곳에서 무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면 

그래서 서둘러 그곳으로 가고 싶어지면 

어두운 그곳을 향해 기꺼이 나는 떠날 것이다

어떤 불만의 흔적도 얼굴에 띄우지 않고 

말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런 아쉬움도 손에 남기지 않고 

그리고는 평화롭게 홀로 잠들 듯이 떠날 것이다.

 

불안하고 두려우면 기도하리라

그래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돌덩이에 나무기둥에 달에게 하늘에 아니면 하나님에게

그리고 너에게!

아니면 차라리 죽음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도망치지 못할 것이니 

무서운 짐승과도 때로는 친숙해지듯 

죽음과 두려움 속에 가까운 동무가 될 것이다. 


죽음은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다 

죽음 속에도 하지만 평화가 깃들어 있다

조용한 죽음의 선율을 타고 흐르다보면 

뜨거운 환희의 가락도 느끼게 될 것이다 

죽음은 때로 간지러운 듯 미소를 띄운다 

때로는 바람에 펄럭이는 외투 깃으로

검은 날개옷으로 나를 덮어줄 것이다.


죽음과 삶은 하나이며 동시에 또 다른 우리의 축복이다 

삶이 없으면 죽음이란 없다 

죽음이 없으면 어찌 삶이 있단 말인가 

나의 죽음이 없다면 어찌 다른 이의 태어남이 있으랴! 

신들은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 창조의 지루함을 이겨보려고!

불멸의 신들은 인간을 부러워한다 

인간에게는 죽음이란 축복이 있기에! 


오너라 내 앞에 죽음아 

주저하지 말고 내게 거칠고 사납게라도 

덮쳐라 내 위로 죽음아 

조용히 네 두꺼운 외투자락 속으로 숨을 것이니 

군림하라 나를 죽음아 

나 네 어두운 그림자 속에 무릎을 꿇을 터이니 

거두어라 나를 죽음아 

나 네 차가운 죽음의 날개 끝에 조용히 그래도 입 맞추리라! 


드러내어라 죽음아 네 모습을 

네게 이제 나도 두려움을 감추지 않으리니 

아쉬움 속에 네 앞에서 미소를 숨기지 않으리니 

감사하며 

쓰러지며 죽음아 

끝까지 너를 크게 노래할 것이니 

죽어가며 죽음아 

네 뒤를 따르며 나는 높이 너를 찬미하리라! 


마지막으로 이재진 교수가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시를 소개한다.


꿈길       꿈속에서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꿈속에나 길이 있어 애써 찾아드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그 님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시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이 뒤엘랑 밤마다 찾아가는 길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꿈속에서 그나마 늘 다시 만나기를 

(황진이)      (재진이)


진달래 꽃(김소월)    개나리꽃


나 보기가 역겨워    나 보기가 간절해

가실 때에는     오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말없이 고이 기다리이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북악(北岳)에 낙산(駱山)

진달래꽃     개나리꽃

이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아름 따다 오실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오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사뿐히 즈려 밟고 오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나 보기가 간절해

가실 때에는     오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죽어도 아니 눈물 감추오리다.


<1925년>     <2018>

 


이재진 교수의 시를 문학인들 뿐 아니라 연극인들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재진
제3회 시화전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urro ergo sum
Ich laufe, also bin ich/I walk, therefore I am

2020. 9. 1. - 9. 30
연지예제

그래서 나는 걷는다 

나는 걷는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살아있기에 그래서 나는 걷는다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내일이 내게 다가온다
지나간 날을 되돌아 보려고 그래서 나는 걷는다
나는 조용히 걷는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기억속에 간직한다
잊고 싶은 것이 너무 많기에 그래서 나는 서둘러 걷는다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강물이 나를 따라 흐른다
강물이 흘러가기에 그래서 나는 따라 걷는다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부를 수 있다
너를 부르고 싶어 그래서 나는 네게로 걷는다
나는 걷는다 저 앞에 무언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보려고
두려움을 떨쳐버릴려고 그래서 나는 서둘러 걷는다
나는 걷는다 저 앞이 무엇이 있는지 두려워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그래서 나는 걷는다
혹시 그곳에 희망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것을 보려고
그래서 나는 걷는다.

산그늘

늘 비취던 강물속에서 네 얼굴을 찾아
그곳을 마냥 서성인다.

힘들 때도 두 손을 모을 줄 모른다며
나를 꾸짖으며 

내 대신 손을 들어 기도해 주던
너의 그 하얀 손도
나는 잊고 말았다.

  

어느 때 보다 큰 소리로 

길 잃고 방황하는 나를 위해 

높은 곳을 향해 애원하며 부르짖던 너의 울음소리가 

하늘 끝에 가로막혀 

언제부턴가 되울려 오지 않았다. 

  

어느 곳에도 너는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너를 불러보았다

아무 소리도 되돌아 오지 않기에 

텅 빈 가슴을 안고 

네 얼굴을 새로이 찾아 길을 떠난다. 

  

네 얼굴울 찾아 길을 해멘다

벌판을 맴돌다가

강가를 거닐다가

그리고는 끝내 산으로 올라가 본다 

그곳에 혹 네 얼굴이 남아있으려나 하고.

  

산에 오르면서 

힘들여 뒤따르다가 

앞장서 가며 네가 뒤돌아보던 

산그늘에 그을린 네 그 얼굴을 

다시 기억해 보리라.

  

산은 깊었다

그곳에도 여전히 너는 없었다. 

  

  

말없이 걷는다

  

당신이 나를 위해 조용히 기도할 때

나는 무심히 걸었습니다

당신이 차갑게 나를 미워할 때

나는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당신이 토라져 멀리 나를 떠날 때 

나는 아무 말 없이 산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홀로 높은 곳으로 오를 때 

여전히 나는 강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매정하게 세월은 흐를 것입니다

걸으며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발걸음에 서운함은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간혹 옛날을 생각하면 아쉬움은 묻어나올 것입니다 

  

당신이 되돌아서서 내게 다가오면 

그래도 나는 걷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걸음을 멈출 것입니다 

돌아서서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주려고!

  


기억속으로 

  

구름이 흘러가면 그 자리에 한 점 옛 그림이 남는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옛 이야기가 그 틈으로 새어나오고

 나뭇잎 사이로 기나긴 젊은 시절이 어른거려 다가온다

빗방울이 호수에 떨어지며 작은 기억들을 노래하는구나.

  

 골목에서 애들이 떠들어대면 마당에 내 어린 얼굴이 보인다

 달이 뜬 대낮에 어두움을 즐기는 철없는 늙은 아이

 별들이 대화하는 침묵 속에서 지나간 이야기를 되뇌인다

 하늘의 신비를 배우며 낡은 몸뚱이를 사랑하려고.

  

 이제 떠나면서 무슨 미련이 남아 있을까만 그래도 

 이 몸이 썩어 먼지가 되면 앞장서서 떠난 내 영혼을 쫓아가 

 둘이 하나 되어 하늘을 맴돌다가 빗방울을 타고 떨어지리라

 토라진 연인들의 찌프린 이마 위에나 당신의 차가운 머리 위에. 

  

  

산으로 바다로

  

삶의 언저리가 점차 희미해 지고

지나온 시간이 오히려 맑아진다 

기억은 고통으로 다시 찾아오고

앞길은 막연하게 멀어진다. 

  

너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나의 아픔이 살아나고 있었다. 

  

나는 산으로 들어갔다

나는 바다로 나아갔다

바다는 침묵하고 있었다

산은 조용했다.

  

산에는 늘 정막이 잠들어 있었다

바다에는 언제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산속으로 소리쳐 보았다

산의 정막에 갇혀 차거운 나의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바다 속으로 소리쳐 보았다

파도 소리에 묻혀 기나긴 나의 추억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바다의 그런 침묵을 배웠다

나는 산의 그런 정막을 사랑했다. 

  

깊은 산속으로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고요한 산의 정기를 타고 은은히 나의 앞길이 미소짓기 시작했다 

넓은 바닷가로 걷고 또 걸었다 

사나운 파도소리에 실려 이내 나의 추억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나는 바다로 산으로 길을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정막을 배우고 침묵을 사랑한다.


  

흐트러진 생각을 긁어모으며

  

나는 걷는다

길을 걸으면서 

머릿속에 자연스레 샘물처럼 흘러내리는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퍼내 작은 그릇에 담을 것이다. 

길을 걸으며 

발길에 채여 흐트러지는 생각들을 

나는 다시 긁어모을 것이다. 

언젠가 

당신들에게 몰래 보여줄 기쁨에 마냥 취한 채! 

그런 저런 이야기들을 모아 한 그릇에 담아내고 싶으면 

술집의 뿌연 연기를 피해 

들로 산으로 나는 나돌아 다니기만 하면 된다.

그래 나는 걷는다

바닷가로 들판으로 산으로

그곳에 내가 찾던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친구여, 내게 길을 물으면

  

친구여,

내게 길을 묻는다면

내게 어데로 가는지 물으면 

아무 말 없이 나는 당신의 손을 잡을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기가 죽어 머리를 떨군 채

당신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멀리 어느 곳을 가리킬 것이다. 

  

내가 너무 풀이 죽어 당신 어깨에 손을 얹지도 못하면 

조용히 나를 술집으로 데려가면 됩니다

그곳에 가면 내가 얼마나 희한한 놈인지 금방 알게 될 겁니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을 혼자 기억해 내다가 

우리가 서로 미워했던 순간까지 다시 들춰낼 겁니다

미친놈처럼 실실거리다 지친 손으로 

더욱 날뛰는 벽 속 그림자와도 어깨동무할 겁니다.

  

늘 젖어있던 내 눈가에 혹 눈물자국이 말라 있거든 

친구여, 조용히 나를 엄마의 무덤으로 데려다 주면 됩니다

둥근 무덤에 엎어져 울지 않고 

먼 산만 바라본다고 나를 너무 나무라면 안 됩니다

눈물 보이기도 부끄러워하는 수줍은 나를 

무덤 속의 엄마는 재미있어 하시다가 

끝내는 내 대신 흙(!)눈물을 흘리실 겁니다. 

  

친구여, 글을 쓰겠다고 밤을 새우다 빈손으로 당신을 찾아오면 

조용히 나를 바닷가 언덕으로 데려다 주면 됩니다

언덕에 서서 어린아이처럼 하루 종일 중얼대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 별들보다 더 많은 이야기에 흡족해 하다가 

그 중 하나라도 별똥이 되어 떨어질까 두려워 

서둘러 집에 돌아와 허옇게 부운 머리에서 하나씩 꺼내보지만 

이내 욕심을 버리고 늙은 아이는 잠이 들고 말 것입니다.

  

갑자기 외롭다며 잃어버린 옛 사랑을 찾겠다고 나서면 

친구여, 조용히 나를 달빛 아래로 인도해 주면 됩니다

호수는 고요히 어둠의 고통 속에서 반짝이건만 

어디에 그래 차가운 달빛은 그 임을 비춰주고 있을까

달이 구름 속에서 나와 온 세상에 미소를 나누어주면 

놓쳐버린 기억들이 영원한 이방인의 외로움을 깨우쳐 줄 겁니다

밤은 하얀 달빛 속에 그리 오래 웅크리고 있는데. 

  

늙어가는 몸뚱이에 광대의 광기가 다시 꿈틀거리면 

친구여, 조용히 나를 무대 위로 끌고 가면 됩니다 

조명 꺼진 텅 빈 객석에 광대는 중얼댈 겁니다

이제 나는 돌아오리라 

텅 빈 무대로

아무도 그곳에 서 있지 않는다 해도

친구여, 내가 금방 되돌아 나오게 된다 하더라도!

  

내게 길을 물으면, 친구여!

아무 말 없이 나는 당신의 손을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힘없이 가리킬 것입니다.


새벽기도

  

새벽길을 나선다

소복같이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하얀 눈은 온통 뽀얗게 길을 덮고 있었다

길 위에 성벽 위에 그리고 얼굴 위에 시원하게!

  

늙은 아이는 내내 울고 있었다

눈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하얀 눈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무언지 모를 

작은 긴 헤어짐 때문이었으리라

사실 울고 있음을 그 아이는 알지 못했다 

그래 

늙은 아이는 아마 울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쏟아져 내려 떨어져 깨어지는 아쉬움의 조각들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모아 받으며 

늙은 아이는 고통의 순간을 숨겼다

아픔의 소리는 절규되어 아이의 가슴속에 크게 깊이 박히었다 

뜨거운 고통을 그래 듣지 못했다

늙은 아이는 그래서 보지 못했다

끝내 그래 쓰라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가 그 사이 사정없이 쏟아질 것이다

바람에 나뭇잎은 정신없이 흔들릴 것이다

철새가 많이도 다녀갈 것이다

눈이 소복이 내리고 또 마구 내려앉으리라. 

  

산을 찾아 절을 찾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견디며 시를 몇 줄 긁어본다 

쓰다가 일어나 내려앉은 하늘의 별들을 세워본다

별들은 늙은 아이의 나이 보다는 더 많은데

할 말을 모두 잊고 멍하니 앉아있다.

 

  

  

걸으며 감사하며

  

아이야,

함께 언제 걷자구나 

산으로 들로 강으로

강을 함께 걷다보면 

저절로 살아있음을 하늘에 감사드리게 될 것이다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조각에, 조용히 흐르는 강물에 

생각없이 날아오르는 새들에게도 

바람에 흔들리는 잡풀에도 

이런 것들은 어떤 성스러운 책보다도 

어떤 지혜로운 가르침 보다도 

어떤 감미로운 노래소리보다도 

더 깊이 우리의 가슴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아이야, 비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을 따라 걷자 

앞으로 더는 찾아갈 길이 없다고 조바심을 갖지는 말자 

이제 다리가 아파 더 나가지도 못하면 

멈추어 서면 그만이다

아이야 그곳으으로 함께 걷자구나

모르는 사람들처럼 서로 떨어져서 

어쩌다 눈빛만을 보내면서 

그래도 다녀오면 

머릿속에 뿌연 기억들은 서로 뒤엉켜 남아있을 것이다.

  

  

술잔에도 밤하늘이 

  

밝은 대낮에도 우리는 밤하늘을 경험할 수 있다. 

술잔 속을 잘 들여다보면 그곳에 우주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함께 산에 오르려 하지 않는다 

오! 너 도시에 사는 바쁜 자들아 

운명을 잊고 삶을 잃고 사는 

밝음 속에 살기에 어둠을 보지 못하는  

밤하늘이 보이지 않으니 꿈을 꾸지 못하는 

별똥의 저주를 받지 않아 행복에 찌든 자들아 

그 어둠 속에서 너의 삶이 시작되었고 

그 곳에서 너의 죽음이 이루어지나니!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눈꺼풀을 잠시 두 손으로 들어올리며

조용히 창가로 가 밖을 올려다보아라 

맑은 밤하늘이 넓게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으면 

너는 그 사이에서 순간 하느님의 슬픔을 보게 될 것이다

깊이 고여 있는 창조주의 차가운 외로움을 

그동안 너무 잊혀 있었기에 덮쳐오는 

그분의 서운함을!

그리면 기도하듯 잠시 눈길을 맞추고 잠자리에 들면 되리라. 

  

이제 나는 작은 산에 오른다 

옆에 누가 발길을 맞추어 걷던 

허리에 통증이 제법 다가와 산에 오름을 힘들게 해도 

조금이라도 가까이 그분에게 다가가 보리라

어느새 서둘러 하지만 나는 그 길을 따라 내려갈 것이다

높은 곳에서 찾지 못했던 그분을 부르며 헤매다가 

술잔 속에 결국 떠오르는 우주의 뜻을 나는 읽을 것이다. 

  


낙원을 다시 찾아 

  

이브가 아담을 데리고 토라져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에덴동산을 박차고 떠났을 때 

그래도 신은 서운해 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하고자 떠나는 작은 인간들의 용기를 기뻐하며, 

간신히 앞을 가리기 시작한 우매한 인간들의 앞길을 축복해 주었을 것입니다. 

낙원을 떠나는 두 인간은 초라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떠나는 이들은 죄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실 낙원을 떠남으로서 

새로이 낙원을 건설하였습니다. 

낙원은 늘 되돌아봄 속에만 존재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곳은 낙원이 아닌 것입니다.

낙원을 떠난 인간은 신에게 도전하였습니다. 

아랫도리를 가리기 시작한 인간들은 점차 선과 악을 만들어 냈습니다. 

선함이 무엇이며 악함이 무엇입니까? 

인과응보란 무엇이며, 

권선징악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모두가 신에게 도전하기 위해 만든 

동화 속의 이야기 입니다. 

자연에는 살아 있음만이 존재합니다. 

자연에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에는 착함과 악함이 하나로 혼합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낙원을 찾아 떠날 수 없습니다. 

이곳이 낙원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되돌아 보며 낙원을 되찾아냈던 것입니다. 

  

  

먼 길을 떠나며

  

말 없이 먼 길을 향해 걸을 것이다 

그곳에서 무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면 

그래서 서둘러 그곳으로 가고 싶어지면 

어두운 그곳을 향해 기꺼이 나는 떠날 것이다

어떤 불만의 흔적도 얼굴에 띄우지 않고 

말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런 아쉬움도 손에 남기지 않고 

그리고는 평화롭게 홀로 잠들 듯이 떠날 것이다.


불안하고 두려우면 기도하리라

그래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돌덩이에 나무기둥에 달에게 하늘에 아니면 하나님에게

그리고 너에게!

아니면 차라리 죽음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도망치지 못할 것이니 

무서운 짐승과도 때로는 친숙해지듯 

죽음과 두려움 속에 가까운 동무가 될 것이다. 

  

죽음은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다 

죽음 속에도 하지만 평화가 깃들어 있다

조용한 죽음의 선율을 타고 흐르다보면 

뜨거운 환희의 가락도 느끼게 될 것이다 

죽음은 때로 간지러운 듯 미소를 띄운다 

때로는 바람에 펄럭이는 외투 깃으로

검은 날개옷으로 나를 덮어줄 것이다.

  

죽음과 삶은 하나이며 동시에 또 다른 우리의 축복이다 

삶이 없으면 죽음이란 없다 

죽음이 없으면 어찌 삶이 있단 말인가 

나의 죽음이 없다면 어찌 다른 이의 태어남이 있으랴! 

신들은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 창조의 지루함을 이겨보려고!

불멸의 신들은 인간을 부러워한다 

인간에게는 죽음이란 축복이 있기에! 

  

오너라 내 앞에 죽음아 

주저하지 말고 내게 거칠고 사납게라도 

덮쳐라 내 위로 죽음아 

조용히 네 두꺼운 외투자락 속으로 숨을 것이니 

군림하라 나를 죽음아 

나 네 어두운 그림자 속에 무릎을 꿇을 터이니 

거두어라 나를 죽음아 

나 네 차가운 죽음의 날개 끝에 조용히 그래도 입 맞추리라! 

  

드러내어라 죽음아 네 모습을 

네게 이제 나도 두려움을 감추지 않으리니 

아쉬움 속에 네 앞에서 미소를 숨기지 않으리니 

감사하며 

쓰러지며 죽음아 

끝까지 너를 크게 노래할 것이니 

죽어가며 죽음아 

네 뒤를 따르며 나는 높이 너를 찬미하리라! 

마지막으로 이재진 교수가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시를 소개한다.

  

꿈길       꿈속에서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꿈속에나 길이 있어 애써 찾아드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그 님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시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이 뒤엘랑 밤마다 찾아가는 길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꿈속에서 그나마 늘 다시 만나기를 

(황진이)      (재진이)

  

진달래 꽃(김소월)    개나리꽃

  

나 보기가 역겨워    나 보기가 간절해

가실 때에는     오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말없이 고이 기다리이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북악(北岳)에 낙산(駱山)

진달래꽃     개나리꽃

이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아름 따다 오실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오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사뿐히 즈려 밟고 오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나 보기가 간절해

가실 때에는     오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죽어도 아니 눈물 감추오리다.

  

<1925년>     <2018>


  

이재진 교수의 시를 문학인들 뿐 아니라 연극인들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주요경력


황해도 금천생, 서울고 서울대미대, 서울대학교 총동문회 이사, 극작가/연출가/평론가, 한국희곡뮤지컬창작워크숍 대표,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위원, 전 서초연극협회 회장,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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