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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순의 도자기 인생 5] “火魔 속에서 발견한 나의 길”
  • 손유순 자문위원
  • 등록 2020-10-02 22:18:28
  • 수정 2020-10-02 22: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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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인화모란당초문항아리/(粉靑沙器印花牡丹唐草文壺)

청자의 음각기법은 분청사기 박지(剝地)기법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무늬가 간소화될 때 주로 많이 사용된다. 이 기법은 기면을 백토 분장한 후 원하는 무늬를 선 조각 하면 회색의 바탕색이 무늬가 선으로 나타나며, 고려자기의 음각(陰刻)기법과 같다. 꽃무늬가 많기 때문에 일명 조화(彫花)무늬라고 혹은 조화기법이라고도 한다.


분청사기의 인화(印花)기법은 원하는 무늬를 새긴 도장을 가지고 그릇 표면에 질서 정연히 찍은 후 백토를 넣어 무늬를 나타낸 기법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집단화된 국화무늬, 연권무늬. 빗방울무늬 등이 그릇 전체에 빽빽이 찍혀 그릇은 전체가 하얗게 백토 분장돼 인화기법은 절정에 이른다. 


특히 인화분청 그릇 중에서 관사이름, 생산지 이름, 도공이름을 압인 혹은 상감기법으로 새긴 것이 있어 제작시기, 생산지 간의 특색 비교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1970년 12월 고등학교  1차 입학시험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서 진학을 못했다. 그렇게 도자기에 빠져 생활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됐다. 방송통신고등학교는 일하고 돈 벌면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도자기 회사에 다니면서 1975년 부푼 꿈을 안고 서울 창덕여자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현재는 폐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던 여고시절을 다 마치지 못한 채 결혼을 했다. 2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치던 12월 이였다. 1976년 12월에 세살 연상인 안무미씨와 결혼을 했다. 남편은 우리 집 하숙생이자 기술자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나의 꿈과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학업도 꿈도 접게 되었다. 여느 남자 못지않게 도자기 빚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결혼은 내 인생에 불행이자 또 다른 행복의 시작이었다. 딸 둘을 낳고 키우던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 한밤중에 집에 불이 났다. 지붕이 내려앉아 세간은 물론 모든 것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희 네 식구는 잠자다 말고 불길 속을 빠져 나왔어요. 구사일생으로 막막했어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캄캄했죠. 그런데 돌아보니 네 식구 모두 눈썹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하게 살아 있더군요. 그래서 용기를 냈어요. 저는 다시 일을 찾았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어요. 


배운 게 도자기 기술이라서 접었던 도예의 길을 다시 걷게 되었고, 규모가 큰 도자기 회사는 들어 갈 수가 없었어요. 아이들이 아프면 수시로 결근을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이모저모로 피해가 크잖아요.


# 소정 손유순/1990 - 현재  소정도예연구소장, 1999 - 2000 명지대학교 산업대학원 도자기기술학과 강사, 2001-경기도세계도자기엑스포 개막식(김대중 대통령 접견), 2002-국제도자 워크샵 초대작가 – 한국도자재단, 2004-경기도으뜸이 도자기 부문 선정(청자 참나무재유 개발)-경기도지사, 2014-사단법인) 다온시문화협회 시인, 본지 도자기 부문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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