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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639호 기사계첩 국보 지정 예고
  • 민병훈 기자
  • 등록 2020-10-29 23:26:42
  • 수정 2023-12-21 12: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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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진년 연행도첩’등 5건 보물 지정 예고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21,22면)-기로신초상(강현과 홍만조) 

[민병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왕실 하사품이 완전하게 갖춰진 채 300년 넘게 풍산홍씨 후손가에 전래된 ‘기사계첩’(보물 제639호)을 국보로 지정 예고하고, ‘경진년 연행도첩’ 등 조선 시대 회화, 불경, 마애불 등 5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耆社契帖)’(1978.12.7.지정)은 1719년(숙종 45년) 59세가 된 숙종이 태조 이성계의 선례를 따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해 제작한 계첩(契帖)으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궁중회화다.
 
행사는 1719년에 실시됐으나 계첩은 초상화를 그리는데 시간이 걸려 1720년(숙종 46년)에 완성됐다. ‘기사계첩’은 기로신들에게 나눠줄 11첩과 기로소에 보관할 1첩을 포함해 총 12첩이 제작됐다. 


현재까지 박물관과 개인 소장 5건 정도가 전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2017년도부터 실시한 보물 가치 재평가 작업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 지난해 국보 제325호로 지정됐다. 이번이 두 번째 국보 지정이다.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50면)-전가보장

이번 예고 대상인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은 기로신 중의 한 명인 좌참찬 임방(任埅, 1640∼1724)이 쓴 계첩의 서문과 경희궁 경현당(景賢堂) 사연(賜宴) 때 숙종이 지은 어제(御製), 대제학 김유(金楺, 1653∼1719)의 발문, 각 행사에 참여자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이들의 반신(半身) 초상화, 기로신들이 쓴 축시(祝詩), 계첩을 제작한 실무자 명단으로 구성되어 현재까지 알려진 다른 ‘기사계첩’과 구성이 유사하다. 

  

그러나 다른 사례에서는 볼 수 없는 ‘만퇴당장(晩退堂藏, 만퇴당 소장)’, ‘전가보장(傳家寶藏, 가문에 전해 소중히 간직함)’이라는 글씨가 수록돼 이 계첩이 1719년 당시 행사에 참여한 기로신 중의 한 명이었던 홍만조(洪萬朝, 1645~1725)에게 하사돼 풍산홍씨 후손가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경위와 내력을 말해 준다.
 
이 계첩은 300년이 넘은 오랜 세월에도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는 내함(內函), 호갑(護匣), 외궤(外櫃)로 이뤄진 삼중(三重)의 보호장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첩을 먼저 내함에 넣고 호갑을 두른 후, 외궤에 넣는 방식으로, 조선 왕실에서 민가에 내려준 물품의 차림새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왕실 하사품으로서 일괄로 갖춰진 매우 희소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제작수준도 높아 화첩의 완전성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외궤

보물 제639호 ‘기사계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고 후에 고종(高宗)이 기로소에 입소할 때 모범이 됐다는 점,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하고, ▲기로신들의 친필(親筆) 글씨와 함께 그림이 높은 완성도와 화격(畵格)을 갖추고 있어 현존하는 궁중회화를 대표할 만한 예술성도 갖췄다. 


이와 함께 계첩과 동시기에 만들어진 함(내함, 호갑, 외궤) 역시 당시 왕실공예품 제작 기술에 대해서도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므로 함께 국보로 함께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 권상1의2(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諺解) 卷上一之二)’는 중국 당나라 승려 규봉(圭峰) 종밀(宗密, 780~841)의 초본(鈔本, 베낀 글)에 세조가 한글로 구결(口訣)한 판본을 저본으로, 1465년(세조 11년) 주자소(鑄字所)에서 금속활자인 ‘을유자(乙酉字)’로 간행한 것으로 줄여서 ‘원각경(圓覺經)’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대승경전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 이후 사찰에서 수행을 위한 교과목 중 하나로 채택돼 널리 유통됐고, 마음을 수행해 원만한 깨달음(원각, 圓覺)에 이르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을유자’는 을유년인 1465년에 주조한 금속활자로, ‘원각경(언해)’을 간행키 위해 한글 활자를 별도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을유한글자’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활자가 단정치 못하다는 이유로 오래 사용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1484년(성종 15년, 갑진년) 갑진자(甲辰字)를 새로 주조할 때 녹여서 사용, 종류와 현존 예가 극히 드물다. 더욱이 이 을유자와 을유한글자로 찍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은 완질(完帙)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전래본도 많지 않은 편이다.

  대방광원각수다밀요의경_상1의2_내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 권상 1의2’는 전래되는 판본이 적은 귀중본으로서, 15세기 국어학과 서지학, 금속활자 인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므로 보물로 지정할만한 가치가 있다.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分類杜工部詩(諺解) 卷十一)’은 1481년(성종 12년)에  류윤겸(柳允謙, 1420~?), 조위(曹偉, 1454~1503) 등 홍문관 학자들과 의침(義砧, 15세기) 승려들이 왕명을 받아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두공부시(杜工部詩)’에 대해 여러 주석을 참고해 내용별로 분류하고 한글로 번역해 편찬한 ‘분류두공부시(언해)’의 권11에 해당한 책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로 간행한 번역시집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1455년(세조 1년)에 주조된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로 찍었다. 동시기 만든 한글 활자인 ‘을해한글자’도 사용해 조선시대 금속활자 인쇄사에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분류두공부시(언해)’는 조선 전기 왕실에서 두보시(杜甫詩)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원작에 충실해 우리말로 정밀하고 아름답게 번역한 조선 시대 한글번역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은 을해자(乙亥字)와 을해자 병용(倂用) 한글금속활자로 간행된 초간본으로서 그 중 권11은 기존에 알려진 자료에서 일부 결락된 부분을 확인할 수 있고, 반치음(半齒音, ㅿ), 방점(傍點), 아음(牙音, ㆁ) 등이 사용된 초기 한글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학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된다.  

  

동일한 권차가 없다는 희소성과 한글 창제 이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관리할 필요가 있다.


경진년 연행도첩-산해관도내 

‘경진년 연행도첩(庚辰年 燕行圖帖)’은 경진년인 1760년 11월 2일 한양에서 북경으로 출발해 다음 해인 1761년 4월 6일 돌아온 동지사행(冬至使行)의 내용을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열람할 수 있도록 제작한 어람용(御覽用) 화첩이다. 사행단을 이끈 정사(正使)는 홍계희(洪啟禧, 1703~1771)가, 부사(副使)는 조영진(趙榮進, 1703~1775), 서장관(書狀官)은 이휘중(李徽中, 1715~?)이 맡았고 화원으로 이필성(李必成)이 파견됐다.


화첩에 수록된 홍계희의 발문에 영조가 사행단이 떠나기 전 홍계희를 불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잡혀있던 심양관의 옛터를 자세히 살피라는 명을 내렸다는 내용과 그 외 참고할만한 사적(史蹟)도 그려서 올린 경위가 자세히 기록됐다. 


그 결과, 이 화첩에는 그가 화가들을 데리고 직접 현장을 찾아간 심양관(瀋陽館)과 산해관(山海關)의 옛터, 북경의 문묘(文廟) 등 유교 사적의 그림이 풍부하게 수록됐다. 

  

그림은 실제 경치를 그린 산수화와 건물의 배치를 그린 건축도로 나눌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듯한 부감법(俯瞰法)과, 평행사선형 투시도법 등 다양한 시점이 적용된 건물 형상은 입체적이고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달해주면서, 명도가 높은 산뜻한 채색과 정교한 묘사는 18세기 궁중기록화의 수준 높은 면모를 잘 보여준다.

 

‘경진년 연행도첩’은 제작 목적과 시기가 분명하고 영조의 어필(御筆, 임금의 글씨), 해당 유적지 장면, 그림과 관련된 도설(圖說), 설명식 발문 등이 일괄로 짝을 이뤄 사행의 일체를 이해할 수 있게 의도된 독특한 구성을 따르고 있다. 또 18세기 중반 궁중회화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작품의 성격 측면에서도 당시 시대상과 정치, 외교, 문화 등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자료로서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미륵원명 청동북-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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