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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의 한국기행1] 허물어진 요새의 폐허미(廢墟美)를 더듬다.
  • 박성환 기자
  • 등록 2021-02-06 16:53:13
  • 수정 2021-02-16 11: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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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 기자] 2월이면 ‘봄’ 인줄로만 알았다.

돈대위에 서고 보니 석벽을 타고 넘어 온 강화해협의 

거센 바람이 싸대기를 후려친다.

얼얼한 뺨을 쓰다듬으며 포루 속으로 몸을 숨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아끼지 못했을 것이다.

봄의 ‘한낮’ 인줄로만 알았다.

아지랑이와 봄볕을 기대한 여행자에게 

계절은 시간이란 네 멋대로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야멸찬 멸시의 시선을 보낸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와 용기는 

송두리째 사라지고 빼앗겼다.

자신감마저 상실해 갈 즈음 뼈 시린 바람이 전한다.

억지의 욕심을 버리라고 한다.

억지를 부리지 않으니 욕심이 사라지고, 욕심이 사리지고 나니

마음이 편할 것이란다.

세상의 법칙은 그렇게 묘하게 흘러간다면서, 

강화의 시계는 그렇게 끄덕이며 웃는다.

 

돈대 여행 일정

초지돈 > 덕진돈 > 손돌목돈 > 용두돈 > 광성돈 > 오두돈 > 화도돈 > 용강돈 > 갑곶돈 > 

월곶돈 > 무태돈 > 망월돈 > 계룡돈 > 삼암돈 > 망양돈 > 장곶돈 > 북일곶돈 > 분오리돈


(■답사가능 ■답사불가 ■위치확인 가능 답사어려움 ■자료없음)

지도출처는 ‘강화역사문화연구소(http://blog.daum.net/gihac)’이며,

내용의 수정은 작성자 본인입니다.

 

계획이 없던 무모함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무작정 강화도로 향했다. 3주에 걸쳐 매주 어김없이 강화도로 길을 나섰다. 사전조사도 없이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나선 길은 여지없이 난제에 부딪힌다. 찾아 볼 수 없는 곳, 있어도 들어갈 수 없는 곳, 보여도 갈 길을 찾지 못하는 곳, 지금 생각해도 뭔 짓인가? 싶다. 


다행인 것은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어렵게, 어렵게 찾아 진정한 아름다움을 만난 공간도 있다. 


직접 행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벅찬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무모함으로 시작한 답사는 여행자 스스로의 반성이었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남김’이 목표가 되어 버렸다. 


작고 어린 마음으로 시작했던 답사는 너무도 큰 교훈을 남겼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교훈으로만 삼고자 했던 답사였다.


늦었으나 글로서 다시 회상 해보고자 한다.


 

강화군은 1995년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인천광역시의 41%에 해당하는 114,235㎢의 면적으로 1읍, 12면, 1출장소를 두고 있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가진 섬이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라 하였는데, ‘갑(甲)’이란 ‘두 배’, 또는 ‘둘‘을 의미하며, 고차는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는 한자음 ’곶(串)‘을 의미하는 말로 강이나 바다로 돌출 된 지형을 말한다. 즉, ’갑곶(甲串)‘이라는 뜻이 된다. 

 

강화도는 선사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동안 한반도의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섬 자체가 ‘역사박물관’이다. 


하점면 장정리, 화도면 사기리, 동막리에서는 구석기유물이 발견 되었고, 신석기 유물은 강화도내 여러 곳에서 발견 된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고인돌)’가 80기 이상 도처에서 발견 되어 옛 오랜 시간 이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린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열었다는 ‘마니산 참성단’, 그의 세 아들에게 쌓도록 한 ‘삼랑성(=정족산성)’의 유적들은 강화도가 민족의 성지임을 알리기도 한다.

 

△ 초지돈대(初地墩臺), 초지대교 옆에 위치해 접근성이 우수하며, 병자호란 당시 포탄에 상흔을 입은 성곽과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초지진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효종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다. 고종3년(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 극동함대와 고종8년(1871년)4월에 통상을 가용하며 침략한 미국 아세아함대, 고종12년(1875년)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다. 우수한 근대식 부기를 앞세운 적들과 달리 사거리도 짧고 정조준도 안돼는 열세한 무기로 외세에 대항 한 곳이다. 운양호 침공은 이듬해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당시 초지진에는 병마첨절제사 1명과 군관11명, 군사 320명과 전선3척이 주둔하고 있었다. 

지금의 초지돈은 1973년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 사용하던 대포를 전시하고 있다.』


△ 포탄흔적,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의 격전장이었던 초지돈대에는 노송과 성벽에 포탄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강화도가 역사 속에서 주요무대로 나선 시기는 고려후기부터다. 

몽골과의 항쟁을 위하여 개성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강도시대(江都時代, 1232~1270)’의 고려궁터의 축성이 있었으며,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제조대장경, 1236~1251)’의 완성도 강도시대에 이루어 진 것으로 현재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강화도의 주요성은 더욱 부각된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의 두 차례에 걸친 만주족의 침입에 강화도는 중요한 피난처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강화도 섬 전체가 천연의 요새화로 피난처로서의 최적의 장소였다는 증명인 것이다. 이 후 강화도는 한양을 방위하기 위한 전초기지의 역할을 더하여 방비를 강화하게 된다. 


이로서 강화에는 ‘5진(鎭) 7보(堡) 53돈대(墩臺)’라는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는 강화도 해안의 물샐 틈 없는 방어 전략이 된다.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 남장포대(南暲砲臺)


△덕진돈대(德津墩臺)


△ 경고비(警告碑, 향토유적 제9호)

고종4년(1876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건립된 비로 외국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척화의지를 담은 비석이다.

높이147cm, 너비54.5cm, 두께28cm로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져 있다. 


이 후 조선말에 들어서면서 강화도는 서구와 왜적과의 격전지가 된다. 


1866년(고종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한 프랑스함대의 침략사건인 ‘병인양요(丙寅洋擾)’, 1871년(고종8), 미국의 통상요구가 발단이 된 ‘신미양요(辛未洋擾)’, 1875년(고종12)에는 개항을 요구하는 왜적선박과 충돌했던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그리고 이듬해 운양호사건을 빙자하여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이 체결 된 곳으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라고도 한다. 이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가 서구와 일본에 문호를 열기 시작한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수많은 외침에 국가를 지켜 온 강화도는 단군의 역사, 강도시대와 함께 조선말 서구의 개방 압력에 점철된 민족사의 현장이 된다. 

 

강화를 여행하는 길, 지도를 펼쳐보자.


강화도 지도를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해안을 따라 촘촘히 들어선 ‘돈대(墩臺)’들이다. 서구와 왜적의 침입을 막고자 설치한 53개의 돈대들이 늘어 서 있다. 각 돈대마다 군사들의 적 방어에 날카로운 눈빛을 내뿜는 살벌한 현장의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돈대의 ‘돈(墩)’은 흙더미를 이르는 말이다. 


산비탈을 깎거나 흙을 다져 평지를 만들고 그 위에 옹벽을 올려 쌓은 작은 성곽을 말한다. 높은 평지위에 성곽을 둘러 밖을 두르고, 안쪽은 낮게 두고 성곽 사이사이에 포격용 포구를 설치한다. 사각, 원형의 모습이 대부분이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였기에 돈대들은 저마다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돈대의 이름 속에는 ‘곶(串)’자가 많이 들어가는데, 이는 ‘바다 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땅‘을 뜻하는 것으로 지도상 돈대의 위치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툭 튀어나온 해안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 손돌목돈대(孫乭목墩臺)와 ▽용두돈대(用頭墩臺) : 돈대 중 유일하게 산자락이 아닌 바다로 나가 자리한 돈대로, 강화해협을 가로질러 자리하고 있다. 주위에 있는 손돌목돈대와 광성돈대, 광성포대와 연결 되어 있어 느긋한 걸음으로 반나절 코스로 함께 돌아보기에 좋다. 덕진진 소속이지만, 현재 광성보내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손돌목돈대와 함께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혜의 요새로서 원래는 손돌목돈대에 속한 외곽초소이자 포대이다. 고종8년(1871년)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되어 1977년 강화 전적지 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 하였다.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때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으로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다.』 


△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 광성돈대(廣城墩帶)


△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고종8년(1871년),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 일대에서 벌어진 미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용사들의 묘이다.

군관 및 사졸 53인의 전사자 중, 군졸은 고향에 안장하였고, 신원이 확인 되지 않는 51인의 사졸을 7기에 분묘, 합장하였다.


‘5진鎭 7보堡 53돈대墩臺’,


돈대는 진과 보에 속한 초소를 의미한다. 


진과 보는 지금으로 따지자면 대대와 중대로 볼 수 있으며, 돈대는 그에 소속되어 관측과 방어를 담당하는 소규모의 군사시설이다. 당시에는 계급적인 서열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진과 보의 서열을 논할 수는 없으나 각각의 진과 보에는 ‘첨사(종3품)’, ‘만호(종4품)’, ‘별장(종9품)’의 지휘자가 파견 되어 부대를 통솔하였다. 

 

5鎭은 월곶진(첨사), 제물진(만호), 용진진(만호), 덕진진(만호), 초지진(만호) 이며,

7堡는 인화보(만호), 승천보(별장), 철곶보(별장), 정포보(별장), 장곶보(별장), 선두보(별장), 광성보(별장)이며, 이러한 12개의 진보는 각각 3-5개의 돈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각 12진보에 관할 된 돈대를 보면 


월곶진 : 옥창돈, 월곶돈, 휴암돈, 적북돈

제물진 : 갑곶돈, 염주돈, 제승돈, 망해돈

용진진 : 용당돈, 좌강돈, 가리산돈

덕진진 : 덕진돈, 손돌목돈, 용두돈

초지진 : 섬암돈, 장자평돈, 초지돈

인화보 : 작성돈, 구등곶돈, 광암돈, 인화돈, 무태돈

승천보 : 낙성돈, 숙룡돈, 소우돈, 빙현돈, 석우돈

철곶보 : 천진돈, 철북돈, 의두돈, 불장돈, 초루돈

정포보 : 석각돈, 삼암돈, 망양돈, 건평돈

장곶보 : 검암돈, 장곶돈, 북일곶돈, 미곶돈

선두보 : 후애돈, 동검북돈, 택지돈

광성보 : 광성돈, 오두돈, 화도돈을 관할 하였으며, 


그 외에 영문 관할 돈대로 망월돈, 계룡돈, 굴암돈, 송강돈, 송곶돈, 분오리돈을 두었고 갈곶돈과 양암돈은 폐지 되었다.

 

이들 돈대 중 작성돈, 빙현돈, 철북돈, 초루돈을 제외하고 49개의 돈대가 1679년(숙종5)에 축조된다. 군사 4,300명, 승군 8,000명을 동원하여 평균 40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 중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이 복원 되어 있으며, 보중에서는 광성보가 제 모습을 찾았다. 돈대 역시도 사라지거나 터만 남은 경우와 군부대 내에 위치한 이유로 답사가 불가능 한 경우와 위치는 확인 가능하나 진입로를 못 찾은 경우도 있다. 


그러한 이유로 길손이 찾은 곳은 총 18개 돈대이다. 

 

△ 오두돈대(鼇頭墩臺)


△ 화도돈대(花島墩臺)


△ 오두돈대에서 바라 보는 강화해협


돈대의 설치는 해안지역의 감시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도 군사적인 중요한 요지가 된다는 뜻이다. 여행자에게는 훌륭한 문화답사의 기회이지만, 군사적인 부분에서는 즐기기만 하는 곳은 아니다.  지킬 것은 지켜가며 돌아 본 53돈대 중에서 18돈대, 그 역사를 따라가 본다. 

 

그 처음은 강화를 진입하는 첫 번째 교각 초지대교를 건너 우회전 하여 만나게 되는 ‘초지돈’이 그 시작이 된다. 


초지진의 초지돈을 시작으로 덕진진의 덕진돈, 용두돈, 손돌목돈으로 이어지며, 광성보의 광성돈, 화도돈을 지나 제물진의 갑곶돈을 거쳐 월곶진의 월곶돈에 닿는다. 월곶진의 다음 돈대부터 인화보의 인화돈 까지는 함경북도, 함경남도와 접경해 있어 사진 촬영은 물론, 답사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다시 계속해서 인화보의 무태돈을 시작으로 영문 관할의 망월돈, 계룡돈을 지나 정포보의 삼암돈, 망양돈을 지나고, 장곶보의 장곶돈과 북일곶돈을 지나 영문 관할의 분오리돈을 마지막으로 돈대답사를 마치게 된다. 

 

△ 용당돈대 외벽과 돈대 내부의 모습

 

 △ 용진진(龍津鎭, 인천시기념물 제42호)


△ 용진진에 속해있는 좌강돈대의 내부모습


△ 갑곶돈대(甲串墩臺)와 갑곶포대각(甲串砲臺閣), 현재의 갑곶돈대터는 강화역사관 내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 월곶진(月串鎭)


△ 월곶돈대(月串墩臺) : 현재 민간인이 돌아볼 수 있는 최 북방에 위치한 돈대로, 돈대 내에 ‘연미정(燕尾亭)’이라는 정자가 아늑하게 서 있으며, 돈대의 밖으로는 경기도 김포시와 황해남도 개풍군의 땅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 (단, 북쪽방향의 사진 촬영은 절대금지)


△ 무태돈대(無殆墩臺)


△ 망월돈대(望月墩臺)


△ 계룡돈대(谿龍墩臺), 들판의 끝자락에 세워진 돈대로, 동벽 석축 하단에 '강희18년 4월일 경상도 군위어영(康熙十八年四月日慶尙道軍威禦營)'이라 새겨져 있어 53개의 돈대들 가운데 유일하게 석축의 연대를 알 수 있다.


△ 원형의 형태를 가진 삼암돈대(三岩墩臺,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5호)


△ 망양돈대(望洋墩臺)


△ 장곶돈대(長串墩臺)


△ 북일곶돈대(北一串墩臺) : 찾아가기 쉽지 않은 돈대다. 약 2km의 산행이나 해안선을 따라 걸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군 시설이 자리하고 있어 자칫 다시 돌아서 가야하는 경우도 발생 한다. 그러나 길손은 북일곶돈대가 가장 아름다운 돈대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숙종5년(1679년)에 함경, 황해, 강원 3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동원되어 40일만에 완공한 돈대 중의 한 곳이다. 동쪽으로 미곶돈대까지 3,000m, 서쪽 장곶돈대까지 2,700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북일곶돈대의 높이는 2.5m, 둘레 120m의 규모의 장방형의 돈대로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가 4문, 치첩이 32개소였다.』


△ 분오리돈대(分五里墩臺) :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돈대로 강화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동막 해수욕장의 옆에 자리한다. 돈대 입구위에 올라서면 마치 초승달 모양을 가지고 있는 형태도 이채롭다. 또한 분오리돈대는 낙조가 아름다워 낙조조망지로도 유명하다.


『숙종5년(1676년)에 강화 유수 윤이제가 설치한 여러 돈대 중의 하나로 대포4문을 올려놓는 포좌와 톱니바퀴 모양으로 돌출시킨 치첩이 37개소가 있는 초지진의 외곽포대다. 동, 서, 남벽은 바다에 면한 천애 절벽의 요새로서 서쪽의 송곶돈대까지 3,100m로서 영문에서 돈장(墩將)을 따로 두어 지키게 할 만큼 중요한 돈대였다.』


△ 분오리돈대의 낙조


주말을 이용하여 3주간 찾은 강화 돈대 답사, 


견고하고 새롭게 복원 된 돈대가 있는가 하며, 위치조차도 파악이 되지 않는 돈대도 존재한다. 그러나 돈대 답사 여행에서 느낀 것은 돈대 축성 당시 방어조직의 치밀함이다. 돈대가 들어 선 자리는 영락없는 군사 요충지였고, 사방을 감시 할 수 있는 요새다. 더하여 돈대와 돈대간의 사이가 유기적이지만 서로를 충분히 확인 할 수 있는 거리에 자리하고 있음에 놀라움을 감출수가 없다. 

 

또한, 돈대의 안은 포근하면서도 아늑한 반면, 성곽위에 올라서면 탁 트인 공간으로 충분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지형에 따라 쌓은 성곽으로 사각, 직사각, 원형, 반원형 등의 제 각각의 돈대는 모양새만큼이나 분위기도 다르다. 


돈대설치 장소 자체가 모두 해안가이기에 훌륭한 해안 전망대가 되기도 한다. 더하여 역사속의 건축물을 만난다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들이 바로 ‘돈대답사’가 여행자에게 주는 재미다./글, 사진 박성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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