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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식민지 조선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자료집: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도항 통제> 출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03-05 02:4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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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 통제 자료로 보는 일본군‘위안부’의 동원과 이송 실상


[박광준 기자]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이영호)는 최근 일제침탈사 자료총서 시리즈의 하나인 <식민지 조선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자료집: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도항 통제>를 발간했다. 번역해제 편인 Ⅰ권과 원문자료를 영인한 자료 편 Ⅱ권으로 엮어 총2권으로 구성했다.


일반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제도라고는 하지만 그 시스템 차원의 이해는 깊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중일전쟁 이후 체계적, 조직적으로 시행됐고, 그 시행 초기에는 군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로 제도화됐다. 곧 일본군의 필요와 요청 하에서 일본의 외무성과 내무성, 척무성, 조선총독부 등이 협조하면서 동원과 이송 구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전쟁이 전개되면서 이러한 기관들의 역할은 약화됐고, 1940년 이후에는 일본군이 점점 노골적으로 개입하거나 직접 명령하는 양상을 보였다.


자료집에 의하면 중일전쟁 직후 일본정부는 중국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조선인, 타이완인을 귀환시켰다. 점령지가 확대되면서 전쟁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재도항 또는 신도항시켰고, ‘위안부’ 모집업자와 그들이 데리고 가는 여성들은 우선적인 도항허가 대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재중국 일본총영사관에서 외무성, 척무성으로 이어지는 통첩을 전달받으면서 업자와 여성들의 중국 도항을 지원하거나 억제했다.


일본 내무성은 1938년 2월 ‘창기와 사실상의 추업(醜業)에 종사하는 만 21세 이상, 본인 스스로 신분증명서 발급을 신청’하는 경우에만 ‘위안부’도항 허가를 한다고 공표했다. 이것은 1938년 전후 시기 유괴방식으로 ‘위안부’를 모집하는 업자들을 일본 경찰들이 검거하는 소동이 난 뒤의 발표였다. 업자들이 갖고 있던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발급의 신분증명서가 사실이고 이들이 군의 어용업자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경찰은 이들에게 도항 편의를 제공했고, 더불어 ‘유괴방식으로 모집’된 여성들도 위안소로 보내졌다.



따라서 일본 내무성이 내세운 ‘위안부’의 도항 허가 조건은 국제사회의 인신매매 금지법을 의식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만21세 이하 여성이 도항 허가를 받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또한 도항 허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 식민지인 조선이나 만주에서 도항허가를 받는 편법이 이용되기도 했다. 식민지는 일본이 가입한 국제법에서 제외돼 있기도 했고, 일본에 비해 차별적이거나 불비(不備) 상태이거나 예외 상태인 법의 시행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가장 신뢰했던 민간 위안소 위탁자는 ‘포주’라 불린 유곽업자들이었으며 이들은 공창제 하에서 형성된 인신매매 매커니즘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본군은 1938년 3월 4일의 통첩에서 경찰이나 헌병의 ‘긴밀한 연계’를 명령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제는 ‘위안부’ 동원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식민지를 활용하기도 했다. 곧 일제의 법역(法域) 안의 중층성과 차별성을 활용해 일본군‘위안부’제도를 만들어냈다. 그 일부를 이루는 것이 도항 통제 시스템이었다.


이번에 발간된 도항 통제 자료집은 한국의 국가기록원에 소장돼 있던 자료를 ‘위안부’ 관계 자료로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이미 발간된 ‘위안부’ 관계 자료집에 포함돼 있던 도항 통제 자료를 일본군과 일본정부, 조선총독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위안부’ 피해실태 연구와 토론이 좀더 심화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계속해서 ‘인신매매’, ‘전시 유언비어’, ‘공창제와 식민지 경찰’을 주제로 한 일본군 ‘위안부’ 관계 자료집을 발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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