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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의 한국기행 5] 어느 나른한 봄날의 기억, 교동도
  • 박성환 기자
  • 등록 2021-03-21 16:46:36
  • 수정 2024-03-23 00: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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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선포구에서 바라보는 교동대교


[박성환 기자] 덩그러니 놓인 작은 섬에서는 마음이 계절을 앞지른다. 

천천히, 천천히 가고 싶은 마음이건만 시간은 무심하게도 제 갈 길을 간다. 묻어두고 싶은 가슴의 자국이 아직 야속한데, 매몰찬 계절은 봄의 옷을 갈아입는다. 모진 한파 물러나고 나른한 계절이 돌아 올 즈음이면, 자연의 시간대로 사람의 손길은 분주하다. 


섬이라고 말하지만 어부가 없는 섬, 평화로워 보이지만 적막함이 감도는 땅, 그래서일까? 섬사람들의 입은 많이도 무겁다. 점심끼니 들자마자 밀려오는 춘곤증처럼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꺼풀 같은 묵직함, 반가움도 짧은 목 인사이고 보니 말 보다는 눈치가 더 빠른 인사를 대신한다. 

 

교동도 답사 일정

교동읍성 > 읍내리 비석군 > 교동향교 > 화개사 > 화개산 등반 > 대룡시장 > 고목근현지 > 고구리저수지 > 앙갈리 느티나무 > 교동 들녘 > 교동망향대 > 철책선 > 난정저수지 > 교동교회


교동읍성/둘레가 약 305m 높이가 약 2.4m 이며 용성 3곳과 치첩 네 곳이었다. 순조13년(1812년)에 당시 통어사 백동원이 치첩을 고쳤고, 고종 27년(1884년)에 부사 이교복이 고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나 폐하였다. 읍성의 3 문에는 각각 1층짜리 문루가 있었고 그 옆에 곡성이 4곳이 있었다 한다. 

읍내리비석군

읍내리 현 교동양조장 앞에서부터 서쪽으로 수십여개의 비석이 늘어서 있던 곳으로 비석거리로 불렸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교동의 지난날의 역사를 정립한다는 뜻에서 옛 교동의 관문이었던 남산포길 옆에다 세웠고, 1991년 다시 향교입구로 옮겼다. 


‘교동도’,

이북을 코앞에 두고 어느 정도의 불안한 땅에서 머무는 사람들은 늘 긴장하며 산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강하구가 분단선이 되어 피난을 온 사람들은 실향민이 되어 지금껏 머무는 곳이다. 북의 개풍과는 8km, 연백군과는 불과 3km 물길이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하구에 위치하여 서해바다의 중요한 기항지인 섬, 지금도 안보를 위한 중요한 섬의 위치를 가졌으니 옛 시절에는 오죽 하겠는가? 백제 때에는 ‘달을신(達乙新)’이라 하였고, 고구려 때에는 ‘고목근현(古木根縣)’을 설치하였고, 신라시대에 들어와서 ‘교동현(喬棟縣)’이라 하였다. 특히 조선 인조7년(1629년)에는 도호부로 승격, 삼도수군 통어사를 두어 경기도와 황해도, 충청도의 해군본부로 삼아 관아를 두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교동향교

고려 인종 5년(1127년) 때 각주에 향교가 세워졌을 때 화개산 북쪽인 고구리 향교골에 세워졌으며 교동읍이 읍내리로 옮겨짐에 따라 부사 조호신이 영조 17년(174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현존하는 우리나라 243개의 향교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다.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에서 발원한 임진강 물줄기가 한탄강과 만나 흐르고, 한강과 만나 서해로 흐른다. 섬 전체가 민통선으로 군사시설보호구역이다. 또한 어로한계선으로 인하여 조업이 제한되어 교동도는 ‘섬’이지만 농부가 대부분이다. 한강이라는 이름으로 김포를 거쳐 강화를 지나 교동도의 동과 북을 스쳐 지나는데 해협의 물길은 낮고 거칠다. 

 

하여 예로부터 왕족들의 유배지로도 유명했으니,

연산군은 교동도로 유배되어 섬에서 죽었고, 섬 안에는 지금도 연산군 유배지가 남아있다. 광해군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기 전 잠시 교동도에 머물렀었다. 외에도 선조의 서장자 임해군, 광해의 동복형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인조의 서자 숭선군, 사도세자의 3남 익평군과 영조의 서녀인 화환옹주까지 모두가 교동도로 유배되었던 왕족들이다. 

 

화개사

창건연대는 고려시대로 전하며, 고려말의 문신 목은 이색(1328-1396년)이 독서하였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금불상 2개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전한다. 원 건물은 1840년경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건립되었으나 1967년 다시 화재가 일어나 1968년 중건하였다. 


동서 10km, 남북 5km, 36km의 해안선을 가진 섬으로 여의도의 2배정도 크기에 해당한다. 

작은 섬에 자리한 화개산은 해발 259m의 야트막한 산이다. 섬의 외곽은 모두 철책으로 둘러쳐진 천혜의 요새가 되었고, 그 속의 땅을 일구어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이루어 냈다. 이러한 경작지는 강화도까지 더한다 해도 가장 넓은 경작지로 곳곳에 자리한 관개시설에 놀라울 뿐이다.


자연스럽게 무거워지고, 먹먹해진다. 

휴전선이 섬을 에두르고 있는 모습에 섬이지만 어부가 없다.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신은 공평하게도 비옥한 땅을 주었다. 그리하여 섬사람들의 대부분은 농사를 짓고 있다. 

 

2014년 7월, 교동대교의 개통은 섬에 활기를 주었다. 

완전한 관광지화, 이제 교동도(정확히는 대룡시장)를 찾는 사람들이 의외로 상당하다. 섬은 이제 활기가 넘친다. 이전까지 창후리 선착장에서 상용리 월선포를 배편을 이용해야만 했던 과거와는 많은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당시 섬을 방문하는 이들은 섬 주민과 친지들 말고는 주로 낚시인들이었다. 나와 같은 이방인은 드물었다. 


“허허~ 뭐 볼게 있다고?” 


2013년 당시 섬 주민이신 어르신의 말씀이지만, 지금은 그 시간과는 많은 변화를 보이는 교동도다.

 

화개산 봉수대 (강화군 향토유적 제29호)

화개산 정상과 이어지는 연봉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봉수대로 낮은 석단만이 남아 있다. 가로4.6m, 세로7.2m, 간존높이 1.2m다. 남으로 강화의 덕산봉수대와 동으로 하음의 봉천봉수대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교동도 자체가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외지인은 해병대 검문을 통과하여야만 하는 불편함이 있으나, 그럼에도 섬의 방문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아무리 세월이 흘러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휴전국가다.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나라,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것이다.


출입증을 받아 길이 3.44KM의 연륙교, ‘교동대교’를 통과하여 ‘대룡시장’만을 목적으로 해도 좋다. 그러나 시장만 둘러보고 가기에는 후회하게 되는 섬이다. 

 

실향민의 아픔을 담은 율두포 ‘망향대’가 그렇고, 북한 땅을 거침없이 조망할 수 있는 ‘화개산’ 정상이 그렇다. 그 외에도 화개산 오르는 길의 ‘봉수대’와 하산 길의 ‘연산군 유배지’와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한증막’도 둘러볼만 하다. ‘난정저수지’의 기가 막힌 관개수로와 드넓은 옥토를 본다면 왜 교동도가 쌀의 주 생산지인지 알 수 있고, 광활한 ‘고구저수지’의 연지도 지나칠 수 없다. 시간이 허락 한다면 월선포구 가는 길의 한옥성당인 ‘옛 교동교회’의 멋스러움도 놓치지 말아야한다.


교동도는 결코 작은 섬이 아니다.

 

화개산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인 곳이다. 해발259.6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강화해협은 물론이고, 북녘의 땅까지도 조망되는 곳으로 북녘땅을 누구의 간섭없이 마음껏 조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중의 한 곳이다.


효자묘


화개약수


오랜 시간 지내온 역사의 흔적이 남은 섬이자, 분단의 아픔을 바로 앞에서 느낄 수 있는 섬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한강하구가 분단선이 되었고, 섬으로 피난 온 사람들은 실향민들이 되어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 터를 잡은 섬이다. 


그 큰 무게의 감당을 지금껏 이고 지고 온 섬, 겉으론 마냥 평화로운 조용한 섬이겠으나, 그 속은 애닮과 수고와 눈물의 범벅으로 만들어진 묵언의 섬이다.

 

고구리한증막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한증막이다. 왕족들의 유배지여서 당시에 들어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교동의 땔감들이 한양으로 팔려나가고, 일제시대 벌목으로 사라지면서 한증막도 유지하지 못한것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고구리한증막은 둘레45m, 지름15m, 높이3m정도로 성인10명정도 들어 갈 수 있는 규모이나, 황토가 바람에 사라지고 현재는 돌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피난민들이 일군 땅, 교동.

지금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교동도의 유일한 읍내, 대륭리의 모습이다. 농협과 농기계 수리센타등의 현대화 되어 있는 시설들을 제외하고는 옛 풍경이 그대로 남는다. 피난통에 세워진 건물들의 구조는 마치 짜임새 있게 꾸며진 반공호와 같다. 미로처럼 얽힌 건물의 구조, 실타래가 얽힌듯하여 과연 철책선을 늘상 보고 사는 삶의 모습이구나 싶지만 정작 교동 사람들의 모습은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편안하다. 오히려 그러한 편안한 표정들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어 모이기도 한다. 


지나친 속도전과 치열한 경쟁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시나마 여유를 주고, 위로를 주며, 멈춘 시계바늘과도 같은 섬 풍경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대룡시장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 주민들이 피난처로 임시로 거주하던 공간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 되면서 당시이 골목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공간이다. '시간時間'의 의미를 되새겨 주는 공간이 된다.


지도를 펼쳐들고 대강의 코스를 살펴본다.

딱히 어렵거나 까다로운 길이 없다. 국도는 한길뿐이다. 어지간한 여행자의 볼거리들은 모두 그 길 변에 자리하고 있다.

 

교동 여행의 시작은 

교동읍성을 시작으로 읍내리 비석을 지나 ‘교동향교’를 목적으로 하고, 화개사와 화개산을 한바퀴 돌아보는 일정이다. 

 

고목근현지(古木根縣址)

고구려 때 고목근현을 설치한 곳으로 이루 인조7년(1629년) 도호부로 승격이 되면서 읍치을 읍내리로 옮기기전 까지 관아건물이 들어 서 있던 곳이다. 길이 1,200m로 4개의 문과 관아터, 부속건물터로 추정도는 흔적이 남아있다. 


‘교동향교(喬桐鄕校)’는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로서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 된 곳으로 고려 충렬왕12년(1286년) ‘문성공 안유(文성공 安裕, 1246~1306)’선생이 원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공자와 십철(十哲)의 초상을 모셔와 화개산 북쪽(현, 향교골)의 문묘에 모셨다가 충렬왕29년(1303년) 송도로 모셔졌다라고 하여 ‘수위(首位)’를 이루게 되었고, 교동향교를 ‘수묘(首廟)’라 칭한다. 그러던 영조10년(1741년)에 부사 조호신에 의하여 화개산 남쪽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현재 ‘대성전(大成殿)’에 ‘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송조2현(宋朝2賢)’과 함께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 다음이 ‘화개산(華蓋山)’이다.

해발 295m의 산으로 화개사 앞을 출발하여 화개산 정상에서 교동면사무소를 지나 다시 화개사 앞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잡았다. 약 2시간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화개산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시원한 조망에 있다. 북쪽의 땅을 아무런 간섭 없이 이렇게 바라 볼 수 있는 몇 없는 곳이다. 

 

고구리저수지

1976년 4월에 완공된 88.5㏊(26만6천평)의 저수지로서 사계절 어디든지 낚시할 수 있는 곳으로 주어종은 참붕어, 잉어, 빠가사리, 가물치등 공해없는 어종을 볼 수 있다. 바닷가쪽으로 둑을 쌓고 물을 끌어 올 때 물을 가두는 물푸기못으로 칭하여진 고구저수지는 상하류가 둑길로 갈려 있지만 물은 서로 통한다.  


양갑리 느티나무

드넓은 교동평야를 굽어 보며 선 느티나무로 수령410년으로 수고35m, 나무둘레 9.3m에 이른다. 

 

교동평야

섬 전체의 70%가 경작지로 섬이지만 쌀생산이 주를 이루는 섬이다.  특히 어지간한 농촌보다도 체계화되어 있는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수리시설이 눈에 뜨인다.

 

그리고 ‘대룡시장’,

교동도의 중심이다. 한국전쟁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이 고향 연백군을 생각하며 ‘연백시장’의 모습으로 만든 시장이다. “금방 돌아가겠지” 라는 생각에 튼튼하게 짓지도 않은 건물들로 세워진 시장은 함석판과 흩어진 목재들로 세운 것들이다. 그 세월이 흘러 50년을 넘어섰다.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한이 서리고, 남은 사람들의 생계유지가 된 시장이다. 그래서 대룡시장은 60년대의 풍경을 간직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평화로운 겉모습에 반하여 ‘시간이 멈춘 곳’이라 했다. 

누군가는 ‘과거를 기억하는 곳’이라 했다. 길손은 ‘시간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여기가 6.25때 부텀 있던 시장이야. 지금 집들이 다 그때 지어진 것들이거등..”


대룡시장을 여쭙는 여행자의 물음에 지나시는 어르신의 대답이시다. 드러내거나 내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하게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마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러한 역류의 시간 내지는 정체된 시간들이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작가의 시선들에서 나온 몇몇의 단어들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그러한 공간인 것이다. 옛 건물에 콘크리트를 덧대었고, 그 이전에는 스레트를 켜켜이 얹어 윗바람을 막았다. 더 그이전의 시간에는 판자때기로 바람을 막아 놓았을 것이다. 


교동도의 여행의 끝은 누가 뭐라 해도 대룡시장에서 짧게 만나는 과거와의 조우다. 

 

교동망향대

 남북분단 이전에는 이곳 교동도와 연백은 생활권이 같기 때문에 왕래가 잦았기에 연백과 백천을 줄여 연백망향대라고도 한다. 6. 25 이후 분단이 되면서 실향민이 생겨났고 연백이 잘 보이는 곳에 망향대를 만들고 설날과 추석에는 합동차례를 올린다. 


오롯한 분위기가 가득이었던 섬은 이제 달라져 간다. 

교동대교의 개통은 섬 자체의 삶과 질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새롭게 도로를 넓히고, 표지판들도 제법 친절해졌다. 시장은 시장다워져서 쓸쓸한 풍경 일색이던 피난처였다면 이제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남긴 명소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변한다는 것’

기분에서부터 달라지는 ‘변함’의 불안함은 무엇일까, 섬이 변한 것일까, 그 사이 내가 변한 것일까, 오랜만에 찾은 교동도를 둘러보며 그러한 변화의 불편함은 내내 나와 함께였다.

풍경의 변함이 없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눈길이 변한 것일까? 흘러버린 기억의 감정과 인지의 변화, 익숙한 바라봄의 호흡 변화는 결국 머물던 그대로이기를 바라는 바램의 변화였나 보다. 그만큼 기대하였기에 그만큼의 아쉬움이 남는다.


기억속의 맛과는 너무도 변해버린 서글픈 국밥 한 그릇과 덕지덕지 붙은 종잇장으로 정신 사나운 다방에 들러 노른자 띄운 쌍화차 한잔에 한기를 몰아내고 섬을 나선다.

 

교동도 철책


난정저수지

난정지구 농어용수개발을 위해 1997년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난정저수지의 수혜면적은 321만평(1070ha)에 이르고 유수면적은 121ha에 달하며 저수지 담수는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 한동안 낚시가 금지되었으나,현재는 낚시가 허용되어 많은 낚시꾼들이 찾고 있다 


상룡리 옛 교동교회

교동교회는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하고 있어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예배당 앞에 서 있는 종탑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종은 일제시대 때 전쟁에 쓰려고 배에 싣고 가다가 큰 파도로 인해 다시 제자리에 걸어놓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예배당은 처음 지을 때  초가였던 지붕을 1970년대에 푸른색 양철지붕으로 바꾼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다. 실내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돼 있고, 드리워진 커텐을  걷으니 햇빛이 잘 들어와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밝다. 예전부터 쓰던 오래된 풍금과 재봉틀을 변형해 만든 테이블도 운치  있다.


철새들만이 남과 북을 잇고 있었다.

사람은 철책을 놓아 군사시설을 만들어 놓았으나, 철새들은 곡창지대를 오가며 남과 북을 넘나든다. 교동의 갯벌과 교동평야는 철새들에게 중요한 안식처가 된다. 


교동의 땅은 사람에게도 삶의 터전이 되었다. 

일상에 찌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안식의 터전, 삶과 풍경의 사이에서 교묘하게 어울린 시간의 공간이 교동도에 머문다. 


물의 흐름만큼, 시간의 흐름만큼,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다만, 딱 그 시간만큼만 변하기를 바랄뿐이다.


순수가 녹아내린 삶의 섬, 

미치도록 나른한 교동도의 어느 봄날이었다. 

  

 월선포구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육지와 연결되는 교동도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여객선이 들어오던 곳이다. 현재는 뻘만 가득한 스산함만이 남았다. 

배 들어오는 시간이면 북적거리며 객들을 맞던 길거리도 이젠 나른한 봄날처럼 한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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