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박성환의 한국기행 7]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노래하다. - 벌교 '부용산'
  • 박성환
  • 등록 2021-03-29 18:25:20
  • 수정 2024-03-23 00:06:18

기사수정


벌교 절산에 자리한 부용산오리길,

구구절절한 가사와 질리도록 슬픈 선율이 어우러진다.

사연이 담긴 노랫말과 가락은 더욱 구슬프다.

이제 노래는 길이 되었다.

 


'부용산'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남도의 바람도 어느덧 계절이 옷을 바꿔 입었다. 바람결에 서로의 몸을 비벼대며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저 멀리 있는 길손에게도 알려진 ‘부용산 오리길’, 어떤 길일까?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인 ‘벌교’와 함께 일대는 물론 5, 60년대 호남지방에서 작자미상의 곡으로 흥얼흥얼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노래 '부용산'이 시작 된곳이다.

 


어느 댓글에 '부용산 오리길'이 걸으면 참 좋다는 글을 보았고, 

벌교를 여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는 구슬프고 애절하다. 알지 못하는 일이건만 무언가 가득 안은 슬픔이 전해진다. 노래는 또 어떤가? 아주 느리다. 슬프도록 처절하게 느린 노래다. 


'부용산 오리길', 기어이 찾아 나선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 

벌교 절산(현, 부용산)에 장사를 지낸 사내가 있었다. 시인, '박기동 선생(1917~2004)'이다.

1947년 누이동생 '영애(1923~1947)'가 24살의 나이에 순천도립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여, 절산에 장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 와 누이동생을 보낸 안타까움을 시로 쓰니 이것이 '제망매가(祭亡妹歌)'다. 


‘부용산’의 시작인 것이다. 



선생은 여수 돌산도에서 한의사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하였으며 중학교를 마치고 관서 대학 영문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우리말의 소중함을 인식하여 시인이 되기를 결심, 국어선생의 길을 택한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시대에 막히게 된다. ‘부용산’ 노래가 좌경의 詩로 낙인찍히면서 굴곡의 삶이 시작되었다.

누이동생의 죽음이 있던 그 해, 순천 사범학교에 재직 중 ‘교협사건’에 휘말려 4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전 1948년 4월에 김구 선생이 북한을 방문할 때 ‘밤중이라도 가야지’라는 헌시를 보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좌경시인’의 굴레를 쓰게 된다. 


옥고를 치루고 나왔으나 6개월의 정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하여 부용산의 작곡가가 월북한데다가 ‘빨치산의 노래’로 인식되었고 좌경으로 몰린 선생은 온갖 핍박에 결국 1957년 목포 사범학교 국어교사를 끝으로 교직을 떠났으나, 가택수색과 연금, 구금등으로 수시로 가족이 겪는 고난과 자신의 詩作 공책을 압수당하자, 이 땅에서 시를 쓰는 것을 포기하고 1993년 호주 시드니로 떠나 생활하다가 지병 악화로 한국에 돌아왔으나 2005년 끝내 88세의 일기로 숨을 거뒀다.

 



부용산을 작곡자는 음악교사 '안성현(192~2006)'선생이다. 

안성현 선생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소월 시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나주 남평에서 태어나 17세에 함경남도 한흥으로 이주한다. 음악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일본 음악학교 성악부를 졸업하고 목포 항도여중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이곳에서 천재문학소녀 '김정희(1931~1948)'을 알게 된다. 당시 중3이던 김정희는 문예에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어 당시 학교에서는 그녀에게 국어를 가르칠 교사가 없어 박기동 선생을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그 해, 김정희는 박 선생의 누이와 같은 병인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아끼던 제자의 죽음에 안성현 선생이 가락을 만드니 '애제자곡(哀弟子曲)'이다. 

 

서랍 속에 넣어둔 박 선생의 시작노트를 본 안 선생이 곡을 붙였고, 

노래는 같은 반 학생이 처음 불렀고, 호남일대로 퍼져나갔다. 이로서 노래 '부용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황과 묘한 일치에 사람들은 부용산에 열광했다. 남도에서 노래 부용산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지경이니 말이다. 


그러나 안성현 선생의 처삼촌이었던 '안막(安漠, 1910~1958)', 

그리고 그의 부인이자 안 선생에게는 외숙모인 신무용의 창시자, 천재무용가로 칭하는 '최승희(崔承喜, 1911~1969)'선생과 함께 1950년 월북을 하였고, 2006년 4월 평양에서 86세로 일기를 마감했다.

 


이로서 이념이나 사상과는 거리가 있는 노래였으나 작곡가의 월북과 함께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들이 즐겨 불러 ‘빨치산의 노래’로 인식되어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되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은 노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면서 60~80년대에는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작자미상의 구전가요로 명맥을 이어오게 된다. 


그러던 1997년 가수 안치환이 '부용산'을 노래로 부름으로서 세상에 알려졌으며, 노래가 완성되던 당시 김정희의 친구이자 박기동 선생의 제자 김효자 교수(전 경기대 교수)가 노래 악보의 원본을 제보하기에 이르고, 이동원, 한영애, 탈렌트 양희경등이 부용산을 부름으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1999년, 묻히기에 너무도 아까운 노래임을 알게 된 '연극가 김성옥(현, 목포시립극단 예술감독, 배우 손숙의 남편)'선생이 호주로 이민을 가 있던 박기동 선생을 찾았고, 52년 만에 노래 '부용산'의 2절이 작사되어 완성된다. 

 

그러한 애절함을 담은 '부용산',

사람들의 마음속에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아 놓은 노래는 뒤로 숨어 알음알음 전해지다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중심에 자리한 '부용산'이다. 

사연과 달리 지금의 부용산 시원한 바람과 완만한 산책로를 갖춘 명실상부한 웰빙트래킹 코스로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벌교 읍내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조망과 탁 트인 시야속의 산세가 가벼운 산책로서는 더욱 없는 좋은 길이다. 


벌교사람 뿐만이 아닌, 벌교를 찾는 사람들의 걸음까지 붙드는 '부용산 오리길', 

이제는 노래의 처절한 애닮음이 객에 닿아 그림자처럼 흥얼거리며 오르는 '낭만의 길'이 되었다.

 


벌교 부용산은 해발 192m의 벌교읍사무소 뒤편의 산으로 나지막하다.

봉우리에는 1600년대 낙안군수 임경업 장군이 쌓았다는 '부용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길게는 두류산(해발 230m)의 '전동산성'까지 이어지는 낭만적인 산책로다. 등산로라고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완만한 산세를 가지고 있어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짧게는 30분, 길게는 3시간 정도까지의 트래킹을 즐길 수 있는 산이기도 하다.

 

‘부용산 오리길’은,

벌교읍사무소를 출발하여 나무데크로 잘 놓여진 계단을 따라 오르면 널찍한 잔디밭의 체육공원이며, 그 위로 '충혼탑(忠魂塔)'이다. 오르는 동안 내려 보이는 벌교읍의 풍경은 적적할 정도로 고요하다. 충혼탑을 지나 길을 꺾어 오르면 '항일민족음악가'이자 '한국 근대음악의 원형'으로 불리는 '채동선(蔡東鮮, 1901~1953)'선생의 묘소이며, 그 뒤로 ‘부용산 시비’가 자리하는데, 바로 부용산 오리길을 만든 박기동시인의 시비다. 

 

시비를 지나 산책로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올라서면 '부용정(芙蓉亭)', 좌측길로 그대로 나가면 '용연사(龍淵寺)'로 가는 길이 된다. 

 

'부용산 오리길'로 이름 된 약 2km정도의 부용산 산책길,

길손과 같은 객이라면 30분에서 50분정도의 산책을 즐기면 좋을 것이고, 벌교에 계시는 분들이라면 전동산성까지 다녀 올수 있는 약 2~3시간 정도의 트래킹으로도 좋은 곳이다. 

 

'제망매가(祭亡妹歌)'와 '애제자곡(哀弟子曲)'이 어우러진 노래 '부용산',


그 恨과 설움이 뭉친 노래다. 

서럽고 서러운 음율에 목 놓아 울고 싶은 가사다. 드러내지 못했던 암울한 시대를 지나 이제 세상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러주고 있다. 충분히 울고 싶은 사람에게 참 좋은 노래다. 

 



 

 

 

 

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