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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의 한국기행 17] 자연이 빚은 조각, 비경秘境을 만나다.-철원 3대폭포
  • 박성환 기자
  • 등록 2021-09-11 18:21:59
  • 수정 2024-03-23 00:3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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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작정 철원으로 길을 나섰다.

축축한 무더위의 기운을 피하고 싶었고,

가득 푸르러 있을 우리네 산하를 만나고 싶었다.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 시원스런 물줄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철원의 그 아름다운 풍경에 한참을 머물렀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풍경,

그리하여 오롯이 간직된 비경, 자연에 고개를 숙였다.

 

철원3대폭포여행

삼부연 폭포 > 직탕 폭포 > 매월대 폭포

 


강원도 ‘철원(鐵圓)’,

멀리 후삼국시대 ‘궁예(弓裔, ? ~918)’가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여 ‘철성(鐵城, 철원의 옛 이름)’을 포함하여 18년간 통치하였고, 고려 태조1년(918년), ‘왕건(王建, 877~943)’이 고려를 세우면서 ‘철원(鐵圓)’으로 개칭하게 된다.

일제치하를 겪었고,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철원 땅은 인민공화국의 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로 하루에도 수시로 주인이 바뀌는 땅이 된다. 처절한 피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철원 지역은 군정(軍政)을 펼쳤고, 1954년 10월 21일이 되어서야 군으로부터 행정권을 인수 받아 지금의 ‘철원군(鐵圓郡)’이 되었다. 

 

지금이야 철원 곡창지대에서 나는 오대쌀의 명성이 자자한 곳이나, 

역사 속에서의 철원은 피의 비통함과 눈물의 애절함이 범벅된 땅이었다. 철원 땅에는 지금도 궁예와 왕건에 대한 전설과 유적이 많고,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수복전쟁이 벌어지면서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땅으로 휴전선을 지척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안보관광지’의 대표적인 장소다.

지금도 휴전선 일대에서는 여전히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땅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곳은 민간인통제로 출입을 엄격히 규제하였기에 철원은 지금도 자연의 풍경이 고이 간직되어 있어 비경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그 덕일까, 2억7천년만년 전,

‘어머니의 배꼽산’이라 불리는 북한 ‘오리산’의 10차례 이상 폭발하면서 현무암질의 용암을 쏟아냈다. 일대의 화강암을 덮으며 철원에서 포천, 연천을 거쳐 파주까지 한탄강을 따라 흘러갔다. 이러한 화산 활동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현무암과 화강암의 암석이 만나 세월이 빚어낸 조각들이 예술 작품처럼 남아있는 곳이다. 

 


그러한 지질학적 가치의 자연경관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폭포(瀑布)’다. 

철원에는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세 폭포가 있다. 길손은 이를 ‘철원3폭’이라 하는데 ‘삼부연폭포’와 ‘직탕폭포’, 그리고 ‘매월대폭포’다. 모두가 ‘철원8경’으로 억만년이상의 지질과 훌륭한 자연경관에 시인, 묵객들이 찾아가던 곳이다. 또한, 한국전쟁당시 수시로 주인이 바뀌던 땅에서 한동안 민간인 통제구역이었던 곳이기에 지금까지 자연이 빚은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삼부연 폭포(三釜淵 瀑布)’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 용봉산 중턱에 자리한 폭포로 철원군청에 용화천을 따라 용화저수지로 향하다 터널을 만나게 되는데, 터널 진입 전에 자리하고 있다.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폭포의 상류에 자리한 용화저수지가 철원군 상수원 보호지역으로 인근에 펜션이나 식당, 매점 등의 편의시설이 없어 아름다운 경관이 유지되어 있다. 



높이 20m에서 흘러내리는 삼부연 폭포는 암석들 사이로 지그재그로 흘러내리는데 하늘에서 바라보면 3개의 소(沼)로 보인다 하여 ‘삼부연’이라 하고, 그 모양이 가마솥(釜:가마솥 부)의 모양과 같다하여 각각 노귀탕, 솥탕, 가마탕으로 불린다. 다른 이름으로는 ‘용화폭포’라고도 한다. 


‘용화(龍華)’라는 이름에는 ‘용(龍)’에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폭포에는 네 마리의 이무기가 살고 있었는데, 이 중 세 마리는 용이 되어 승천하였고, 남은 한 마리가 승천하지 못하여 심술을 부리면 가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은 폭포아래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전한다. 폭포 아래 움푹 패어있는 곳은 용의 발자국이며, 폭포의 암석에 긁혀있는 자국은 승천하던 용의 비늘에 긁힌 자국이라고 전해진다.

 


삼부연 폭포는 약 1억7천년만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측정 되고 있으며, 주요 암석으로는 ‘흑운모’와 ‘백운모’가 함께 섞인 ‘복운모 화강암’이다. 

검은빛과 진주빛이 절묘하게 어울리며 장쾌한 물줄기가 더하여 웅장함을 자랑한다.

 

이러한 웅장한 경관은 조선 후기 화가이자 문신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 1742년 72세의 나이로 금강산을 가던 길에 발길을 멈추고 ‘진경산수화’를 그렸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길손이 찾은 날은 흐린 하늘의 구름이 많고 수량이 많지 않았던 날이다. 

그럼에도 삼부연의 폭포수는 건강했다. 힘차고 경쾌하다. 지방도로의 바로 옆에 자리한 이유로 아주 쉬운 방법으로 만날 수 있어 좋다. 


철원군에서 목조 데크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놓았다. 

가까이서 만나는 억만년 된 암석과 그 사이의 시원한 낙수가 그리도 시원한 것을, 이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직탕 폭포(直湯 瀑布)’


철원의 국민관광지라 할 수 있는 ‘고석정(孤石停)’에서 북서 방향으로 약 2km정도 거리에 있는 폭포다. 고석정은 신라시대에는 진평왕이 정자를 세워 쉬던 곳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임꺽정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일대는 신생대4기 ‘홍적세(Pleistocene Epoch, 약1만~160만년전의 빙하기)’때 용암이 분출하면서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하천을 메우게 되었는데 이는 추가령 부근과 전곡, 김화, 철원 일대에 자갈과 모래를 덮은 현무암이 된다. 그 하천이 ‘한탄강’이고 강을 따라 북으로 올라서면 만나는 폭포가 직탕폭포다. 



직탕폭포는 길이 80여m, 높이 3m의 폭포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일자형 폭포’로 물줄기가 강 전체를 아우르며 직각으로 떨어진다. 

폭포의 상부는 현무암, 하부는 화강암으로 침식작용에 의하여 현무암 아래 있던 화강암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지질학적 가치를 지닌 폭포라 할 수 있다. 제주도와 같은 현무암이지만 그 차이가 분명하다. 화산재가 굳어진 제주도의 현무암과 달리 철원현무암은 용암이 굳어진 것으로 그 보다 더 무겁다. 

 

넘치는 수량으로 폭포 전체가 뒤 덮일 때 보다 간간히 흘어내리는 물줄기 사이로 검은 현무암을 함께 감상하는 것이 포인트가 된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의 중심에 서서 검은 암석사이로 흘러내리는 횐 물줄기를 만난다. 

장쾌한 시원스러움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한동안 서 있으니 멍한 기운이 돈다. 흐르는 강물 인건지 내가 위로 부양 되는 것인지 조차 헷갈릴 즈음이면 몽롱한 아침 폭포수의 연무가 또 하나의 장관을 만들어 낸다.



직탕폭포를 안내하는 문구의 대부분은 ‘한국의 나이아가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 거창한 표현이다. 

그 단어만을 듣고 찾아간다면 다소 아쉬운 풍경이다.. 차라리 ‘한국 최대의 일자형폭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고 그 표현에 충분히 답할 수 있는 멋진 풍경의 ‘직탕폭포’다.


 

‘매월대 폭포(每月臺 瀑布)’


철원의 3대 폭포 중 가장 위쪽에 자리한다. 우리나라 최북단의 등산이 가능한 ‘복계산(福桂山, 1,057m)’에 자리한다. 

나머지 두 폭포는 폭포의 바로 앞까지 차량의 접근이 용이하지만 매월대 폭포는 약 400여m를 걸어야 한다. 그만큼 깊고, 울창한 수림에 가려있는 비경이 간직되어 있는 폭포다. 



원래 폭포의 이름은 ‘선암폭포’이다. 폭포에서 약 200m 정도 오르면 층암절벽을 만나게 되는 이곳을 ‘선암바위’라고 한다. 

 

‘매월대(每月臺)’라는 이름은 ‘생육신(生六臣)’의 한사람이었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의 호를 따 지은 것이다. 세조1년(1455년) 삼각산에서 독서를 하던 중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에 환멸을 느꼈고, 세조의 극악함에 모두가 피하고 있을 때 ‘사육신(死六臣)’의 시신을 바랑에 담아 노량진에 임시 매장을 하고는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르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전국을 유랑하게 된다. 

방랑생활 중의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씨(古氏)성을 가진 6형제와 조카2명과 함께 찾아 은거한 곳이 바로 철원 복계산이었으며 그 중 해발 595m에 자리한 층암절벽인 선암바위에 바둑판을 새겨 놓고 바둑을 두며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고 전한다.

이 후 마을 사람들은 그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을 ‘매월동’, 선암바위는 ‘매월대’, 선암폭포는 ‘매월대 폭포’라 부르게 되었다.

 


‘매월대폭포 버스정류장’ 삼거리에서 폭포 쪽으로 약 1km정도 들어서면 도로의 끝이 복계산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약 400m 산행을 한다. 놓치지 말아야 할 풍경은 산의 초입부터 시작된다. 오르는 동안의 숲의 풍경은 지나치지 못할 만큼의 푸름과 시원함이 있다. 비 온 뒤의 숲이어서 인지 더욱 짙은 푸름에 늙은 나무 등걸의 이끼조차도 신령스럽다. 폭포는 아직 먼 것 같은데도 계곡의 물소리는 발자국과 함께 동행을 한다. 그렇게 10여분, 드디어 선암 폭포, 매월대 폭포 앞에 선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진정한 비경은 바로 이러한 풍경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태초의 자연 풍경에 가까운 풍경의 오롯함에 한참을 머문다. 

잠시 사람들의 스침이 남긴 아쉬움도 있지만 폭포의 자연풍경은 건재하다. 시원스럽게 흘러내리는 폭포수, 맑게 고인 소(沼), 그 아래 바위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길 역시도 자연스러움 그대로다. 

 


매월당 선생의 비분함도 잊는다. 폭포 오르는 동안의 습한 기운속의 비지땀도 잊는다. 그리고 세상만사 복잡하고 어지러운 지친 삶도 잊는다. 

자연이 주는 기운, 매월대 폭포가 보여주는 풍경에는 그 만의 모습만이 남는다. 

 

바쁘게 살아가는 삶,가끔은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유유자적 머물다 눌러앉아 있고도 싶고,

이리저리 바쁘게 떠돌며 눈으로 세상구경을 하고 싶었다.

만남에서 배우고, 고개 숙일 줄 아는 그 때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고 묵은 마음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풍경, 진정한 철원 폭포 여행의 참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글,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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