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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의 한국기행 18] 지리산골, 어머니의 젖무덤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전북 남원’
  • 박성환 기자
  • 등록 2021-10-10 21:52:24
  • 수정 2024-03-23 00: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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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골, 어머니의 젖무덤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전북 남원’

 


지리산이 품고 안은 땅, 남원

바람이 산을 넘어 오면서 산의 줄기마다에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흘러든다. 남원에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소리의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남원의 지리산 자락은 소설 속 배경이 되고, 동편제의 고향이 된다. 첩첩산중에 쌓인 그 곳만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어머니의 젖무덤과도 같은 지리산이 품은 이야기가 제 가슴에 닿는 곳, 남원이다.

시를 따라, 소리를 따라 흘러든 남원, 이내 지리산으로 흘러든다.

 

전북 남원 여행

혼불문학관 > 광한루원 > 춘향묘(육모정, 용호정, 용호서원) > 구룡폭포 > 와운마을(천년송) > 매동마을(공할머니민박)

 


어리석은 자도 지혜로워진다는 어머니의 산, ‘지리산(智異山)’

글자 그대로 풀어본다면 ‘지혜로운 이인(異人)의 산’이라 뜻이다.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지리산은 민족적 숭앙을 받아온 ‘영산(靈山)’이다.


우리나라 영, 호남의 지붕으로 생명의 산이요, 삶의 터전이다.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전북의 ‘남원’, 전남의 ‘구례’, 그리고 경남의 ‘하동’, ‘함양’, ‘산청’에 걸쳐진 큰 산으로 크고, 깊고, 넓은 산. 지리산은 사람이 짐작하지 못할 정도의 세월을 지내왔다. 

그 시간동안 묵혀 둔 이야기들, ‘남원’에서 지리산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실 지리산을 만나기 위한 남원의 방문은 흔치 않다. 

‘춘향과 이몽룡’, ‘변강쇠와 옹녀’, ‘홍보전’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기에 그들과 관련 된 문화공간이 더 많이 어우러져 있기에 사람들은 그에 맞추어진 여행을 떠나는 곳이다. 흥과 소리가 어우러진 땅, 그에 따르는 문화관광이 잘 버무려진 땅이다.


남원은 ‘보이는 그대로의 산세가 가장 부드러운 곳’이기도 하다.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중산지로 지리산을 멀리서 조망하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부드러운 조망은 사색과 글쓰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남원은 수많은 시인, 작가들을 불러들였으며, 그 중 대하소설 ‘혼불’의 소설가 ‘최명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혼불문학관


소설가 ‘최명희(崔明姬, 1947~1998)’를 만나기 위해서 ‘혼불 문학관’을 찾는다.

남원시 사매면의 작고 조용한 마을에 자리한 문학관으로 사매면 매안마을의 실제 소설의 배경인 곳이다. 혼불 문학관은 2채의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의 내용을 형상화 시킨 디오라마와 작가의 집필실,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과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쉼터이자 사무실로 사랑실과 누마루로 이루어진 ‘꽃심관’이다. 또한 문학관과 함께 주위에는 소설 속 배경인 ‘노적봉’과 ‘청호저수지’등이 자리하고 있어 소설의 향수를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대하소설 ‘혼불’은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17년여에 걸쳐 쓰인 작품으로,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부터 1943년까지 3대에 걸친 양반가의 종부와 그 주위의 민촌 거멍굴 사람들의 이야기 하고 있다. 근대사의 격동 속에서 전통적 삶을 지켜나가는 양반가와 변동천하를 꿈꾸던 천민간의 갈등 속에서 조선 양반가의 기품, 천민들의 애환을 다룬 작품이다. 


히, 작품 속에는 호남지방의 관혼상제와 정월대보름의 세시풍속, 음식과 판소리 등을 철저하게 고증하여 기록하였으며, 지역의 방언을 풍부하고 생생하게 복원하여 기록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혼불’ 이외에도 많은 단편소설을 집필을 하였던 작가 최명희.

그러나 ‘혼불’을 집필하면서부터는 다른 작품을 손에 대지 않았던 그녀다. 끝까지 ‘완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혼불’에서 글을 놓지 않았던 작가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앞으로 쓰여 질 글감만을 남기고 5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멀리 지리산이 아스라하다.

산안개가 우수수 깔릴 것만 같은 분위기의 ‘혼불문학관’이다. 문학관의 자리는 한 없이 조용하다. 누군가 계속 글을 쓰고 사색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공간이다. 의미 없는 소음은 애당초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그러한 묵직함, ‘혼불문학관’에는 그러한 작가의 숨결이 남았고, 그녀의 자취를 찾아가는 곳이다.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마디 새겨 나가던 작가의 말을 되새기며 길을 나선다.

 

문학관에서 바라본 사매면 일대


사내면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원 시내를 지나치게 된다.

그리고 남원시내 한가운데를 흐르는 요천, 섬진강의 지류인 이곳에 이름도 익숙한 ‘광한루원’이 있다. 

 


‘광한루원(廣寒樓苑)’,

‘광한루’라 함은 ‘하늘나라의 월궁’을 말한다. 

광한루원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닮아가고자 하는 생각을 담아낸 공간으로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이 땅에 만들어 놓은 정원’이다. 하늘의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와 오작교를 놓았고, 신선들이 머무는 삼신산을 연못 안에 만들면서 천체우주를 상징하도록 하였다. 이 일대를 모두 아울러 ‘광한루원’이라고 한다.

 

이러한 ‘광한루’는 조선시대 세워진 누각으로 명승 33호에 지정되어, 서울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 진주 진주성내의 ‘촉석루(矗石樓)’, 평양 금수산 모란봉아래 ‘부벽루(浮碧樓)’와 함께 ‘대한민국 4대 누각’으로 꼽히기도 한다. 

 


광한루는,

고려 문종24년(1170년), 고려시대 왕실의 족보를 관할하던 ‘전중감(殿中監)’의 ‘황공유(黃公有)’가 ‘무신의 난’으로 불리는 ‘이의방(李義方)’의 난으로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낙향하였는데, 훗날 그의 후손이자 학자였던 ‘황감평(黃鑑平)’이 ‘일재(逸齋)’라는 작은 서실을 하나 지었고, 이 후, 조선 태종18년(1418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승 방촌황희(政丞 厖村黃喜, 1363~1452)’가 세자 양녕대군의 폐출불가를 주장하다가 남원부로 유배되어 4년간 있으면서 선조의 ‘일재’터에 누각 ‘광통루(廣通樓)’를 지은 것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세종26년(1444년)에는 전라도관찰사 ‘학역재 정인지(學易齋 鄭麟趾, 1396~1478)’가 천상 월궁에 비유하여 ‘광한청허부(廣漢淸虛府)’하였고, 세조7년(1461년)에 남원부사 ‘장의국(張儀國)’이 누원 일원에 요천의 물을 끌어다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를 만들어 지상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으면서,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니 칠월칠석에 단 한번 만난다는 ‘오작교(烏鵲橋)’를 연못위에 설치하게 된다. 


길이 57m, 폭 2.4m의 오작교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경간을 만들어 양편의 물 흐름을 원활하게 하면서 미적인 요소도 갖추면서 한국정원 문화의 대표적인 교각이 되었다. 광한루 오작교는 현존 연지교 중 가장 큰 규모이며, 전라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알려진다.

이후 선조15년(1582년)에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4)’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호수 가운데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세 섬을 만들었고, 봉래섬에는 백일홍을, 방장산에는 대나무를, 영주섬에는 영주각을 지어 섬과 섬 사이를 교각으로 연결하면서 광한루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후 정유재란 때 방화로 모두 불에 탔는데 그 중 오작교만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이며, 나머지는 고증에 의하여 복원된 것이다. 

 

그저,

성춘향과 이몽룡의 밀애의 장소로만 알려졌던 광한루,

그 속내에는 신선에 가까이 다가고자 했던 인간의 마음이 있었으며, 지체 높으신 양반님들이 인간으로서 신선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지은 공간이 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광한루’가 ‘춘향전’의 주 무대임을 무시할 수 없다.

절개의 상징으로 알려진 춘향과 이몽룡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주요공간인 것이다. 광한루원 동편에는 ‘춘향사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열녀 춘향사’라는 현판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화가인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화백의 춘향영정이 걸려있다. 


또한, 춘향과 몽룡이 백년가약을 맺은 ‘부용당’과 행랑채가 자리한 ‘월매집’, 유화9폭으로 춘향일대기를 전시한 ‘춘향관’이 자리한다. 1971년에 세워진 ‘완월정’은 매해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 열리는 ‘춘향제’의 무대다. 


남원시에서는 역사속의 ‘광한루원’보다는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이야기로 광한루를 알리고 있다. ‘사랑’이 ‘역사’보다 무겁지 않으며, 공감할 수 있는 애잔한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 들이기가 더 쉽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홍예다리 ‘오작교’에 서서 지리산을 바라본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그 곳에는 춘향의 묘가 있다. 이제 ‘춘향묘’를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선다.

 

남원 추어탕


남원 시내를 빠져나와 17번 국도를 따라 지리산을 향하다가 60번 지방도로를 갈아타고 들어서면 국립공원 지리산 매표소 입구다. 이곳이 소설 속 주인공 ‘춘향묘’가 있는 곳이다.


주위에는 ‘육모정’, ‘용호정’의 정자와 ‘용호서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두 정자 사이에 구룡 계곡이 반석 위를 흐르고 있다. 


춘향묘


‘춘향묘(春香墓)’는 육모정의 맞은편 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소설속의 춘향이 어찌 묘역까지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지만, 남원 땅에서 밀어 붙이는 춘향전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1962년에 ‘서옥녀지묘’라고 새겨진 지석(誌石)이 발견 되었는데 남원시에서는 이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여 축대를 높이고 너른 묘소를 만들었다. 그 앞에는 ‘만고열녀성춘향지묘(萬古烈女成春香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러니, 실제 인물이 아닌 소설 속 주인공을 남원시에서 ‘서옥녀’라는 실제 인물의 묘를 재정비하면서 ‘춘향묘’라 한 것으로, 실제 춘향이의 묘는 아니다. 하나의 소설을 허구 아닌 허구로 만들기 위해서 만남의 장소부터 열녀의 묘까지 스토리텔링으로 잇고 싶은 남원시의 속내가 보이는 곳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보면 좋을 듯 한곳이다.

 

육모정


하지만 그와 달리하여 춘향묘의 앞에는 남원 사람들의 자부심을 치켜세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육모정(六茅亭)’,

400여년 전, 남원의 선지들이 모여 용소 앞 너럭바위에 육각 정자를 지은 것으로 원래는 계곡의 변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1960년 큰 비로 유실이 되어 지금의 자리로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서 선조5년(1572년) 남원도호부에서 향약을 제정하였고, 또한 지금까지 이어진 ‘원동향약(源洞鄕約, 전북 유형문화재 제146호)’유적으로 계원들의 모임을 가진 곳이다. 

또한, 판소리의 중시조, ‘가왕 송흥록(歌王 宋興祿)’이 소리공부를 하던 곳이자 득음에 이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송흥록’은 동편제 판소리의 시조로 특히, ‘춘향가’ 중 ‘옥중가’에서 ‘귀곡성’을 부르면 “촛불은 꺼지고 서까래에서는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라고 전해질 정도다. 


그러나 예술인으로서의 선을 넘었던 그였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던 철종14년(1863년), 이조판서 ‘김병기(金炳冀, 1818~1875)’를 비방하다 함경도로 귀양을 갔는데, 이후 고종1년(1864년)에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이 그의 출중한 소리 실력을 알고 있기에 그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끝내 그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귀인이자 가왕이었던 그의 삶은 그렇게 기이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한 가왕이 득음을 한곳, ‘육모정’, 새삼 다른 모습으로 느끼게 된다.

 

용호정


육모정의 뒤로는 구룡계곡의 하얀 포말이 넘실거리며 지나가고 있다. 

한 낮의 무더위도 식혀 줄만큼의 물살이 흐르고, 지리산의 산세는 넉넉히 물길을 안고 있다. 이 푸르른 풍경에 녹아들고 싶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송흥록이 득음을 하였다는 용소를 지나면, 또 하나의 작은 정자 ‘용호정(龍湖亭)’이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정자다. 그러나 야트막한 산 그림자가 드리워진 정자는 구룡계곡을 마주하고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송림이며 앞에는 구룡계곡이다. 사방이 탁 트인 공간속의 용호정이다. 어리석은 자의 눈에는 오히려 육모정 보다 이 작은 정자가 더 마음에 들어온다. 

 

용호서원


길을 따라 지리산으로 더 들어가면 지척에 ‘용호서원(龍湖書院)’을 만난다.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사립 중등교육기관으로 1927년 ‘입헌 김종가’를 주축으로 원동향약에 소속된 지역의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것으로 음력 3월15일이면 제향을 올린다고 전해진다. 


솟을삼문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으나, 담장이 없어 길 없이 출입이 가능하다. 

정면3칸 측면1칸의 팔작지붕의 ‘목간당(木澗堂)’과 ‘수성재(須成齋)’의 두 채의 한옥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측 위로 가장 최근에 새로이 중수하였을 법한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의 사당 ‘경양사(景楊祠)’가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중국의 성현 주자(朱子)를 배향하였으나, 후에는 남원의 충절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1836~1905), 영송 김재홍(嶺松 金在洪), 입헌 김종가(金種嘉)를 배향한다고 한다. 성현 배향과 함께 후학양성을 하던 곳으로 소학과 사서삼경등을 강학하였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근현대사의 격동을 지나면서 서원은 해체 되었고, 시간은 그대로 흘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관리되지 않은 경내에는 요란하게 짖어대는 수 마리의 개들만이 낯선 이를 경계하며 짖어대고 있을 뿐이다.

 


육모정이 구룡계곡의 실질적인 제1경이라 한다면 그 대미는 ‘구룡폭포’다.

춘향묘에서 지리산을 관통하는 60번 도로를 따라 지리산의 중심을 향해 달린다. 


이곳에서 산행이라면 약 3km로 1시간50여분이 걸리는 산행길이며, 차량으로는 내기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약 1.2km의 구룡암을 지나면 폭포주차장으로 약 20분정도다. 

 


주차장에서 약700여m,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얕잡아보았다가는 큰 코 다치는 곳이 구룡폭포 가는 길이다. 평지를 걷는 듯 출발하지만 나무 계단 길을 만나면서부터는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한다. 

내려서고, 내려서고, 다시 또 내려서고.... 이 길을 다시 올라올 생각에 마음이 갑갑해지는 길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서고 나면 우렁찬 물길의 소리가 들린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바라보며 깊이 숨겨둔 자연의 위대함과 경이로운 폭포의 모습에 감탄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곳이 폭포의 시작인 줄 알고 이곳만 보고 돌아서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는 폭포를 가로지르는 출렁다리를 건너고 폭포의 옆으로 난 또 다른 철 계단을 걸어 올라야 비로소 구룡폭포를 만나게 된다. 쏟아져 내리는 물길의 소리만으로도 을씨년스러울 정도의 시원함을 준다. 폭포수의 물길로 깊이 만들어진 소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푸른색을 한다. 나무계단의 후들거림을 견디고 찾은 보람을 느끼게 되는 곳이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지만, 다리 건강이 좋지 않은 분들이나, 노약자들에게는 결코 권하고 싶지 않은 구룡폭포 가는 길이다. 그만큼 나무 계단의 심한 경사도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계단의 숫자가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룡폭포


이렇듯 남원팔경 제1경의 위용은 지리산의 품에 꼭꼭 숨어 있다.

‘구룡계곡(九龍溪谷)’에는 ‘음력 4월 초파일에 아홉 마리의 용이 내려와 아홉 곳의 폭포에 각각 자리를 잡아 놀다가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원래는 ‘열두 계곡’ 이었으나 수를 세는 범위에서 가장 큰 수가 ‘아홉’이기에 ‘구곡(九谷)’이라 부르고 있다. 


다른 이름으로 ‘용호구곡(龍湖九谷)’이라고도 한다. 특히 가장 위쪽에는 두 갈래의 폭포를 이루고 있는데, 용 두 마리가 어울리며 꿈틀거린 것처럼 보인다 하여 ‘교룡담(交龍潭)’이라 하고 용이 살다가 승천한 곳으로 ‘구룡폭포(九龍瀑布)’가 된다.

 

매동마을


구룡폭포를 뒤로 하고 다시 지리산의 품속으로 향한다.

60번 도로와 다시 합류하여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삼거리에서 737번 지방도로와 만나 선유폭포를 지나고 힘겹게 정령치를 넘어서고 달궁 삼거리에서 861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달궁 야영장을 지나고 나면 ‘뱀사골’의 입구에 닿는다.

 

지리산 천년송


당당하게 지리산을 굽어보고 있는 와운마을의 당산목인 ‘지리산 천년송’을 찾아가는 길이다.

뱀사골 탐방 안내소에 도착하면 안내를 받게 되는데, 와운마을 내의 민박이나 식당예약이 아니라면 ‘천년송’만을 위한 방문에는 차량통행이 허락 되지 않는다. 

뱀사골의 풍경을 눈과 마음으로 받으며 약 2km정도 오르다 보면 ‘와운교’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와운마을’과 ‘뱀사골 탐방코스’의 갈림길이다. ‘천년송’이 목적이었던 여행자이기에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와운마을로 향한다.


그런데 구룡폭포의 피곤함이 풀리지 않음이었을까? 유독 경사 심한 콘크리트길을 오르자니 여간 힘에 부친다.

콘크리트길이 아스팔트길로 바뀔 때 즈음, 그리하여 숨이 턱에 차오를 때 즈음이면 ‘와운산장’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구름도 누워간다.’는 ‘와운마을’ 입구다. 천연기념물 제424호 천년송을 당산목으로 섬기고 있는 마을이자, 15번째 국립공원 명품마을로 선정 된 곳이다.

 


‘천년송’은 와운산장 앞의 산길에 들어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힘겹게 걸어 오른 길, 그 곳에는 지리산의 하늘을 바라보며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자리한다. 일명 ‘할매소나무’과 ‘할아비소나무’로 불리는 ‘지리산 와운 천년송’이다. 그 중 더 크고 거대한 할매 송을 ‘천년송’이라 한다. 


이 깊은 산중에 사람이 살기 이전부터 서 있던 소나무로 수령은 600년 이상으로 보고 있다. 수고 20m, 둘레 6m, 수폭 12m에 이르는 거대한 소나무로 마을에서 공동으로 잘 관리하여 나무의 상태가 매우 건강하다. 검붉은 빛의 건강함을 가진 천년송의 뒤에는 ‘할아비 송’이 너그럽게 바라보며 선다. 까탈 스러워 보이지만 인자함은 속으로 숨긴 어느 양반 댁의 영감님과도 같은 모습이다. 할매송의 육중함에 가려 있으나, 단단한 수형과 인고를 버텨온 꼿꼿함이 할매를 지켜보고 서있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이러한 신령스럽고 영험한 모습의 소나무는 마을의 ‘당산목’으로 매해 정월 초사흘이면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이제 남원 지리산 여행의 마지막 ‘매동마을’을 찾아 길을 나선다.

와운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행정구역도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매동마을’은 지리산 둘레길의 첫 개통 마을로 마을은 제3구간 인월~금계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식당 내지는 민박을 겸하고 있다. 

이곳이 사라들에게 알려진지는 꽤 되었는데 언젠가 TV의 예능프로그램이 이곳을 찾으면서 더욱 유명세를 치루고 있는 곳이다. 마을의 입구에 자라하고 있는 24찬 산채밥상의 ‘공할머니 민박’이 대표적이라 보면 되겠다. 그 외에도 마을 전체가 민박을 하고 있을 정도로 방이 부족한 경우는 거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마을 전체가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대략 180여명이 숙박할 수 있으며, 식사는 민박집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약20여명 정도가 할수 있다. 

 

특히, 공할머니 민박은 정성이 가득 담긴 소박하지만 결코 소박하지 않은 밥상이 있다. 약 20여가지가 넘는 산채나물과 반찬들, 그리고 할머니가 직접 담은 ‘청국장’은 보통의 도심이나 식당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밥상이다. 근래에는 할머니댁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몇 년 전에는 마을의 초입에 새로이 민박집과 매점을 신축할 정도로 인기가 있는 곳이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즐길 수 있는 지리산 매동마을, 각박한 도심을 떠나 휴식을 위한 여행길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한가하면서도 여유로운 분위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다소 아쉬움이 남는 곳이기도 하다. 

모르는 이들과의 겸상은 어찌되었던 불편할 수밖에 없고, 한 채의 주택에 각각의 방을 민박을 내주기에 화장실이 하나라는 것과 사용하는 물이 부족한 경우도 자주 발생하여 민박을 하는 손님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편함을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다면 ‘매동마을’은 천혜의 자연을 품은 멋진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이 가장 높아지는 계절을 앞두고 찾은 ‘남원’, 그리고 ‘지리산’이다.

지리산과 함께 하며 지리산에 기대지 않은 삶이 없다. 산의 온도, 바람이 그러하고, 그 산세와 함께 풀 하나의 생명, 나무 한그루의 끈기가 그러했다. 


수많은 묵객, 시인들이 찾아 들어 산을 그렸고, 득음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계곡으로 찾아 들었다. 사람들은 지리산을, 그리고 그 품속에서 자란 나무를 믿음의 근간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지리산의 끝도 없이 이어져 내리는 능선 아래 자리한 ‘남원’

산이 보듬어 둔 이야기 가득한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지리산의 풍경에 녹아든다. 그러한 풍경 속에 사연 얽힌 걱정거리들이 사라진다. 그토록 부드럽게 안아준다.


지리산은 사람들의 어머니였다.



글,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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