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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춘곡의 봄'전 개최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0-14 02:46:54
  • 수정 2021-10-14 02: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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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로구청 고희동미술관 재개관 기념전시

사진출처-고희동미술관 

[이승준 기자] 화가 이전에 대한제국의 관리였던 그는 미술 연구를 위한 출장 명령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서양화를 전공했다. 귀국과 동시에 한국근대화단의 새로운 막을 열면서 서양화가 및 교사로 활동했으나, 신문물의 급진적인 수용이 어려웠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미술계를 개척해 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붓을 잡으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동.서양화의 기로에서 고심 끝에 동양화가로 전향해 평생을 살았다. 다만 동경 유학 시절 습득한 서양화법을 회화 속에 녹아내, 독창적인 형식의 한국화를 모색하고자 한 노력이 그의 작품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2012년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주관해 첫 전시를  연 이후, 여러 차례 고희동과 당대 서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해왔던 고희동 가옥은 2019년 5월 종로문화재단 위탁운영을 시작으로 큰 전환점을 맞았다. 


종로구 제2의 구립미술관으로 새롭게 출범해 수준 높은 전시와 이와 연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화가 고희동을 알려 나가고 있다. 특히 재개관을 기념해 개최하는 기획전시 '춘곡의 봄'은 화업의 길에 신미술의 시앗을 뿌려 동.서양화의 절충 양식을 꽃피운 고희동의 다양한 작품을 보여준다. 특히 고희동의 현존하는 서양화 3점(영인본) 모두를 출범해 한국근대화단에 선구자로 등장했던 그의 예술 세계를 다시금 조명하고 있다. 



춘곡 고희동은 서울 비파동 출신으로 역관이었던 아버자의 영향을 받아 관련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수학한 후 1904년 대한제국의 관리가 됐다, 이후 심전 안중식, 소림 조석진 문하에 들어가 취미로 그림을 배우던 중 미술 연구 출장 명령을 받아 1909년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됐다. 1915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한 후 서양화가, 도화교사로 활동했으나 1920년 후반 동양화로 전향해 전통적 수목화법에 서양화의 색체 및 기법을 쓰는 절충양식의 새로운 한국화를 시도했디. 


미술핼정가로서 면모가 뚜렷해 1918년 최초의 근대적 미술단체인 서화협화 결성 및 총무 역임을 시작으로 1945년 조선미술협회 초대회장, 1950년 대한미술협회 회장,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회) 심사위원을 활동했다. 정계에도 제출해 1960년 민주당 참의원으로 당선된 고희동 화백은 미술계의 발전과 제도 마련을 위해 노력했고, 1965년 향년 80세로 타계했다. 



종로구립 고희동미술관은 고희동 화백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18년 직접 설계한 한옥으로 41년 간 생활한 곳이다. 전통 한옥과 일본 가옥의 절충을 시도했고 지상 1층의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있는데,  사랑방 옆에 그림을 그리는 화실을 따로 둔 것과 채와 채 사이를 오가기 편하도록 복도를 이어 낸 점이 특징이다. 


고희동 화백의 다양한 작품이 탄생한 곳이자 당대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한 공간으로서 근대예술가적 의미를 가지는 고희동 가옥은 일제강점기 한옥의 변화 양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 도한 인정받아 2004년 등록문화재 제84호로 등록됐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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