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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 왕비의 유일한 집전 제례, '선잠단'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10-16 22:00:09
  • 수정 2024-03-23 01: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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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북동이라는 사랑방, 조선, 성북동을 만들다(2)

1930년대 선잠단지 모습/자료사진 

2016년 선잠단지 정밀발굴조사 현장 모습/자료사진[박광준 기자] 한양도성이 축조돼 성북동의 지리적 윤곽이 잡히고 몇 년 후(1413), 성북동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소가 생긴다. 바로 선잠단(先蠶壇)이다. '선잠'은 누에고치를 처음 시작했다는 중국 고대 황비 '서릉'씨를 의미한다.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태종 때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선잠제는 왕비가 집전하는 유일한 제례였다. 조선 왕조는 왕비가 뽕잎을 직접 따서 누에를 치는 친잠례(親蠶禮)를 왕실 아녀자의 중요한 소임이라 여길 만큼 양잠을 중시 여겼다.  무려 500여 년 동안이나 이어지던 선잠제향은 안타깝게도 1908년 선잠단의 신위(神主를 모시는 자리)를 사직단으로 옮기면서 중단됐다. 


현재 성북동에 소재한 선잠단지 표지석 

선잠단지/ 현재 사적 제83호선잠단지는 2016년 선자만지정밀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유구를 기초로 재현됐다 그러나 본래 선잠단 영역은 왼편 의 도로까지 포함된 범위였으므로 조선초기 선잠단 원형의 모습으로 복원이 어려운 상황이다.80여 년간 사람들에게 잊혀졌다가 1993년 성북구청에서 재현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전통이 되살아났다. 전문가들의 철저한 고증을 거쳤기에 선잠재향 재연은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선잠 왕비, 제관, 취타대 등 150여 명의 참가자들이 화려한 복식과 제례악 등 조선문화를 살펴보고, 특히 직접 누에에서 실을 뽑는 체험이 이색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열리지 못했다. 


조선 후기로 들어와 성북동은 그 존재감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북동은 한양도성 안으로 통하는 문이 두 개 있고, 북쪽에서 성을 감싼 형세로 지대가 무척 넓다. 성 안의 소식이 빠르게 전파될 뿐 만 아니라 넓은 지대에 인가가 거의 없으니 왕조는 수도 방위에 있어 성북동에 관심이 많았다. 영조는 급기야 어영청의 '성북둔(군량을 지급하기 위해 국가에서 지급하는 밭과 논)'을 실시(1765)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켜 성북동 지역에 살게했다. 하지만 지대는 북악산의 깊은 계곡과 물길로 이뤄져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 왕실은 이주민들에게 목면, 포, 모시 등을 삶는 일과 메주 쑤는 일을 맡겨 생계를 보장해줬다. 


# 성북선잠박물관


동소문 밖 사한이에 선잠단이 있었다. . '사한이'는 성북동의 옛 이름이다. 이 외에 선잠단이 동교 또는 북교에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선장단은 조선시대 500년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성북동의 이 자리를 지켱왔다 .(좌) 세종대 이후 정비된 조선의 악기와 음억에 관련돤 제도를 담은 책으로 각종 악기와 악보, 의례에 쓰이는 의복과 기물 등에 대한 설명이 그림과 함게 자세하게 제시돼 있다. 선잠제에서 스이던 등가와 헌가, 음악인의 복식과 기물 등도 수록돼 있다.('악학궤범',1493년, 성현 등 편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우) 선잠단이 표시된 조선시대 지도 <도선도> 18세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성북동에는 조선시대 선잠단의 터가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남아있다. 선잠단은 양잠의 신(神)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한 해의 풍요와 안정을 기원했던 신성한 공간이다. 선잠단에서 이뤄졌던 선잠제는 음악, 노래, 무용이 결합돼 예악(禮樂)의 문화를 담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성북선잠박물관은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는 '터를 찾다'로 먹고 입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농업과 잠업은 고대 사회 발전의 주요한 밑거름이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인간에게 양잠을 처음 가르친 서릉씨를 '선잠'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내면서 한 해의 풍요와 안정을 기원했다. 조선시대에는 선잠제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져 꾸준히 시행됐다. 제사를 지내던 선잠단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성북동의 이 자리를 지켜왔다. 



2부는 '예를 다하다'이다. 조선 왕조에서 선잠제를 시행했다는 기록은 1400년(정종2년)부터 나타났다. 선잠제는 태종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제단의 설립과 제도가 모색됐고, '국조오례의'에는 선농과 같은 중간 규모의 제사로 수록됐다. 선잠제는 주관자가 왕비였으나, 신하들이 대신해 왕실의 뜻을 받들고 선잠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 제관들은 규범과 법칙에 맞춰 희생과 폐백을 올렸고, 악공과 일무가 절차별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었다. 선잠제는 의례 속에 악.가.무 그리고 음식이 어우러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친잠례는 왕비가 손수 누에고치의 모범을 보여 양잠을 장려키 의한 의식으로, 왕비의 친잠은 1477년(성종8)에 이르러 처음으로 시행, 조선시대에는 총 8번 시행됐고, 1767년(영조43)에 이뤄진 친잠례는 '친잠의궤'로 남아 그 면모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3부는 '풍요를 바라다'로 개방형수장고에 전시된 양잠과 직조 관련 도구들을 통해 누에고치에서 비단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비단은 값이 비싸고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고급 옷감이었다. 왕실의 예복으로 사용된 비단과 자수 궁중잔치에서 사용된 소품 장신구에서 우리는 매우 세련되고 뛰어난 예술감각을 느낄 수 있다. 전통을 따른 아름다운 작품들을 통해 우리 옛 사람들의 멋과 지혜를 살펴볼 수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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