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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69] 우리 나라 1호 검사 일성 이준열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11-14 16:23:43
  • 수정 2024-03-14 06: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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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열사 지묘/사진-박광준 기자 

[박광준 기자] 호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본명 순칠(舜七).초명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출생했다. 


29세에 북청에서 초시(初試)에 합격, 1894년(고종 31) 함흥 순릉참봉(純陵參奉)에 임명됐으나 곧 사직하고 상경, 다음 해 신설된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보에 임명됐다.



자유평화수호의이준열사 상/사진-박광준 기자 그러나 조신(朝臣)들의 불법과 비행을 들춰 파헤치다가 그들의 면관(免官) 운동 때문에 취임 1개월 만에 면직되고 곧 독립협회에 가담, 평의장(評議長)으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1897년(광무 1)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에 들어가 이듬해 졸업하고 귀국, 다시 독립협회 일을 보다가 무고로 간부 17명과 함께 피체, 수개월 후 석방됐다.


1899년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되자 민영환(閔泳煥).이동휘(李東輝).이상재(李商在)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 러일전쟁 후 일제의 한국침략과 친일 주구(走狗)들의 활동이 노골화하자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를 조직해 황무지 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하고 일진회(一進會)와 대항해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됐다. 




친일대신(親日大臣) 5명을 성토하다가 피체, 철도(鐵島)로 유배됐으나, 이듬해 민영환.이용익(李容翊)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로 발전시켰다.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해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세웠고 함경도 출신 유학생 장학회인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뒤에 이를 서우학회(西友學會)로 발전시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세웠다. 



그 해 평리원(評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검사가 돼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재판하다가 미움을 받아 8개월 만에 평리원에 피검, 고종의 특명으로 석방돼 검사에 복직됐으나 법무대신의 책동으로 곧 파면됐다.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령(密令)으로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과 합류,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고, 그동안 헤이그에 묻혀 있던 유해는 1963년 서울 수유리 묘지로 이장됐다./사진-박광준 기자 


근현대사기념관 2층 전시실에 걸려있는 '헤이그다운 공동묘지 이준 열사 묘적지'

이준 열사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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