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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은 남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1-25 09:04:12
  • 수정 2024-03-10 09: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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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기념관 경내 야외전시물 시.어록비(2)

[이승준 기자] 독립기념관 경내에는 야외 전시물인 애국 선열들의 시.어록비가 건립돼 있다. 여기에는 이순신 등 전통시대에 국난을 극복한 인물과 김구 등 일제 침략기에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선열들의 불굴의 민족혼과 자주 독립의지가 담긴 어록이 새겨져 있다. 짧은 글 속에 녹아있는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은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되새기게 한다.<편집자 주>/사진-이승준 기자

 

장형(張炯 : 1889 ~ 1964)의 호는 범정(梵亭)이고,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1909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하면서, 도산 안창호(安昌浩), 의암 손병희(孫秉熙)의 반일애국독립사사에 영향을 받았다. 이후 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했고,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가서 이 극(李極).안창하(安昌夏).이진산(李震山).전덕명(全德明) 등에게도 군자금을 조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극을 통해 전덕원(全德元).오동진(吳東振).오광선(吳光鮮) 등에게도 군자금을 전달하다가 수차 투옥됐다 한다. 그후에도 현금과 패물 등을 모집해 송병조(宋秉祚)목사를 통해 임시정부의 이시영(李始榮)에게 전달케 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김마리아(金瑪利亞 : 1892 ~ 1944)는 황해도 장연군 출신으로 기독교학교인 소래학교와 정신여학교를 거쳐 수피아여학교.정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동참했다.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귀국해 3.1운동에도 참여했다가 일경에 피체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를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키 위해 노력 중 또 다시 피체돼 옥고를 치렀다. 혹독한 고문과 악형으로 병보석으로 풀려 난 후 상해로 망명해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임시의정원 의원.국민대표회 대표로 활동하다가 1923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파크대학.시카고대학원.뉴욕신학교 등에서 수학하면서 한편으로는 1928년 근화회를 결성해 꾸준히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귀국해 원산의 마르다윌슨신학교와 장로교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의식의 고취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1944년 3월 고문의 후유증이 악화돼 평양 기독병원에서 순국했다

윤세주 (尹世冑, 1901 ~ 1942)의 호는 석정(石正). 경상남도 밀양군 내이동에서 출생해, 밀양공립보통학교, 사립 동화학교, 서울 오성중학 수학했다. 1919년 밀양에서 3.1운동 만세시위 주도 후 중국으로 망명해, 같은 해 11월 길림성에서 ‘의열단’ 창립에 참여했다. 1920년 6월 의열단의 국내기관 총공격 거사 실행 직전에 서울에서 일제에게 피체돼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1927년 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다. 1931년 9월까지 밀양청년회, 신간회 밀양지회, 중외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32년 3월 중국으로 재망명해 1935년 9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했고, 졸업 후 교관을 역임했다. 그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겸 훈련부장, 호북성 강릉의 중앙육군군관학교 특훈반 교관을 역임했다. 1938년 10월 호북성 한구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정치조 훈련주임 겸 한글본 기관지 편집주임을 맡았다. 1941년 조선의용대의 화북진출 결의에 따라 제3지대 정치위원이 돼 대원을 인솔했고, 그해 7월 산서성 요현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해 간부훈련반 정치교관 담임했다. 1942년 태항산지구에서 일본군에 맞서 ‘반(反)소탕전’을 전개하던 중 적탄에 피격돼 그해 6월 3일 향년 42세로 순국했다. 1982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독립장이 추서됐다.

노복선(盧福善 : 1912 ~ 1997)은 평남 진남포(鎭南浦)에서 태어났다. 1936년 중국중앙군관학교 제12기(中國中央軍官學校 第12期) 보병과를 졸업했다. 1939년 9월 임시정부 군사부의 명령으로 이준식, 나태섭 등과 군사특파단에 편입돼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화북지구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 조성을 위해 활동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 부관에 임명됐고, 같은 해 11월 제1지대 간부로 산서성(山西省) 지역에서 활동했다. 1940년 11월 29일 광복군 총사령부가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옮기게 되자 그는 총사령대리 황학수(黃學秀), 총무처장대리 안 훈(安勳), 참모처장대리 김학규(金學奎) 등 200여명과 함께 서안(西安)에 도착해 항일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공작을 준비하고 진행했다. 1941년 각 지대를 편성시켜 각지에 파견해 사병을 모집, 훈련시키면서 적에 대한 정보수집, 항일 유격전을 실행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케 했다. 그는 제1지대장인 이준식을 중심으로 제1지대의 간부로서 산서성 대동(大同)에 근거를 두고 산서성, 하남성 등에서 활약했다. 1941년에는 광복군 제2지대의 제3구대장 및 총무조장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국군에 입대했고, 1954년 육군 101사단 118연대장을 역임하고, 전역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승희(李承熙 : 1847 ~ 1916)의 호는 한계(韓溪)이며,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됐을 때에는 수백명의 유생을 거느리고 소수(疏首)가 되어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목베이고 조약의 파기를 요청하는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올렸다. 같은 해 12월 25일에는 대구경찰서에 체포돼 일인의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일본의 비위(非違)를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옥중 투쟁을 전개했다. 다음해 4월 석방됐으나 국외로 망명하기까지 끊임없이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성주(星州)의 국채보상단연회(國債報償斷煙會)의 회장이 되어 활동했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서한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만행을 규탄했다. 그리고 그가 직접 회의에 참석해 일본대표와 대질하겠다고 제의했다. 동년 광무황제의 강제 양위와 융희제(隆熙帝)의 등극 소식이 있자 그는 가일층 분노해 일제에 이 사실을 항의하고 양위의 부당성을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1908년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자 그는 문인(門人) 김창숙(金昌淑) 등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여기서 이상설(李相卨).안중근(安重根).유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에는 이상설.유인석 등과 함께 만주와 노령의 국경 지대인 밀산현(密山縣) 봉밀산(峰密山)에 황무지 45방(方)을 구입해 100여 가구를 정착시켜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한흥동(韓興洞)이라 명명했다. 또한 이곳 한흥동에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우고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을 실시했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반을 닦았다. 1913년에는 안동현으로 옮겨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설하고 강유위(康有爲).이문치(李文治) 등 중국공교회 간부들과 친선을 도모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4년에는 상해의 박은식(朴殷植)과 연락해 언론기관의 설립과 국사교육을 논의했고,, 중국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등에서 활약하다가 1916년 2월 28일 중국 심양 서탑(西塔) 일승잔(日昇棧)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남자현(南慈賢 : 1872 ∼ 1933)/남자현 지사는 1873년 12월 경북 영양군에서 태어나 19살에 의성 김씨인 영주(永周)와 결혼했으나 부군이 김도현(金道鉉) 의병진에 참여해 활동하던 중 전사하는 불행을 맞았고, 이후 유복자인 성삼(聖三)을 기르면서 부친의 의병 활동을 지원하다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1919년 3.1 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도 서로군정서 등 독립 운동 단체에 참여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만주지역 각지에 교회와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들의 의식개혁 및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여성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채찬 등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처단하려는 의거를 진행 중에 사전 정보의 누설로 실패하고 만주로 되돌아 갔다. 1928년 안창호와 김동삼 등 47인이 중국 경찰에 체포되자 이들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했'. 1932년 만주사변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만주에 도착하자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써서 손가락과 함께 조사단에게 보내 우리 민족의 강렬한 독립정신을 전달했다. 1933년 일제가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 행사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함께 기념식에 참석하는 일제의 수뇌부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하얼빈에서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돼 6개월간 온갖 고초와 심문을 받았고, 15일간 단식을 결행하자 보석으로 석방됐으나 1933년 8월 끝내 숨을 거두었다. 1962년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유인식(柳寅植 :1865~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래(聖來). 호는 동산(東山). 출신지는 동후면(東後面) 주진동(舟津洞) 삼산(三山 : 현 예안면 주진리). 유인식은 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서 전통적인 영남유학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1896년 의병에 참가한 뒤 1898년경 상경해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인식은 신채호(申采浩).장지연(張志淵) 등과 교류하면서 서구의 근대사상과 학문에 심취하게 됐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해 국권을 강탈하자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구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1907년 봄에 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김동삼(金東三)과 함께 임하 내앞(川前)에 협동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그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여해 영남지방의 교육구국운동을 펼쳤고, 1907년 11월 대한협회 조직에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했다. 또한 안창호.양기탁 등이 중심이 돼  공화제 수립과 자주독립국가의 달성을 위해서 결성한 신민회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신민회는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해외이주를 추진했다. 이에 유인식은 협동학교의 업무를 유동태에게 위임하고, 안동출신 인사인 이상룡(李相龍).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서간도 봉천성 유하현에 경학사를 조직하는데 참여한 그는 교육부장을 맡아 독립운동기지 건설 및 이주한인들의 생활안정에 기여했다. 1910년대에 그는 {대동사(大東史)}라는 역사서를 저술했다. 1920년 이상재(李商在).유진태(柳鎭泰) 등과 함께 전국교육기관을 통일해 조선교육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 박중화(朴重華)와 함께 조선노동공제회 설립에도 참가,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고, 선전부장으로서 경상도를 순회하면서 강연을 통해 지방의 청년.지식인들을 고무시켰다. 1926년 말부터 국내외 독립운동계에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나고, 1927년 2월에 신간회가 조직됐다. 이에 그는 8월에 안동지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선출돼 활동하다가, 1928년 4월 29일 서거했다. 이에 신간회 안동지회는 다른 청년운동단체와 함께 안동사회장을 치르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묘는 예안면(禮安面) 계곡리(桂谷里)에 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박시창(朴始昌 : 1903 ~ 1986)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일찍이 부친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선생을 따라 노령(露領) 등지를 거쳐 중국 본토로 망명했다. 1925년 남경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중퇴하고 무창(武昌)의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黃 軍官學校武漢分校)에 입교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군으로 대일전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고, 1941년에는 김홍일, 최용덕과 함께 중국위륭군대학(中國威隆軍大學) 특별반에 입교해 군사학을 연마했다.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에 편입돼 고급참모로 활약했고, 민족혁명당에 가입해 후보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44년 10월에는 임시정부 참모부의 참모로 임명돼 같은 해 12월까지 재직했다. 1945년 8월 한국광복군 상해지대장에 임명돼 교포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한적(韓籍) 사병들의 귀국 알선에도 진력했다. 귀국 후 국군에 입대해 6.25 전쟁에 참전했고,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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