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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 인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1-26 12:59:11
  • 수정 2024-03-10 09:3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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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기념관 경내 야외전시물 시.어록비(3)

[이승준 기자] 독립기념관 경내에는 야외 전시물인 애국 선열들의 시.어록비가 건립돼 있다. 여기에는 이순신 등 전통시대에 국난을 극복한 인물과 김구 등 일제 침략기에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선열들의 불굴의 민족혼과 자주 독립의지가 담긴 어록이 새겨져 있다. 짧은 글 속에 녹아있는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은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되새기게 한다.<편집자 주>/사진-이승준 기자


조완구(趙琬九 : 1881 ~ 1954)의 호는 우천(藕泉), 서울 출생으로 1902년 한성법학전수학교를 졸업하고 경술국치 이후 북간도로 망명해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대종교(大倧敎) 포교활동 및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참여해 임시의정원 의원.내무차장.노동총판.내무부장.재무부장 등 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또한 상해대한교민단과 협성회(協誠會).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중한항일대동맹(中韓抗日大同盟) 등의 단체에도 참여해 활동했고, 1930년 1월 임시정부의 지지정당을 결성된 한국독립당과 김구의 한국국민당(1935년)의 창당에도 참여했다. 민족주의진영의 연합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조직하는 데에도 적극 참여했고, 1940년 9월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식에도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대표해 참석하고 한국광복군의 항일정신을 강조했다. 광복 후 환국해 비상국민회 재정위원장.남북협상대표로 활동하면서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6.25전쟁 중 납북대 서거했다.

권준 (權晙, 1895 ~ 1959)은 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7년 광복회(光復會) 조직에 참여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북경(北京)에서 김원봉(金元鳳)과 같이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군자금 조달, 폭탄제조 등의 임무를 맡아 종로서, 총독부, 동척(東拓) 등의 폭탄 투척과 동경 이중교(二重橋) 투척 등을 적극 지원했다. 1926년에는 황포(黃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수료하고 북벌전(北伐戰)에 참전해 활약하기도 했다. 같은 해 한구(漢口)에서 개최된 한국, 중국, 인도, 몽고, 안남(安南), 대만인 등으로 조직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집행위원에 선출됐다. 1932년에는 남경(南京)에서 중국정부의 후원을 받아 한국인군사학교를 설립하고 그 교관으로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입당해 활약했다. 1934년에는 중국군 연장(連長)으로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항일전에 참전했다. 1944년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에 들어 와 내무부차장에 임명돼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조소앙(趙素昻 : 1887 ~ 1958)의 호는 소앙(素昻).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군) 출생으로 성균관 수료 후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유학했다.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졸업 후 귀국해 경신학교.양정의숙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동제사(同濟社).박달학원(博達學院) 등에 참여해 활동하는 한편 1915년 육성교(六聖敎)를 창안해 민족의 종교적 단결을 추진했고 '대동단결선언서'(1917년)와 '대한독립선언서'(1919년)를 기초해 한민족의 단결과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해 국무원 비서장.외무부장.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했고 한국독립당에도 참여해 활동했다. 임시정부의 사상적 분열과 지도이념의 혼돈을 극복키 위해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창안했고, 삼균주의에 입각해 1941년 광복 이후 민족국가 건설의 청사진으로 발표된 '대한민국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기초하는 등 임시정부의 대표적 이론가로서 활동했다. 광복 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했고 6.25전쟁 중 납북돼 순국했다. 

문일평(文一平 : 1888 ~ 1939)의 호는 호암(湖岩).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으로 1905년까지 의주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의주에서 서양문화와 러일전쟁을 목격하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재일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태극학회(太極學會)'에도 많은 글들을 기고했다. 1910년 귀국해 대성학교.경신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1912년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와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와 교유했다. 1914년 귀국 후 고향에 은거했고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피체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동학교.송도고보 등 여러 학교에서 역사교사로 재직하면서 신간회(新幹會) 중앙위원.조선물산장려회 이사 등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해 활동했다. 1933년 4월부터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편의 사론과 수필 등 한국사 관련 글을 발표했다, 특히 ‘조선심(朝鮮心)’과 ‘조선정신’을 강조해 민족주의 역사학의 확립에 기여했다. 1934년 5월 진단학회(震檀學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활동하던 중 1939년 4월 5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광제(金光濟 : 1866~1920)/서상돈(徐相敦 : 1850~1913)

김광제(金光濟 : 1866~1920) 호는 동양자(東洋子)이며,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평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광문사(廣文社)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등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國債一千三百萬 報償趣旨書)'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해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했다. 


그 요지는 대한민국 2천만 명이 담배를 끊어 담배값 20전씩을 3개월간 저축하면 1천3백만 환이 되므로 전국민이 3개월간 단연(斷煙)해 그 돈으로 이완용 내각이 일본으로부터 차관한 1천 3백만 환을 갚아서 경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김광제는 동지들과 함께 대구에서 국채지원금수습사무소(國債志願金收拾事務所)를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 호응을 얻은 결과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해 전국각지에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 단연회(斷煙會) 등의 조직이 결성되고 지원금이 답지했다. 국민들의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는 매우 자발적이고 열성적이어서 성인들은 자발적으로 담배끊기를 단행했고 여성들은 비녀와 반지를 내놓아 이에 호응했고, 머리털을 잘라 팔아서 이 운동에 호응하는 여학생들도 다수 나오게 됐다. 


국채보상운동에 크게 놀란 일제는 이 운동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대한매일신보사 안의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 총무 양기탁(梁起鐸)을 근거도 없이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가 무죄로 석방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유언비어가 퍼짐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퇴조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만주로 망명해 압록강 대안의 동로홍묘자(東路紅廟子)에 일신학교(日新學校:후에 興東學校로 개명)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해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했다. 


1919년 3 1운동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유학생들과 함께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국내 및 동경의 한국인에게 배포하고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고 했다. 1920년 7월 24일 경남 마산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서상돈(徐相敦 : 1850~1913) 경북 김천시 지좌동에서 태어났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했고,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을 주도했다. 


서상돈은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해,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정문제로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자, 그는 대구로 와 광문사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해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에서, 서상돈은 김광제(金光濟)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때 서상돈은 전체 인구 2,000만명이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으면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렇듯 금연운동에서 비롯한 국채보상운동의 움직임은 서울의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됐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돼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해나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종암(李鍾巖 : 1896 ~ 1930)은 대구 달성 하빈이씨 사직공파 가문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업학교를 거쳐 부산상업학교에 다녔다. 1916년 대구은행에 은행원으로 취직한 그는 출납계주임이 돼 금고 열쇠를 맡아 2년간 재직하다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거금을 인출해 만주로 망명했다. 1918년 4월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고,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키 위해 교관인 서상락(徐相洛) 등의 동의를 얻어 무관학교를 그만두었다. 이어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巴虎門) 밖에서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誠宇).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고 그와 김원봉은 중국 상해로 가서 불란서 조계(租界)에 사는 김성근(金聲根)에게 폭탄제조방법을 습득했다. 그리고 의열단원 곽재기(郭在驥).이성우(李誠宇) 등은 상해에서 폭탄과 권총을 구입해 이를 국내로 반입해 앞으로 있을 거사에 대비했다. 이종암이 대구은행에서 가져온 돈은 이러한 의열단의 활동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여졌고, 그 일부는 동지인 구영필(具榮泌)에게 전해져 만주 봉천(奉天)의 비밀결사인 삼광상회(三光商會)를 설치하는 자본금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1922년 3월 그는 김원봉.김익상(金益相).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필리핀에서 상해로 오는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처단키로 결정하고 다나카가 3월 28일 상해에 상륙할 때 처치하되 차질이 생기면 일본영사관에서 있을 예정인 연회식 때 거사키로 결정했다. 거사 당일 전중이 상해의 세관부두로 상륙하자, 세관부두에 김익상과 오성륜 동지가 배치됐고 그는 거사의 성공을 빌며 소식을 기다렸으나, 불행히도 다나카 처단의거는 실패하고 두 동지만 일경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1925년 9월 재정사정의 궁핍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그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을 계획을 세우고, 신채호(申采浩)가 의열단선언서인 '조선혁명선언서'를 지참하고 대구로 잠입했다. 그곳에서 이병호(李丙浩)의 안내로 이병태(李丙泰)를 만나 자신이 전에 부산금융조합에 예금한 돈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 이미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고, 그가 잠시 요양중이던 경북 달성군 달성면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서 1925년 11월 5일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루는 중 고문후유증으로 1930년 5월 29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중언(李中彦 : 1850 ~ 1910)의 호는 동은(東隱)이며, 경상북도 안동(安東)군 예안(禮安)면 하계(下溪)리에서 태어났다. 187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하고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역임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세상이 혼란해짐을 개탄하고 봉화(奉化)의 임당산(林唐山)기슭에 은거했다. 1895년 10월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안동에서 김도현(金道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방장(前防將)을 맡았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고 국권을 침탈하자 통분해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늑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해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해 단식을 결행해서 1910년 9월 자결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나철(羅喆 : 1863 ~ 1916)의 호는 홍암(弘巖).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으로 29세 때에 문과에 급제해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징세서장(徵稅署長) 등을 역임했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사직하고 비밀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을사늑약 이후 이완용(李完用)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키 위해 오기호(吳基鎬).김인식(金寅植) 등 동지들과 함께 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해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가 10년의 유형(流刑)을 받았다. 유배 4개월 만에 광무황제의 특사로 풀려 난 이후 단군의 정신으로 민족고유의 종교를 완성해 민족정기를 수호할 목적에서 단군교(檀君敎)를 '대종교(大倧敎)'로 개명하고 제1대 교주로 추대됐다. 경술국치 이후 중국 화룡현으로 총본사를 이전해 북만 일대에서 포교활동과 민족교육,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대종교 탄압이 심화되자 귀국해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의 폭정에 항거하기 위해 절식(絶食) 수도하던 중 1916년 8월(음) 순국했다.

유장렬(柳장烈 : 1878 ~ 1966)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천여명의 제자를 거느린 명유(名儒)로서 정미의병 당시인 1909년 전북 일대에서 박경석(朴景錫), 채복만(蔡福萬) 등 수많은 의병들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동했고, 경술국치 후 1912년 말 임병찬(林炳瓚)이 조직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한훈(韓焄).이기상(李起商) 등과 함께 참여해 일본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에게 국권반환요구와 철병요구서를 제출하였다. 1913년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한 훈.김상옥(金相玉).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경북 풍기(豊基)에서 일제 총독부 요인과 친일파 숙청을 목표로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했고 1915년 대구의 국권회복단(國權恢復團)과 협력해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해 동회의 전라도지역 조직 확대에 힘쓰는 한편 일본인 촌천횡일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금했다. 특히 1916년 5월 한훈.곽경열(郭京烈)과 함께 전남 보성군(寶城郡) 벌교리(筏橋里)의 서도현(徐道賢)과 박곡(朴谷)의 양재학(梁在學) 등 친일파 수명을 처단했고, 1917년 1월에는 일경의 수배 속에 서도현의 조카 서인선(徐仁善)을 납치해 군자금 14,000원을 마련했다. 또한 오성(烏城)의 일본 헌병분견소를 엄습해 장총 1정, 권총 1정 및 군도 1개를 탈취하고 계속해서 일경과 친일파 처단 및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후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돼 동지들이 피체되자 그는 피신했다. 또한 1919년 4월 이병하(李秉夏)·김제원(金濟元) 등과 함께 전북 고창의 부호 김기팔(金箕八)의 집을 엄습해 군자금 2,630원을 모금했고, 이어 전주의 부호 모씨가(某氏家)를 엄습해 군자금을 획득하려다가 일경의 급습을 받고 교전 끝에 피체되고 말았다. 이일로 인해 1919년 10월 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2년형을 언도받고 전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이전의 서도현(徐道賢) 처단 및 서인선으로부터 획득한 군자금 관계, 그외 독립운동 활약이 탄로돼 1922년 11월 징역 5년형이 추가 구형되는 등 전주·광주 등으로 옮겨다니면서 혹심한 고문과 악형을 당한 끝에 반신불수의 몸으로 15년 만에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윤희순(尹熙順 : 1860 ∼ 1935)은 1860년 서울에서 태어나 16세에 의암 유인석의 사촌 아우인 유홍석의 장남 유제원(柳濟遠)과 혼인했다. 한말 의병전쟁 때에는 '안사람의병가' '의병군가' '병정가' 등을 지어 항일 독립 정신을 고취했고, 군자금을 모으는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1911년 4월 만주로 망명해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의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1912년 환인현에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老學堂)을 설립.운영하면서 인재양성에도 노력했다. 장남인 유돈상이 일경에 체포돼 고문으로 순국하자 울분으로 식음을 전폐한 끝에 1935년 8월 봉천성(현 요령성) 해성현의 묘관둔에서 순국했다.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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