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법조인 출신 독립운동가 ‘홍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2-12 21:04:41

기사수정
  • [순국선열의날 특집] 임시정부 요인 18위와 배우자 애국지사(2)


[이승준 기자] 홍진(洪震, 1877~1946)은 대한제국의 검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조인 출신 독립운동가로, 그는 3.1운동 시기 한성정부의 수립을 주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다. 또 상하이로 망명한 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령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고, 민족유일당운동과 전선통일운동의 일익을 담당해 대일투쟁을 위한 민족역량의 결집에 공헌했다.


홍진의 본명은 홍면희(洪冕憙)로,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 홍산으로 1877년 8월 27일(음력) 아버지 홍재식(洪在植)과 어머니 청주 한씨의 삼형제 중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진은 27세 되던 1903년부터 법관양성소에서 약 1년 6개월간 수학한 뒤 법관양성소 박사와 한성재판소 및 평리원의 주사를 지냈고, 1906년 시험을 통해 검사가 된 그는 같은 해 12월 충북 충주에 소재한 충청북도재판소에 부임, 1년 6개월 만인 1908년 5월 사직했다. 


그의 사직은 법부로부터 받은 견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견책 사유는 죄수 석방에 착오가 많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그가 의병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직 후 그는 1909년 7월부터 평양에서 형사소송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1942년 대한민국 제34회 의정원의원 일동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홍진이고 5번째가 백범 김구다. /국가보훈처 제공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홍진은 운동을 좀 더 조직적으로 이끌기 위해 이규갑 등과 정부 수립에 착수했다. 3월 17일, 검사 한성오(韓聖五)의 집에서 기독교와 유교계 인물들과 만나 정부 이름을 한성정부로 확정했고, 같은 해 4월 2일에는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대표자대회를 개최해 한성정부의 수립을 결정했다. 


이때 한남수(韓南洙)로부터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이미 수립됐을지도 모르니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이에 홍진은 한성정부 수립을 정식으로 공포하기에 앞서 한남수를 상하이에 보내 알아보게 하는 한편, 자신도 4월 15일 이규갑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후 국내에서는 4월 23일 한성정부의 수립이 공포됐다.


상하이에 도착한 홍진은 상하이에 이미 임시정부가 수립돼 있었고, 4월 22일에 개최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논의가 귀결됐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밀정 누명을 뒤집어쓰고, 5월 6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조사까지 받게 됐다. 홍진이 자신의 망명생활을 준비키 위해 일제 경찰로 있던 황옥(黃鈺)을 미리 상하이에 파견한 것이 화근이었다.


국민대회 취지서와 홍진의 국무령 취임을 보도한 독립신문 1926년 9월 3일자. /한시준 저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홍진' 발췌이때 그는 자신이 주도했던 한성정부 덕분에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4월 15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측의 요청으로 임시정부가 통합됐다. 이때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중심으로 통합이 이뤄졌기 때문에 그의 위상도 회복될 수 있었다.


홍진은 1921년 5월 6일에 의정원 제3대 의장으로 선출돼 임시의정원 정비와 11월에 예정된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활동 지원에 몰두했다. 특히 태평양회의에서는 한국의 독립문제가 다뤄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그는 한국 측 대표를 회의에 참석시키기 위해 자금을 모집하고 미주 동포들을 동원하기도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는 임시정부의 활동방향을 놓고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고, 더 나아가 임시정부 폐지론까지 등장시키는 원인이 됐다. 이에 그는 1922년 7월 안창호.김구.조소앙 등 11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해 문제를 해결코자 했지만, 1923년 4월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까지 등장하자 임시정부의 혼란상에 극도의 염증을 느끼게 됐다. 결국 그는 1924년 4월 법무총장직을 사임하고 난징 근처 전장(鎭江)에서 약 2년간 은둔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인천시립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홍진의 묘비. /인천시 제공1926년 홍진이 다시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그 사이 임시정부에서는 대통령제의 폐해를 보완키 위해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조직된 국무회의를 통해 정부를 운영하는 국무령제를 도입, 이상룡에 이어 그가 국무령 후보로 지목됐고, 같은 해 7월 7일, 그는 임시의정원에서 국무령에 선출됐다.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은 비타협적 자주독립의 新運動 촉진, 모든 민족을 망라한 정당의 조직, 전세계 피압박민족과의 협동전선 조직 및 우방과의 제휴 등 삼대 정강을 발표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을 선포했다. 1926년 12월 9일, 그는 국무령을 사임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이후 그는 1927년 4월 11일 좌우익 세력이 연합해 결성한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에 24인의 집행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했고, 11월 9일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가 결성되자 5인의 상무집행위원 중 1인이 돼 활동을 개시했다.


임시의정원 100주년을 맞아 지난 4월 10일 국회에 건립된 홍진의 흉상. /국회 제공

관내촉성회연합회는 국내의 신간회를 주축으로 만주.노령.미주 등지에 촉성회를 설립해 민족유일당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사전작업으로 12월에 홍진 등을 만주로 파견했고, 그 결과 1928년 5월 12일 화전현(樺甸縣)에서 18개 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의가 개최했다.  


이 회의는 민족유일당운동의 향배를 결정할 중요한 회합이었으나 참가단체 간 주도권과 향후 만들어질 유일당의 성격, 통합방식 등을 놓고 이견이 발생해 실패했다. 이로 인해 참가단체는 정의부 중심의 '전민족유일당협의회'와 7개 좌익단체가 주축이 된 '전민족유일당촉성회'로 분열됐다. 


홍진은 1928년 12월에 '촉성회파' 인사들과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부의장에 선출됐지만, 다음 해인 1929년 4월 1일 '협의회파'가 국민부를 결성하면서 유일당 운동은 일단락됐다.


1943년 3월, 중국 충칭에서 열린 자유한인대회에서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유일당운동 실패 후, 만주에 남아있던 그는 1929년 봄 이청천.황학수.김좌진 등과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했다. 농장을 경영하면서 한인들의 기반을 닦아 독립군을 양성코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1930년 1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되면서 민족주의세력이 결집하게 되는 계기가 됐고, 그 결과 7월에 지린(吉林)에서 한국독립당이 결성됐고, 그는 한국독립당 위원장직에 추대됐다. 


그러나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홍진을 포함한 한국독립당 인사들은 1933년 11월 난징으로 이동해 그는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키 위해 한국혁명당과 합당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했다.


이 무렵 중국 관내에서는 전선통일운동이 한창이었다.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이 주도한 제2차 대표대회가 있었고, 그는 신한독립당 대표로 참석해 1935년 7월 5일 민족혁명당 창당을 이끌어냈다.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통해 항일투쟁에 기여코자 했던 홍진의 집념은 전쟁 속에서도 굳건했다. 그는 1939년 5월에 쓰촨성 치장(·江)에 당도했다. 이 무렵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사이에서 나온 통합 논의는 1940년 3월 24일 한국독립당의 탄생으로 귀결됐다. 그는 이때도 중앙집행위원으로서 힘을 보탰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홍진의 묘/국립서울현충원 치장에 당도한 임시정부는 조직 정비에 착수한 홍진은 1939년 10월에 의정원 충청도 의원과 의정원 의장에 선출됐고, 국무위원 겸 내무장에 선임됐다. 그는 여기에서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돼, 세 번째 맞는 의장으로서의 직무 수행을 하게 됐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다. 홍진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귀국했지만, 그들이 활동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1946년 1월 20일, 임시정부 진영을 중심으로 비상정치회의주비회가 개최됐다. 각계 혁명당파, 종교집단, 지방대표 등을 소집해 국민대표대회를 열고, 이를 기반으로 정식 독립정부를 구성했다. 이를 계기로 1946년 2월 1일 각계인사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국민회의가 발족돼 홍진이 의장이 선출됐지만, 그는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결국 그는 1946년 9월 9일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10년 5월 24일에는 국회도서관 정보 검색홀에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기념 전시실'을 조성해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성공의 길을 찾아서더보기
 황준호의 융합건축더보기
 칼럼더보기
 건강칼럼더보기
 독자기고더보기
 기획연재더보기
 인터뷰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