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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의 공연산책 195] 극단 대학로극장, 이우천 작/연출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 박정기 자문위원
  • 등록 2021-12-12 21:19:10
  • 수정 2023-02-15 08: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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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어터 쿰에서 극단 대학로극장의 이우천 작 연출의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를 관람했다.


이우천은 현 대학로극장 대표이자 작가인 연출가로 대진대 연극영화학과 대학원 출신이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2010년 제22회 거창국제연극제 연출상과 희곡상을, ‘색다른 이야기 읽기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로 2014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출상, 2016년 ‘장판’으로 대학로극장이 서울연극제 희곡상 연기상을 수상했다.


‘청산리에서 광화문까지’ ‘궤짝’ ‘장판’ ‘할배동화’ ‘하멜린’ ‘권력유감’ ‘팬티 입은 소년’ ‘유형지에서’ ‘평상’ ‘결혼기념일’ ‘전통연희극 배뱅이 굿’ ‘창작하다 죽어버려라’ ‘우박’ ‘오뎅팔이 청년’ ‘수녀와 경호원’ ‘두 남자의 그림자’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모텔 판문점’ ‘어쩌나 어쩌다 어쩌나’ ‘고시원 연쇄 화재사건’ ‘중첩’ ‘청찬리에서 광화문까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부장들’ ‘귀하신 손님’ ‘기쁜 우리 젊은날’ ‘노인과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등 다수의 작품을 쓰거나 연출했다.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는 파락호라 불리던 독립운동가 김용환 선생의 일대기다.



'파락호(破落戶)'.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가문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뜻하는 말로, 다른 말로는 '팔난봉'이라고도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안동에서 노름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용환은 조선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파락호였다. 노름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도박하느라 아내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땅 700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고, 아내 손을 잡으며 "이제 달라지겠다."고 굳게 약속했지만, 다음날 집에 있는 땅문서를 들고 투전판으로 달려간 인물이었다.


김용환은 경상북도 안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던 의성 김씨 종가의 장손이자, 조선시대 학자이자 지휘관이었던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었다. 학봉 집안은 대쪽 같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선비 집안이었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였던 학봉은 임진왜란 때 관군을 이끌며 의병을 지원하다가 진주성에서 순국했다.


그렇게 지켜온 가문의 명예가 김용환으로 인해 한순간에 추락했다. 오래도록 쌓아온 집안 재산도 모두 날아갔고 수백 년 동안 대대로 물려내려 오던 전답 18만 평도 노름빚으로 인해 모두 팔렸다.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나중에는 사당 신주까지 팔아치우려는 것을 문중 사람들이 뜯어말렸다. 문중 자손들은 십시일반 돈을 걷어 김용환이 팔아먹은전답을 다시 종가에 사주곤 했다.


집안 재산을 거덜 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친정집에 가서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딸에게 준 돈마저 가져갔다. 딸은 신행 날을 받았지만 아버지 소식을 알 수 없어,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울면서 시댁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헌 장롱이 귀신 들린 장롱이라고 해서 강변 모래밭으로 가져가 부수고 불태우기까지 했다.



동네 사람들은 김용환에 대해 수군거리고 비난했고, '도박에 빠지면 김용환 처럼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김용환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월이 흘러 집안을 망신시킨 난봉꾼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가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으로 보내졌고,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노름꾼으로 철저하게 위장한 독립운동가였다.


김용환이 자신의 정체를 숨겨가며 독립운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릴 적 그는 할아버지 김흥락이 일본 헌병 앞에서 무릎 꿇림을 당하는 등의 치욕적인 현장을 보게 됐다. 헌병은 사촌인 의병대장 김회락을 숨겨줬다면서 할아버지를 사정없이 다그쳤다. 어린 김용환은 그 장면을 보고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핵심 지도자로서 안동 지방의 의병을 이끌었던 서산 김흥락의 손자답게 문경 등지에서 활약한 이강년, 김상태가 이끄는 의병 부대에 참가했다.



30대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라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단체인 의용단의 서기로 활약했다. 의용단은 만주 길림의 군사조직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에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위해 영남 지방 인사들이 결성한 조직체였다. 의용단은 주로 경상도 지역인 안동, 영천, 군위, 창녕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해왔는데, 대다수의 부호들은 친일파였기 때문에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김용환은 1922년 12월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의용단원 36명과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된다.


이후 그가 살아갈 방법은 철저한 위장밖에 없었다. 대를 이어 내려오던 막대한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한 것으로 위장한 뒤, 모인 돈을 모두 만주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요즘으로 치면 100억 원이 넘는 액수였다. 이런 활동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군 군자금을 대려고 철저히 노름꾼 노릇을 했던 김용환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평생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임종 무렵에 사실을 이야기하자던 독립군 동지에게 그는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할 필요 없다"며 끝내 입을 다문 채 세상을 떠났다.


반세기가 흐른 뒤 1995년 김용환에게는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던 외동딸 김후웅 여사는 아버지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던 날,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리'라는 편지를 남겼다. 


김용환 선생의 후손으로는 김영삼 대통령 당시 문화부 차관을 역임한 김도현 선생이 있다. 11일 오랜만에 공연을 함께 관람하며 반가워했다.



무대는 배경 앞에 높은 단으로 통로를 만들어 출연진의 등퇴장로가 된다. 단 앞에 격자무늬의 창이 달린 방을 한 단 높이로 만들어 가정의 방으로 사용되고, 요정의 1실과 투전꾼의 노름방으로 사용된다. 방 앞은 마당과 대로로 사용된다.


연극은 김용환 선생 따님의 수명이 다한 노년의 모습에서 시작하고,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이 한 장면 한 장면 경쾌하게 펼쳐진다. 투전꾼 노릇을 하는 모습, 선생의 부인의 모습, 친지들이 등장하고 딸의 젊은 시절, 어린시절이 펼쳐진다. 투전판을 벌리고, 마지막 판에 딴 사람이 돈을 모두 가져가려고 할 때 괴한들이 나타나 몽둥이로 투전꾼을 때려눕히고 돈을 빼앗아 도망해버리는 장면이 연출된다. 거듭되는 돈 잃는 장면에서 가산을 탕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름꾼, 파락호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선친의 독립운동 사실이 밝혀지면서 일경의 감시가 늘 상 계속되지만, 고급요정에서 술판을 벌이는 일본 고위경찰 방에 취한 모습으로 등장해 추태를 벌이는 일도 연출되면서, 일인들도 선생을 천시하고 등한시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최후에는 집문서까지 가져다 독립운동을 위해 보내게 되고, 독립운동과 연관된 현장이 발각되면서 일경에 의해 사살된다.해방 후 선생이 만주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 재산을 보낸 것이 알려지면서 따님은 아버지에 대해 품었던 언짢은 감정을 깨끗이 씻고 운명한다. 마지막 장면은 선생과 따님이 등장해 포옹을 하는 장면에서 마무리를 맺는다.


김용선이 따님 후웅, 현승철이 김용환 선생, 손성호가 중길, 황무영이 아들, 오보혜가 며느리, 전상진이 하시모토, 김장동이 노석출, 최소영이 부인, 안진기가 꾼 마에다, 김태원이 꾼 다나카, 이 준이 꾼 스즈키, 오혜진이 요화, 전상건이 김 구, 박지연이 젊은 후웅, 황교성이 일경, 박소현이 어린 용환으로 출연한다. 출연진의 열연과 성격창출은 물론 연극에 열정을 다하는 모습에서 관객은 완전히 연극에 몰립하게 되고 우레와 같은 갈채를 보낸다.


조명 이상근, 무대 송은석 전민영 이 황, 음악 김 다, 분장 이지연, 소품 문연지, 기획 오혜진 박지연, 조연출 엄희준 등 스텝진의 기량이 하나가 되어, 극단 대학로극장의 이우천 작 연출의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를 전국순회공연이 바람직한 우수걸작공연으로 창출시켰다


* 주요경력


황해도 금천생, 서울고 서울대미대, 서울대학교 총동문회 이사, 극작가/연출가/평론가, 한국희곡뮤지컬창작워크숍 대표,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위원, 전 서초연극협회 회장,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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