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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성공취업 메소돌로지’ 출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3-21 00:5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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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지금으로부터 10년이 조금 지난 시절, 나는 대학교수가 됐다. 서울에 있는 한 대학의 교양학부 교수가 된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이즈음, 아직도 기분은 새롭다. 


너무 오랜 시간을 준비해서 그런지, 아니면 될 수 없다는 불안감이 너무 컸던 때문인지...아직도 기분은 설렌다. 그러나 막상 생활은 그 전과 비슷하다. 어찌 보면 더 단조롭다고 해야 할까. 거의 매일 있었던 회의도 부쩍 줄었고, 각종 회식이나 저녁 모임도 많이 줄었는데… 실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매일 매일 평범하고 소박하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하고 있는 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학생들과의 특별한 만남(?)’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 만남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 시대를 사는 한 명의 배고픈 인문학도로서 그리 녹록지 않았던 2~30대를 경험한 나(저자)로서는 ‘학생들과의 만남’은 특별했다. 그 전에 한 지방 국립대학의 전업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결혼하고 취업을 해야만 했다. 대학 시절 친구의 추천으로 서울 동숭동 소재 사회단체의 한 연구원이 됐다. 


말이 연구원이지 거의 모든 일을 해야 하는 사무국 간사라는 직책이 내 첫 번째 일자리였다. 주로 하는 일은 행사 기획, 보도자료 배포, 연설문․초청장․기고문 작성 등, 글을 최대한 ‘빨리’(?) 쓰는 일이었다.


한 2년 정도를 지나면서 그 일이 익숙해질 즈음, 이러다 정말 공부를 접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올 즈음, 그저 바쁜 핑계대고 책 한 줄 제대로 읽지 않을 그 즈음, 명절에 즈음해 고향에 내려가게 됐다. 캠퍼스가 아름다웠던 지방의 모교에 가서 아직도 대학원생인 대학 동기 친구를 만났다. 


갑자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 들었다. 그러나 나는 결혼한 가장이지 않는가? 생활인이지 않는가? 그런데 정말로 다시 공부하고 싶었다. 혼돈이었다.


그 심란한 마음을 친구한테 솔직히 말했다. “정말 공부하고 싶은데…,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 그러자 그 친구는 대학 1학년 때 『교양국어』 과목을 담당했던 내가 잘 아는 교수님이 학생처장이 되었으니 사정을 한 번 말해 보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대학교에 직원으로 취직 되면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공부했던 먼지 쌓인 보따리를 풀었다. 다시 주섬주섬 학업계획서를 작성해서 그 교수님을 찾아 갔다. 뜻밖의 방문인데도 무척 반가워하셨다. 사정 얘기를 간곡히, 간곡히 드렸다.


갑자기 부탁해서 그런지, 정규직은 어려우니 일단 임시직이라도 해보려면 한 번 해 보라는 것이었다. 임신 중인 아내를 생각하니 겁이 났다. 며칠 심사숙고했다. 그저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늙어갈 수는 있겠지만 지금 공부를 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아내를 설득했다. 정말로 막막하고 막막했지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미련 없이 고향 대전으로 내려왔다. 처음 배치 받은 곳이 모교 대학본부 학생과였다. 그곳은 또 다른 별천지였다.


소위 ‘386 끄트머리 세대’, 6.29선언 이후 ‘88 꿈나무 세대’인 나로서는 솔직히 대학생활을 심각하게 보내기 보다는 재미있게 보낸 축이었다. 그런데 당시 학생과라는 곳은 예전 학생운동의 실체가 분명히 존재하는 그런 곳이었다. 


큰 사회적 이슈는 없었지만 학내문제, 노동문제, 아니면 만성적 습관성 소요(?)로 항상 시끄러웠다. 


특히 그 행태는 그전 시대와 거의 비슷했다. 이유 없이 소리 지르고, 목적 불명의 단체 만들고, 학교 밖으로 진출해 거칠게 데모하고…, 새 천년, 2000년이 오기 전 그해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무척 뜨거웠다. 특히 당시 모교는 총장님의 개인 신상 문제로 더 시끄러웠다.


내가 하는 일은 그들과 만나는 일이었다. 어떤 날은 밤을 새워가면서, 어떤 날은 분노를 삭혀가며, 어떤 날은 같이 울고 웃으면서 하루하루 보냈다. 매일 매일 소모적인 시간 때문에 처음에는 이유없이 화가 많이 났지만, 시간이지나면서 한편으로 그들을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됐다. 그때 만났던 후배들이 지금도 가끔 연락이 오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그 와중에 다행히 서울로 박사과정에 진학을 할 수 있었다. 


6일을 일하면서 그 중 하루를 박사 수업 간다고 빠지니 동료들한테 미안함이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처음 마음먹은 것이 공부이니 꼭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거의 결석 없이 박사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박사과정 2년차가 되고 학생처장이 바뀌면서 강의 수강이 어렵다는 통고를 받았다. 또 어려움이 닥친 것이다. 공부만 하고 싶다는 생각에 당장 그만두고도 싶었지만 당시 나는 갓난아기의 아버지였다.


게다가 나에게는 두 가지 고민이, 아니 아주 깊은 고통이 있었다. 하나는 박사과정 수업준비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급박한 학생과 업무 특성 상 그나마 준비를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보통 새벽 2시에 기상해 고달픈 생활이 계속되다보니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한참 생각하다 내 나름대로 묘안을 만들어 학생처장님과 과장님을 찾아뵈었다. 


그것은 근무 부서를 바꿔 보는 것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거쳐 온 경력 상, 글을 최대한 빨리 쓰는 실용 글쓰기, 즉 각종 기획문서 작성이 대체로 수월하고 빠른 나로서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대학은 2000년도를 전후해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특히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많은 변화를 이끌었던 대학생들은 그 변화가 더 심했다. 학생운동 이슈가 줄면서 도대체 에너지는 충만한데 쓸 곳이 없는 문제투성이의 젊음처럼 이유 없이 뜨거웠다. 


실례로 5월 대학 축제가 한 번 지나가면 학내에 있는 거리의 가로등이 다 깨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대학가 주변 동네는 정말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는 대학생들의 생활 지도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학생들을 위한 각종 사회활동, 봉사활동, 해외활동 등이 거의 처음, 대학 주도로 만들어 지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그 사업의 시작이라는 것이 열악한 학교재정으로는 추진이 어려워, 당시 교육부나 외부의 기관단체에서 재원을 끌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소위 그 사업을 위한 기획서나 제안서 작성이 내 업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때는 1990년대 말, 소위 IMF 환란위기 이후로 취업이 잘되지 않는 시기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부서가 ‘취업정보센터’였다. 학생과처럼 심란하지는 않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도 한몫했다.


당시 대학 취업부서는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원래 ‘취업보도센터’라 해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이나 고시 준비생을 위해 수동적인 단순 정보를 제공하는 작은 부서였다. 그런데 학생들은 많아지고 취업이 잘되지를 않다 보니 일종의 진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특히 2000년을 전후해 처음으로 진행됐던 국립대학 구조조정이나 학내 총장선거의 열기로 인해 일종의 ‘수요자 중심의 학생 서비스’가 시작되고 있는 새로운 개념의 부서였다. 


따라서 기존 ‘학생생활연구소’ 중심으로 실시된 학생들에 대한 각종심리 상담과 교육기능이 합쳐져 취업지원과 경력개발의 업무역량이 만들어 지던 시점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거의 10년을 정말 열심히 일하고 일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전국적(?)으로 이름도 얻을 수 있는 계기도 만들어졌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학생 서비스 관련 사업 기획서나 제안서를 쓰고 또 썼다. 그 와중에 주기적으로 있었던 총장선거와 학장선거의 공약들까지 정말로 쓰고 또 썼다. 


지방도시라 그런지 친구의 형님, 선배, 집안 아저씨 등의 연을 대며 도와 달라고 할 때, 거절할 수 없어서도 그랬지만, 그것이 인연이 되어 혹시 대학교수로 갈 수도 있다는 속된 희망이 나를 대학과 대학생에 대해 더욱 연구하고 쓰고, 또 쓰게 만들었다.


박사과정을 마칠 무렵이 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이 분야에 대한 흥미가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교육학 전공자도 아니면서 대학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고, 자화자찬 같지만 또 대학과 대학생들의 모든 것에 대해 정말로 많이 알았다. 


그 결과 외부에서 각종 대학생 관련 사업을 수주한 것이 상당했고, 교육부 장관상 등 대내외적으로 상도 많이 받았다. 그 즈음 나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내가 뭐하는 사람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혼돈이었다.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고, 아울러 박사과정을 마치면서 취업지원팀장이 되고 더욱 그랬다. 하루종일 바쁜 생활의 연속인데도 나는 내 꿈과 미래의 삶에 대한 갈증이 너무 심했다. 내가 생산한 수많은 문서와 생각에 대한 본격적인 회의가 들기도 했다. 


소위 인간에 대한 관심을 연구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았던 역사학도이자 인문학도인 내가 도대체 왜 공무원들 수발을 들고 있는가라는 자문자답으로 며칠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소위 ‘밥벌이에 대한 지겨움’도 심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발표하면서, 주변 도시의 교육대학과 야간대학의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마치 현실과 이상처럼 내 마음의 격동은 더욱 심해졌다. 이제 배가 불러져서인지 이런 고민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특별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교 선배 교수님의 친구 분 딸이 취업상담을 신청해 온 것이다. 권OO!, 서울에서 유명대학을 졸업한 그 친구는 자신감이 충만하고 맑고도 밝았지만, 어찌 보면 어두웠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취업스펙으로 보면 충만할 데로 충만한 열정적인 여대생이었지만 계속되는 실패로, 또 실패의 연속으로, 원인도 모르겠고…, 절망하고… 결국에는 졸업 후 나를 만나기 직전에 자살까지 시도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지금도 취업이 잘되질 않아 자살까지 시도하는 학생들을 1년 한 두 명 정도, 아니 더 많이 만나기도 한다.)


두 번째 상담이 있던 날, 그녀는 그냥 울었다. 하염없이 울었다. 상담실에서 내가 민망할 정도로 울었다. 지금도 상담을 하다가 (남녀 불문하고…) 가끔 그런 친구들이 있지만 그때의 충격은 조금 심했던 것 같다. 거기다 자신의 가정사 문제까지…, 내가 뭐해 줄 것도 없으면서 미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저 늘 하던대로 몇 마디 묻고 입사서류를 내 방식대로 고쳐주고 있었다. 그후 그 학생은 점차 미소 지었고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기획서 쓰는 일 말고도 물리적으로 가장 많은 시간이 투자되는 한 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학생들과의 만남, 학생상담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 학생들에게 취업상담을 해 주는 것이 내 주요업무 중의 하나였다. 입사서류 고쳐주고 면접 대응 방법을 그때그때 알려주는 그런 일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취업지원 부서 일에서 상담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내가 인문학도라 그런지 자기소개서 수정과 교정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일일이 상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바쁜 취업시즌에는 잠꼬대로 자기소개서 작성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날 일은 특별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이 상담 일은 아주 싫어하는 일 중 하나였다가 본격적으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일에 찌들고 항상 못 가본 길에 대해서 동경만 하며 살았던 내가 본격적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에게 간절한 도움을 청하는 그 학생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도움을 더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하튼 나는 전심전력해서 그녀를 상담하였고, 결국 그 친구는 3달 정도 지나 우리나 라 유수의 은행에 취업이 됐다. 


그날 이후로 나는 본격적으로 학생 만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단 많이 만났다.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오후는 학생상담에 집중했다. 그리고 진로상담학이나 진로교육학 관련 책자를 부지런히 찾아보고 또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 취업상담이 내 연구영역과 아주 잘 맞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원래 전공이 한국사(韓國史)이다. 즉 우리나라 역사학이라는 말이다. 특히 한국중세사, 신라 말에서 고려 말까지 역사, 주로 정치사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특별히 인간들의 전기(傳記), 즉 사람에 대한 기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석사학위도 신라 말의 유명한 스님 비문(碑文)을 중심으로 구성하였고, 박사학위는 고려사 열전(烈傳)을 중심 자료로 사용 하였다. 그러다보니 비록 옛날 사람이지만 인간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나름대로 보는 눈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나에게 찾아올 때 비슷한 관심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직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흥미, 적성, 가치관을 전제로 지나온 과거의 사건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자기소개서’가 바로 그것이었다.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를 바탕으로 나의 역사 연구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또 그것을 면접에서 재현하는가가 연구의 초점이 된 것이다. 


그리고 금석문, 전기, 열전 등 전통시대 사서(史書)에서 보이는 개인에 대한 역사 서술 방법이 지금 현대 자기소개서 작성이나 면접 전형에 있어서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역사인식론인 서사학, 수사학, 논리학, 인지학을 바탕으로, 내 나름대로의 ‘CGS 자기소개서 작성 방법론’이라는 이론을 만들게 됐다.


사실 앞서 만났던 권OO 학생도 이 방법을 통하여 합격할 수 있었다. 성적 3.9, 토익점수 거의 900점대, 동아리 회장 역임, 1년 간 미국 어학연수 등, 소위 빠질게 없었던 그녀는 서류전형에서 자그마치 49번이나 떨어지고 분노하는 마음에 자살까지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만나고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서류는 언제나 합격했고, 4번 정도 최종면접에 가, 결국 국내 유수의 은행에 합격한 것이었다. 나를 만나고 권OO 학생이 변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그것은 내가 권OO 학생 전까지 만났던 선배학생들에게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학생과의 상담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언급하고 있었던 예전에 상담했던 학생들의 사례에 그 비밀이있었던 것이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고 했던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를 들으면 고치기 마련이다. 


권OO 학생은 자신과 선배들의 문제점을 발견하면서 수정하고 수정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선배 학생들의 잘못되거나 잘된 정보를 충실히 전달해 주고 또 지적해 줬다.


둘째, 내가 역사공부를 하면서 배웠던 나름의 자기 역사 표현법을 심화된 방법론으로 구체화하였다는 점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했던가? 역사학은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그런지 취업지도에서도 역시 위력을 발휘했다. 


정해진 시간 내에, 정해진 지면에 자신의 최대치를 표현하는 취업 프로세스에 있어서 특정한 사건에 관심을 갖는 역사학적인 식견이나 방법은 역시 주효했다. 그런 점에서 후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CGS 사건위주 자기소개서’는 지금 현재 우리나라 취업코칭 또는 진로 ․ 진학코칭, 또는 창업코칭에 있어서 가장 최선 최고의 방법임에 분명했다.


셋째, 상담이라는 행위가, 상담자인 내 상황이 내담자인 학생의 상황과 적절하게 상호작용하면서 학생도 변화하고 나도 변화하는 분기점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나의 취업상담은 상대방의 잠재능력을 찾아내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CGS 코칭’으로 발전하였다. 


한마디로 ‘CGS 코칭’을 통해 학생들과 동반성장(同伴成長)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상호작용의 힘은 지대했다. 사실 나도 교수직을 염원하는 미취업자였고 학생도 직장인을 희망하는 미취업자 아니었던가? 나와 학생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가로 질러 한국 대학사회에 있어서 우리들의 문제를 넘을 수 있는 분명한 계기가 됐다. 


내가 시도 했던 실험적인 행동이 학생들과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략 10년 간 학생들과의 꾸준한 만남, 계속적인 만남은 내 삶과 가치관, 구체적으로 이후 인생의 선택에도 많은 변화를 줬다.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만나고, 또 만나면서 체득된 ‘노하우(Know-how)’가 삶을 꿰뚫는 진리와 같은 ‘노와이(Know-why)’로 전환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막연하고도 무모한 동경심이 교육현장에서 학생의 성공으로 구체화 되면서 나를 돌아보게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필요한 존재의 이유가 보다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전공논문에서 언급된 전공시대 역사에서의 거룩한 인간이나 내가 상담실에서 만났던 기특한 학생들이나 따질 것 없이 모두 너무도 소중한 인간이었고, 나는 그들의 미래를 위해 연구하고 고민해야만 했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점점 행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이곳 광운대학교에 오게 된 것도 모두 여기에서 기인한다.


전공인 역사와 관련한 교수가 되기 위해 4번에 걸친 교수 공채에서 고배를 마셨다. 한국 사회에서 지방대학 출신의 마이너가 갖는 고통이기 전에 우리 사회에서 한 인문학도가 갖는 어려움을 절감하는 시기였다. 


1년에 한 두 자리 나는 한국중세사 전공 교수라는데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자각이 절망감으로 엄습하는 추운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광운대학교에서 학생들의 진로와 취업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양학부 교수를 채용한다는 말을 듣고 지원하였다. 그 지원 과정 중에 그 동안 상담했던 학생들의 미시적 역사와 나의 거시적인 삶을 접목시키게 된 것이다.


사실 공개강의와 면접과정에서 내 자신은 너무도 당당했고, 자신이 있었다. 설령 떨어진다 해도 후회는 없었다. 그러자 확신이 생겼다. 아울러 나한테 상담을 받으면서 미래를 열었던 학생들이 그것을 증거 해 준다고 생각하니 더 든든하고 희망이 생겼다. 


‘노와이(Know-why)’란 이런 것이리라. 그 거듭 거듭, 계속적으로, 계속적으로, 꾸준하게, 꾸준하게 축적된 ‘노하우(Know-how)’는 어떠한 정교한 이론보다도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방법론을 수많은 사례와 더불어 풀어 보고자 한다. 


단순한 취업전략서나 진로서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전략이고, 인생의 방책, 어찌 보면 이 험난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자기방어책이 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이렇게 그동안 대학교육 현장에서 이루어 졌던 수많은 고민과 경험들을 조금이나마 제시해 보고 싶었다. 그러자니 먼저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들께 당연히 감사를 드린다. 사실 이 기록은 분명 그들의 이야기이다. 


특히 진로, 진학, 취업, 창업의 생애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보여줬던 이야기들은 단순히 그들을 넘어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어 진다. 이 작은 이야기들을 꼼꼼히 살펴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존재론적 자신감이 발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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