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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혼이 살아 숨쉬는 곳 '제주목 관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3-27 15:44:51
  • 수정 2023-09-03 03: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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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장축', 제주도를 나타낸 가장 오래된 지도/탐라순력도는 1701-1704(숙종)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형상이 제주도의 각 고을을 순력한 장면을 화공 김남길을 시켜 제작한 기록 화첩으로, 탐라순력도에는 당시 제조도에는 세 고을인 제주목, 정의현, 대정원으로 나눠져 있다. 18세기 초 제주도의 관아와 성읍, 군사시설과 지형 및 인구, 풍물에 관한 갖가지 정보가 담겨 있다. [이승준 기자] 제주목 관아(濟州牧官衙)는 제주의 역사가 응축된 현장으로 조선시대 제주목 통치의 중심지이다. 관덕정(觀德亭)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고 이미 탐라국시대부터 성주청(星主廳) 등 주요관아가 설치돼 있었다. 


고득종의 '홍화각기(弘化閣記)'에 의하면 당시 제주목 관아 시설은 총 58동 206칸 규모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434년(세종 16) 화재로 소실됐으나 바로 재건에 들어가 1435년에 206칸의 관아 건물이 세워졌고 조선시대 내내 증.개축이 이뤄졌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모든 관라 시설이 훼철됐고, 제주도청과 제주경찰서, 제주지방법원,제주지방검찰청 등 서양식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되면서 관덕정 외에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주목관아 전경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이뤄진 1-3차 발굴조사에서 제주목 관아의 중심 시설인 동헌지와 내아 건물을 비롯해 중심도로 등이 밝혀졌다. 


이어 1998년 4차 발굴조사에서는 외대문과 중대문지, 홍화각, 애매헌, 호고, 호적고, 우련당, 향리방, 영리장방, 성내연못, 우물 유구와 담장지 등 18세기 관아 건물의 배치 전모가 확인됐다. 이 같은 과정에서 조사된 초석.기단석 등과 함께 '탐라순력도(眈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摠覽)' 등의 고문헌을 토대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제주목 관아는 정치와 행정, 문화를 아우르는 복합공간으로서 기능은 물론 경노, 입신양명의 실현 등 민관의 소통이 이뤄지는 열린 광장으로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 관덕정(觀德亭)/보물 제322호



관덕정은 1448년(세종 30) 안무사(安撫使) 신숙청(辛淑晴)이 창건한 후 1480년(성종 11)에 목사 양찬에 의해서 중수됐다. 


이 때 쓴 서거정(徐居正)의 중수기에 의하면 관덕정은 "이 정(亭)을 만든 것은 놀이나 관광이 아니라 본래 설치함이 무열(武閱)을 위한 것인 즉, 지금부터 제주의 사람은 날마다 이에 사습(射習)하되 과녁을 쏠 뿐만 아니라 기사(騎射)를 익힐 것이요, 기사 뿐만 아니라 전진법(戰陣法)을 익힘으로써 적변(賊變)이 있을 때는 삼읍 백성들이 상산지세(常山之勢)로 수군, 육군, 보병, 기병이 각각 나와서 사력을 다하여 싸워 적군의 목을 베어 이로써 부모처자를 구하고,이로써 한 고을을 보전하며, 이로써 나라의 간성이 되어 역사에 공명(功名)을 세운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그 세운 바를 펼쳐 보였다. 


관덕정(觀德亭), 관덕정기에 의하면 안평대군의 글씨로 적혀 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안무어사 김상헌의 일기인 남사록에는 안평대군의 편액은 불에 없어지고 지금 걸고 있는 것은 아계(李山海)의 글씨이다 하였다.서예가들의 견해도 역시 안평대군의 필적이 아니라 이산해의 필적이 틀림 없다고 말한다.그 후 1599년(명종 14), 1690년(숙종 16),1753년(영종 29), 1779년(정조 2),1833년(순조 33), 1851(철종 2), 1882년(고종 19) 방어사 박선양에 의해 보수되는 등 총 7차에 걸쳐 중수했고, 이후 1924년 일본인 島司 前田善次가 보수하면서 15척이나 되는 곡선의 처마를 2척이나 줄여 보수해 전통적인 멋은 사라졌고, 1969년에 10번째 중수시 대대적으로 해체해 새로 보수하고 주위에 문을 달아 흰페인트칠을 해 관덕정의 위용은 사라져 버렸다.


탐라형승(耽羅形勝), 중앙 천정 서쪽에 동쪽을 향하여 걸려있는 편액인데 이는 1778년 12월부터 1781년 3월까지 재임한 방어사 김영수(金永綏)의 글씨이다.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1882년(고종 19) 방어사 박선양(朴善楊)이 중수하면서 쓴 글씨이다.

해방후 1948년 9월에 관덕정은 제주도의 임시도청으로, 1952년도에는 도의회 의사당으로, 북제주군청의 임시청사로, 그리고 1956년에는 미공보원 상설 문화원으로 사용되는 등 참으로 순탄치 못한 역정을 견디어 오다가 1959년 국보 제478호로 지정됐다가 1963년 보물 제322호로 재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덕정 내부에는 관덕정과 탐라형승, 호남제일정의 현판이 걸려 있다. 실내 벽면에 그려져 있는 벽화는 작자 미상이나, 상당히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내용은 두보(杜甫)의 취과양주귤만교(醉過楊州橘滿轎).상산사호(商山四皓).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대수렵도(大狩獵圖).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홍문연(鴻門宴).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다.


# 기간지주(旗竿支柱)



제주목 방어사(濟州牧防禦使)'의 황수기(黃帥旗)를 게양(揭揚)하는 깃대의 받침 기둥이다. 


# 외대문(外大門)


외대문전경 

외대문은 문헌에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 '진해루(鎭海樓)'로 표기돼어 있다. 관아의 관문으로 1435년 홍화각 창건시에 건립했다고 전하며, 1699년 남지훈 목사가 개건했다고 한다. 2층누각 건물로 종루로도 활용됐다. 여기서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서 성문을 여닫는다고 한다.

 

외대문 진해루. 뒤에 외대문 탐라포정사 현판이 있다. 

그 종은 묘련사의 옛 터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1703년), '탐라방영 총람'(1760년대)에 목관아 정문으로 뚜렷하게 표시돼 있다. '남환박물'에 의하면 총 18칸으로 나오며, 관아가 존속했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대문이다.


# 제주목 역사관(濟州牧歷史館)



회랑(回廊)에는 제주목 역사체험 전시공간으로 꾸며졌다. 3개의 전시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제1전시실에는 제주목의 역사적 변천사와 발굴 및 출토유물, 제2전시실에는 부임목사의 생활상 및 행렬도, 제3전시실에는 제주읍성내 주요건물 및 변천사 등 당시 제주목의 생활상과 역사를 이해하고 조망할 수 있는 역사관으로 구성됐다. 


# 연못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李壽童) 목5사가 성(城) 안에 우물이 업스으면 적이 침입해 성을 포위하거나 화대가 발생했을 때 구급(救急)하기 어렵다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못을 만들었다. 


# 우련당(友蓮堂)


측면에서 본 우련당 전경 

우련당은 1526년(中宗 21)에 이수동(李壽童) 목사가 성(城) 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敵)이 침입해 성(城)을 포위(包圍) 하거나 화재(火災)가 발생했을 때 구급(救急)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위에 세웠던 정자(亭子)이고,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우련당 편액그 뒤 양대수(楊大樹) 목사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平地)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양대수(楊大樹) 개구리 미워하듯 한다."는 속담이 유래됐다. 1694년(肅宗 20) 9월에는 이익태(李益泰) 목사가 중건 (重建)했였다. 


영조(英祖) 때에는 김정 목사가 다시 정자 (亭子)를 중수(重修)하고 못 가운데 석대(石臺)를 쌓아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享儀室)이라 개명(改名)해 공물(貢物)을 봉진(封進)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목사기 주재하는 연회모습즉, '향의실기(享儀室記)'에 의하면, {서경(書經)} 낙고편 (洛誥篇)에 "공물(貢物)을 바치는 데는 의식(儀式)이 많은데, 의식(儀式)에 바치는 물건의 정성(精誠)에 미치지 못하면 공물을 잘 바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임금님께 바치는 것을 향(享)이라 하고 예(禮)를 갖추는 것을 의(儀)라 하니, 이에 그 집의 편액(扁額)을 고쳐서 향의(享儀)라 한다고 했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88.98㎡(26.91평)이다.


# 영주협당(瀛洲協堂)


영주협당  

영주협당 편액영주협당은 원래 군관(軍官)들이 근무하던 관청(官廳) 이었다. 창건년대(創建年代)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전의 군관청(軍官廳)이 영.목(營·牧) 소속으로 분리될 때 영군관청 (營軍官廳)이 됐다. 군관의 수는 원래 15人이 있으나 효종(孝宗) 초기에 이경억(李慶億) 어사(御使)가 조정 (朝廷)에 건의해 10인으로 줄였다. 


영주협당 집무실군관들이 왕래할 때에는 항상 말(馬)이 지급(支給)됐으나 사사로이 말(馬)을 소지(所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1832년(純宗 32)에 한응호(韓應浩) 목사(牧使)에 의해 중건(重建)되면서 공제당 (共濟堂)으로 이름이 개칭됐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07.7㎡(32.58평)이다


# 홍화각(弘化閣)


홍화각 전경 

측면에서 바라본 홍화각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節制使)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1435년(世宗 17) 최해산(崔海山) 안무사(按撫使)가 창건한 뒤 1648년(仁祖 26)에 김여수(金汝水) 목사(牧使)가 중수했고, 1713년(肅宗 39)에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돼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함에 따라 이 홍화각은 영리청(營吏廳)이 됐다. 


홍화각 편액 그 뒤 1772년(英祖 48) 양세현(梁世絢) 방어사(防禦使)가 중수(重修)했고 1829년 (純祖 29)에는 이행교(李行敎) 방어사가 개건(改建)했다. 홍화각이라 명명(命名)한 것은 왕(王)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高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官衙建物) 중에서 가장 웅장했다. 기문(記文) 으로는 '고득종기(高得宗記)'와 '김진용중수기 (金晉鎔重修記)', '이원조중수기(李源祚重修記)' 등이 전한다. 


홍화각 집무실그러나 홍화각은 1940년에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훼철(毁撤)됐고, 현재 고득종(高得宗)이 쓴 '홍화각(弘化閣)'이란 편액(扁額)과 '홍화각기(弘化閣記)'가 새겨진 현판(懸板)은 고.양.부삼성사(高.梁.夫三姓祠)에 보관돼 있다. 이 현판(懸板)은 탁본해 새긴 것이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 가구는 2고주 7량구조, 공포는 외1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55.82㎡(47.13평)이다.


# 귤림당(橘林堂)


귤림당 전경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詩)를 지으면서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귤림당중수기(橘林堂重修記)'에 의하면, "이 땅에 귤명(橘名)으로 된 국과원(國果園)이 모두 36곳인데, 홀로 이 귤림당(橘林堂)만이 연희각( 延曦閣) 가까이에 있다. 


입추(立秋) 이후가 되면 서리가 내려서 많은 알갱이가 누렇게 익는다. 공무(公務)를 보는 여가(餘暇)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果園)을 산책하노라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열매 가득한 나무들을 쳐다보노라면 심신(心神)이 다 상쾌해진다. 그러나 귤림당의 창건(創建)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귤림당 편액 

1743년(英祖 19) 안경운(安慶運) 목사가 개건(改建)했고, 1769년( 英祖 45)에 다시 중수(重修)한 뒤 건물이 노후(老朽)해 이원조(李源祚) 목사가 1842년(憲宗 8)에 다시 중수했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 공포는 초익공 홑처마에 사모지붕으로 면적은 9㎡(2.72평)이다.


# 연희각(延曦閣)


연희각 전경 

연희각은 목사(牧使)가 집무(執務)하던 곳으로,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도 불리웠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判官)의 집무처(執務處)인 이아(二衙)와 구분해 명명(命名)된 것이다. 


연희각 편액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연희각기(延曦閣記)'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懸板)도 누가 명명(命名)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외신(外臣)이 충성(忠誠)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精誠)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했다. 


측면에서 바라본 연희각 '탐라지(耽羅志)'에 의하면, 심연(沈演, 1638. 6∼1640. 9)의 시(詩)가 부기(附記)돼 있고 또 이 때 목사의 겸직(兼職)이었던 절제사(節制使)가 방어사(防禦使)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 연희각도 이 때 건립됐거나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희각 집무실 제주목사의 겸직은 1642년(仁祖 20)에 다시 절제사로 바뀌었다가 1713년(肅宗 39)부터 다시 방어사라 했다. 그 뒤 이 건물은 1884년(高宗 21)에 홍규(洪圭) 목사가 중수(重修)했으나 1924년 여름에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말았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2고주 5량구조,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36.63㎡(41.33坪)이다


# 망경루(望京樓)


망경루 전경 

망경루 망경루는 북두성(北斗星)을 의지해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면서 그 은덕(恩德)을 기리는 신지(信地)이며 중요한 제주목관아의 하나였다. 1556년(명종 11) 김수문(金秀文) 목사(牧使)가 창건(創建)한 뒤 1668년(현종 9) 이인(李 土寅) 목사가 개건(改建)했고 1806년(순조 6)에는 박종주(朴宗柱) 목사가 중수(重修)했다. 


망경루 편액 

1861년(철종 12)에는 신종익(申從翼) 목사가 이 누대(樓臺)에 좌탑(坐榻)을 설치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훼철(毁撤)됐다. 오점(吳霑)과 김양수(金亮洙) 상량문(上樑文)이 전해온다. 


망경루 전경 탐라순력도 체험관 1층 내부공간에 '탐라순력도'(보물 제652-6호)를 테마로 한 역사 체험공간을 조성, 1700년대 조선시대 제주의 사회생활, 명승지방어유적 진상 등 이형상 목사가 제주를 순력하면서 보여주는 여러상황들을 각각의 그래픽패널 및 영상물을 통해 당시 제주의 생생한 생활상과 역사를 이해하고 조명해 볼 수 있다


# 하마비(下馬碑)



제주목 관아 앞 하마비에는 '수령이하계하마 守令以下皆下馬'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이 비는 수령이외에는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게 했다. 이때 수령이라 함은 목사, 부사, 군감, 현감, 현령을 지칭한다. 목사가 있는 것을 알리는 표석이기도 했고 목사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이 지역에 이르면 누구나 몸가짐을 근엄케 해 소란을 떨거나 방자한 행동을 삼가하게 했던 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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