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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의 공연산책 199] 김지하 시인과 연극
  • 박정기 자문위원
  • 등록 2022-05-13 08: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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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김지하(1941~2022)는 재학시절 같은 미학과를 다니던 외삼촌 정일성(1939~, 국립극단 1기생, 현재 극단 미학 대표, 연출가)와 함께 연극을 했다. 정일성은 훤칠한 키에 미남이라, 대학극에서 주인공을 맡아서 했고, 김지하는 개성미가 넘쳐 성격배우역으로 출연했다. 


60년대 을지로 입구에 있던 소극장 원각사에서 서울대 연극 쉴러 작, 황은진 연출의 '군도'와 티에리 모니에 작 '암야의 집'에 출연해, 2인이 다 호연을 보였다. 정일성은 국립극단 1기생 시절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후, 극단 동인극장의 '악령'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그 외 여러 편 연출을 맡았고, 그것을 계기로 TBC-TV 연출부로 들어가, TV 드라마 연출을 맡아 <조선총독부>외 여러 편을 연출했다. 


필자가 TBC-TV에 탤런트로 들어가자, 김지하는 동아방송에 성우시험을 치뤄 합격했으나, 주변의 권고도 있고, 적성이 맞지를 않아 그만 두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극을 계속했고, 문리대 연극, 천승세 작 '만선'을 연출하고는, 이화여자대학교 연극부 연출도 했다. 그리고는  <신오귀 굿>을 써서 발표 공연했다. 이어서 풍자극 '나폴레옹 꼬냑' '금관의 예수' '구리 이순신'  '똥바다' 등을 발표했다. <신오귀 굿>은 전통연희 마당극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마당극을 후에 국립극단에서는 마당놀이로 대중화시키기도 했다. 나는 고대극회의 유길촌(후에 MBC-TV 드라마 연출가가 됨)과 연세대학교 극회의 오태석(극작가 겸 연출가)을 김지하에게 소개했다. 연극을 계속하면서 김지하는 방송작가 김기팔 선배와 연극배우 최불암과도 가까웠다.



서울대학교가 혜화동에 있을 때, 김지하의 부친은 영화관 명륜극장 영사실장이었기에, 가끔 나와 함께 명륜극장으로 가서 김 시인 부친을 뵙고는 했는데. 서울대학교가 관악구로 이전한 다음 명륜극장은 폐관되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김지하는 영화에도 관심이 깊었는데, 그가 당국의 검문을 피해 신분을 감추고 도망 다닐 때,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이 되어, 멀리 흑산도까지 동행한 적도 있고, 중동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함께 다녔던, 요절한 영화감독 하길종(1941~1979)이 귀국해 영화감독을 하자, 자주 만나 조언을 하기도 했다.


김지하는 건강이 안좋아 대학 재학당시 결핵을 앓았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 은평구에 있는 서울시립결핵요양소에 입원을 해 치료를 받았다. 나는 가끔 요양소를 찾아가 김 시인을 건강상태를 살펴봤다. 김지하가 건강을 되찾자 퇴원을 하고, 복학을 해 학업을 계속했다.


김 시인은 1969년 시를 써서 조태일이 발행하던 '시인'지에 등단을 했고, 70년에는 정치적 난세가 시작되자,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과 장성(將星),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대서 부정부패와 비리를 질타하는 저항시 ‘오적(五賊)’을 써 필화를 겪기 시작했다. 


1969년 외삼촌인 정일성은 TBC-TV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지하는 1973년 4월에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1926~2008) 선생의 외동딸인 김영주(연세대학교 사학과 대학원) (1946~2019) 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씨와  결혼했다.  


아들만 둘을 낳았는데, 장남 김원보(작가)와 차남 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학관 관장)가 있다. 교도소 생활 때문에 원보는 대학을 못 보냈고, 세희는 후에 영국유학을 시켰다.



김지하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1985년, 전두환 정권당시 형 집행 정지로 7년만에 `석방됐다. 김지하 시인은 출감되자, 청정지역에서의 건강회복을 위해 해남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나는 김기팔 방송작와 날짜를 정해 함께 가기로 약속을 하고,  김지하 시인이 건강회복 뿐 아니라, 출소 후에 심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서예와 사군자에 심신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인사동에 가서 벼루와 다기를 사가지고, 해남으로 떠났다.


해남에 도착해 김지하가 살고 있다는 천 씨라는 아전출신 집을 찾으니 사람들이 금방 길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 집에 도착해 김지하 부부의 환대를 받았다. 김지하는 말끔한 모습에 건강한 편이었고, 집안으로 안내했다. 옛 아전 집 사랑채라는데, 웬만한 주택 정원보다도 큰 마당에 쩍 벌어진 기와집 사랑채였다. 긴 마루에 앉도록 권하더니, 우리보다 먼저 방문한 인사가 있다며 그들을 소개를 시켜주었다.


전남대 교수 출신으로 광주 지역의 대표적 재야 민주인사인 명노근(1932~2000) 한국YMCA 전국연맹 이사장과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창설하여 초대 공동의장을 맡았던 소설가 송기숙(1936~2021) 그리고 정치학자 출신으로 후에 국회의원이 된 이수인(1941~2000) 등 세 사람이었다. 모두들 김기팔 작가를 TV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었고, 무척 반가워했다. 나는 3인을 처음 대하고 민주투사라는 명성으로 해서 강인하고 날카로운 모습인줄 알았는데, 온화한 모습에 다정다감한 말씨, 그리고 풍부한 유머감각으로 해서 금세 가까워질 수가 있었다.


3인이 먼저 이 집에 방을 정했기에 김기팔 작가와 나는 천 씨 집이 아닌 해남의 한 여관에 묵기로 했다. 6박 7일을 묵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음주를 좋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나면 대화를 술로 시작해서 밤에 잠이 들 때가지 술을 계속 마셔댔다.


마침 그 무렵에 완도연륙교가 해남과 연결되어 수영선수 조오련의 코치였다는 김 씨 성을 가진 청년이 직접 완도를 안내했고, 강진의 '다산초당'도 방문하고, 해남 대둔산의 초의선사가 있었다는 '일지 암'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기팔 작가는 김지하에게, 연금되어 있을 때 고문을 당했느냐고 물으니, 교도관들이 내가 쓴 "오적"이라는 시를 다들 읽고 좋아하는 눈치였다며, 그래서 그런지 전혀 고문을 당한 일이 없노라고 대답을 해,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6박 7일은 금방 지나갔고, 김지하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김 기팔 작가는 김지하의 손을 잡고, "죽지 말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고 당부를 하며 돌아왔는데, 그런 김기팔 작가는 1991년 55세의 나이로 요절을 해, 1년 뒤에 방송인과 친지들이 장곡 통일공원에 기념비와 기념상을 건립했고, 1992년 김기팔 작가의 추모비를 ,김지하의 비문과 조각가 심정수의 제작으로 고양시 장곡동 통일공원에 건립했는데, 고 김기팔 작가 비문의 김지하의 추모시를 소개한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다가 신 새벽에 돌아가셨다

밤새 사악한 무리를 질타하고 한 품은 이들을 달래시던 님은

민주와 통일의 먼동이 틀 무렵 기어이 돌아가셨다

그리던 북녘고향 저만큼 보이는 곳에서 님이여

아직도 걷히지 않는 어둠을 지켜 다가올 대낮으로 증거 하시라.


바로 30년 전의 바로 이 회고담을 김지하는 "모로 누운 돌부처"라는 자서전에 수록해 남겼다. 


김지하 모친은 구속자 가족협의회의 일원이었고, 지학순 주교가 원주시 학성동 천주교당에 부임하면서, 성당부설 가옥에 김지하의 부친과 모친이 거주하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내 처가 폐암으로 투병을 했는데, 김지하가 동방의 화타라 불리던 당시 105세의 장병두(1906~2016) 옹을 소개해, 내 처가 장 옹의 처방 약을 먹고는 2년 만에 폐가 완쾌된 줄 알 정도로 병세가 호전되었는데, 무면허 처방을 한다고 장 옹을 한의사들이 고발해, 장 옹은 법정에서 패하게 되고는 더 이상 처방을 못 하게 되어, 내 처는 1년 반 뒤에,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별세하고 말았다.



김지하가 수감당시 구속자 가족협의회 일로, 원주에서 자주 서울로 올라온 김지하의 모친(정금성 여사)을 김정남(후에 김영삼 대통령 교문수석비서관)과 자주 뵙고, 김지하 부모가 기거하던 원주시 학성동, 지학순 주교관 부설 가옥으로 김지하의 부모를 찾아뵙기도 했다. 몇 년 뒤 김지하 모친이 원주시 상주병원에 입원하셨다고, 김지하의 삼촌인 정일성이 미국에서 귀국해 알려주었기에, 원주 상주병원을 방문하기도 했고, 김지하의 부친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후배인 명배우 심양홍과 함께 원주로 문상을 가기도 했다.


5월 8일에 별세한 김지하는 죽기 전까지 연극과 가까워, 원주 토지문학관에 창작공간을 설치해, 극단 학전의 김민기(가수 겸 연출)대표가 상주하다시피 하며 연극을 계속했고, 청년극단 고래의 이해성 대표이자 연출이 1개월씩 상주하며, 공연을 성공시키기 위해 연구하는 장소로 창작공간을 선택하기도 했다. 한국연극협회에서도 전국연극제가 강원도에서 개최되고, 행사가 끝이 나자, 원주 토지문학관을 방문해 단체로 숙박을 하기도 했다. 그의 명작 '오적'은 명 소리꾼 임진택이 판소리로 연출과 출연을 해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비록 김지하는 떠났지만, 그가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기에, 연극인 동지들이 김지하의 희곡을 공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주요경력


황해도 금천생, 서울고 서울대미대, 서울대학교 총동문회 이사, 극작가/연출가/평론가, 한국희곡뮤지컬창작워크숍 대표,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위원, 전 서초연극협회 회장,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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