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칼럼] '디아코니아'로 한국교회 보수성 극복과 복지국가 디딤돌 역할을 기대한다
  • 박민식/복지국가소사이어티 경제산업위원장
  • 등록 2022-05-24 07:51:20

기사수정

지난 5월13일에는 매우 의미 있는 만남이 있었다. 기독교 원로인 전국신학대학교 총장들과 김민석 보건복지상임위원장과의 회동이었다. 교회의 사회적 역할 강화를 위한 정책간담회 형식이었다. 주요 의제는 ‘코로나 19 극복과 기독교의 역할’, ‘복지국가를 위한 기독교의 역할’ 등이었다. 그 중 특히 독일 등의 디아코니아 운동의 교훈을 통한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요구되는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내용이 논의되었다. 주요 참석자는 황덕형(현,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한국신학대학총장협의회 회장), 정일웅(전 총신대학교 총장), 오덕교(전 합동신학대학원 총장, 몽골 올란바토르대학교 총장), 정효제(전 대한신학대학원 총장), 이상구(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이사장), 박민식(복지국가소사이어티 경제산업위원장) 등 이었다.


# 디아코니아(διακουια) : 섬김


디아코니아(διακουια)는 헬라어(그리스어)로 <섬김>이란 의미이다. 예수는 <섬기는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기독교의 궁극적인 사상 또한 사회를 위해 <섬기는 종>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섬김, 섬기다, 섬기는 일, 섬기는 종” 등의 뜻을 가지고 모두 100여 회 사용되고 있다. 독일 뿐 아니라,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사회적 실천을 행하는 디아코니아시설들이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국가의 복지시스템의 형성과정과 함께해 왔다. 오늘날에도 사회복지 분야에서 필수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디아코니아 운동은 19세기 유럽에서의 영적각성운동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종교개혁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디아코니아의 기원

 

종교개혁은 단순 종교 문제의 반성과 개혁의 관점이 아니다. 16세기 전개된 서유럽의 종교개혁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 및 바른 사회를 이루기 위한 운동이었다. 중세는 종교와 사회 및 국가와 정치 등 모든 분야가 기능적으로 엮여져 있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반의 변화였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가 종교개혁의 배경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운동과 인문주의 운동은 “근원들로”(ad fontes)라는 구호 아래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와 사상 및 사회의 모습을 재확인하고 적극적인 인간상을 제시하며 새로운 사상과 문화, 그리고 교육과 정치 등의 새로운 방식을 재발견하면서 중세의 한계를 극복했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빈의 학문적 배경에도 신학에 앞서 법학이었다는 점도 의미 있는 부분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활동 중인 1525년에는 뮌처의 농민반란 사건이 일어난다. 토마스 뮌처는 루터와의 연대를 원했지만, 루터는 뮌처의 무질서와 무정부주의를 거부한다.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의 시의회와 함께 종교개혁을 주도한다. 1526년 사부아의 통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던 제네바는 당시 인구 만명 정도의 자유도시였다. 칼빈은 1941년 새로운 교회법을 작성하여 시의회에 제출을 했고, 1943년 제네바의 새로운 시민법이 제정이 되게 된다.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범죄 발생 예방에 관한 것과 죄인들의 회심과 사회 복귀를 위한 방안, 구빈원을 위한 구제 사업, 난민들에 대한 보호, 학교의 설립 등에 대한 제도와 규범을 만들어 사회적 실현을 했다. 특히 제네바 아카데미를 만들어 개혁의 실천을 위한 밑바탕이 되게 했으며, 이를 통해 수많은 신학적 도전과 정치적 장애를 극복했다. 또한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 배출된 유능한 인재들이 전 유럽으로 파급되고, 이후 신대륙까지 확산되어 종교개혁의 신학적 대의와 사회개혁의 방향을 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이 19세기 유럽에서의 영적각성운동으로 이어져 지금의 디아코니아 운동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 디아코니아와 거버넌스


그래서 오늘날 서구에서의 복지체계는 종교기관(교회)을 통한 복지실천이 필수적이고 이에 대한 정책적 연구 및 정책실현의 모델이 매우 많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종교와 시민공동체 및 정부(지자체 포함) 등과의 거버넌스 및 순기능적 역할에 대한 연구와 정책적 접근과 시도가 매우 부족하다. 오히려 이념간 갈등 구조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적으로도 공공복지와 관련한 연구가 활발치 못하다. 정책적으로 기독교의 신학연구에 대한 지원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사회과학자들에 의한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연구가 매우 협의적으로 이뤄졌고 이 또한 아젠다만 던지는 수준에 불가했다. 당연히 종교의 당사자들을 사회적 역할로 끌어들이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종교의 사회적 역할 연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한 정책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지금까지는 종교계에서도 종교의 사회적 역할과 복지를 위한 신학적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며, 이러한 결과 종교 따로, 정치 따로, 복지 따로인 상황에서 서로의 주장과 아쉬움만이 섬으로 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16세기의 종교개혁과 19세기 영적각성운동은 종교만의 개혁과 각성이 아닌 사회 전반의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역할을 종교가 수행했다. 그 사상적 뿌리가 디아코니아였으며 이러한 사례를 독일 및 스웨덴 등 유럽국가에서 많은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국가에서 종교는 하나의 사회자본이며 연대의 역할 중심에 있으면서 복지사회참여와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수단이 될 수 있었다. 특히 독일과 스웨덴 등은 종교나 언어 및 인종과 이념 등의 사회적 균열요인이 적었고,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종교의 핵심적 역할에 집중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노조간의 갈등 해소를 위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존재해왔고, 이들간 연대를 가능하게 한 사상적 뿌리를 종교가 제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종교의 사상적, 정서적, 이념적 연대의 역할은 교회라는 건물이 제공하는 형제적 기능에 앞서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스웨덴 등이 서구에서도 가장 먼저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배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독일 및 북유럽국가들은 마르틴 루터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스웨덴은 루터의 ‘두왕국론’ 교리에 의해 교회와 국가의 역할을 분리시키지 않고 교회를 사회복지시스템을 위한 필수적 구성으로 포함시킨다. 노인보호, 예비학교, 학생기숙사, 자율학교 등 다양한 형태의 복지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즉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과 역할을 국가가 책임지면서 동시에 교회 등은 보충적으로 다양한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


# 우리나라에서의 디아코니아 실천을 위한 전제조건


이제 우리나라로 시선을 돌려보자. 특히 다음세대의 후학을 양성하는 전국신학대학교 총장들과 복지국가의 정책적 역할을 담당하는 김민석 보건복지위상임위원장과의 만남이 새로운 변화의 신호탄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첫째, 사회적 연대를 위한 역할로써 기독교를 정치적 활용으로서가 아니라 정책적 파트너로서 끌어들여야 한다. 스웨덴 및 독일 등 사회복지국가는 기독교 신앙의 사상적 뿌리와 문화적 바탕 위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운영되어 왔다. 이는 그들의 당연한 사회적 의무였고 사회복지의 실천은 교회의 당연한 역할이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사랑과 사회적 연대라는 기독교의 가장 근원적인 가치는 실종되었고, 이념과 진영의 갈등 속에 교회는 정치적 활용만 되고 있다. 당연히 사회연대적 의무와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정,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더욱 요구되는 사회적 연대를 위해 기독교적 가치가 비로소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회는 교회로서의 비판적 성찰이 필요한 동시에 국가는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정책적 파트너로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 진중히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둘째, 교회와 국가간 사회복지연대위원회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이상의 실천을 위해 선거 시즌만 되만 되면 교회를 찾아가는 표몰이로서가 아니라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실체적 연대 기능을 위한 위원회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스웨덴은 디아코니아적 교회로서 교회의 복지적 책임을 강하게 요구받는다. 2000년에 이르러서는 국가교회에서 자율적 국민교회로 이전한 이후, 모든 교회는 교회 프로그램 속에 디아코니아가 필수적 교회의 역할과 임무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독일의 디아코니아의 실증적 사례는 지난 이상구 박사의 칼럼을 통해 구체적으로 소개된 바가 있다. 독일의 디아코니아 기관만 약 31,000개, 45만 명의 직원 및 70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디아코니아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즉 교회가 45만 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독일의 디아코니아가 운영하는 시설은 유치원 8,953개, 병원 696개, 중독 등 전문상담소 2,500개, 일반 상담소 700여 개 정도다. 독일 전체 장애인 시설의 1/2, 유치원의 1/4, 병원의 1/10에 해당 된다. 


이러한 스웨덴과 독일의 사례에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정의와 연대라는 윤리적 근거이다. 교회가 먼저 윤리적 에토스, 즉 표면적이고 일시적 윤리가 아닌, 관습화된 윤리적 모습을 통한 정체성 기반의 신뢰가 근거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편향적 정치 개입과 대형화 및 세속화 등으로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실증적 사례를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기독교 내부에서도 교단에 따라 실천신학과 관련한 신학적 해석과 적용의 상이함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스웨덴이나 독일과 사례를 만드는 데는 한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간 사회복지연대위원회를 조직함이 필요하다. 위원회를 통해 신학과 정책의 거리를 좁히고, 정체성과 복지의 동일한 지향점을 발견하고 공유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신학교와 복지 전문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한 종교와 복지와 관련한 정책 연구 지원이 필요하다.


# 한국교회 보수성에 대한 오해의 극복


셋째는 무엇보다 한국 기독교 보수성에 대한 오해를 극복해야 한다. 스웨덴과 독일의 디아코니아는 민관협력관계와 보충성 원리로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추동력을 가져왔다, 그 배경 중의 하나는 이해와 이념으로 인한 충돌이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교회의 이념적 중립성이 훼손된 것으로 인식되어있다. 대부분의 교회는 보수 집단으로 인식되고, 많은 목사들과 교회의 원로들이 정치적 편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보수성의 원인을 경제성장과 교회의 성장을 같은 타임라인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6.25 전쟁 이후 가난하고 궁핍한 시절, 오직 신앙에 의지하며 힘든 현실을 이겨내고 지금의 한국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러한 국가의 성장과 교회의 성장은 같은 타임라인 선상에 올려져 있다. 경제적 축복을 이룬 국가의 지도자들은 고난 속에 성장을 이룩한 기도의 응답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그러하고 태극기 부대가 그러했다. 기도의 응답으로 축복의 통로가 된 군사 독재 권력도 일종의 하나님의 뜻이었다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이 또한 오해일 수도 있다. 세속성을 이기고 온전한 헌신으로 교회의 성장을 이룬 것이 선대 교회 지도자들의 진정한 모습이다. 성도의 기복 신앙을 교정하고 권면하며 사회적 헌신과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의 실천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실천을 했던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 진정성이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감화되고 교화되었기에 한국교회의 성장이 가능했다. 초대교회를 핍박하였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였던 배경도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헌신과 사랑의 실천을 확인했었기 때문이다. 전염병으로 죽어 길거리에 버려진 시체들을 거두어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러주었던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참모습이었고, 다리 밑에 버려진 여아(女兒)들을 역시 거두어서 양육하고 사랑으로 길러내던 모습도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었다. 한국교회의 성장도 단순히 경제성장과 기복적 물질적 축복이라는 이유로 단정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도 폭발적인 성장이 함께 되었어야 함이 마땅하다.


# 분열의 극복 : 십자가의 디아코니아


우리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가장 큰 도전은 분열이다. 분열의 해결은 방법론에 의한 것이 아니다. 디아코니아 운동도 복지전달체계의 한 방법론으로만 접근한다면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예수가 태어난 나사렛이란 곳은, 마치 우리나라 산간벽지에 있는 어느 작은 마을과 같다. 아무도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태어난 한 젊은이는 당시의 가장 참혹한 형벌이었던 십자가로 죽임을 당한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과 십자가의 형벌은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름과 용서의 상징이 되어 다시 태어났다. 편향과 오해와 거짓과 선동과 분열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예수는 스스로가 죽었다. 메시아가 <섬김의 종>으로 십자가에 매달렸다.


유럽의 국가들이 이념과 갈등을 극복하고 국가와 교회와 다양한 공동체가 더불어 잘 사는 복지국가를 이뤄낸 근원적인 뿌리에는 <십자가의 섬김>(디아코니아)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더 이상 진보와 보수의 이데올로기에 허우적거리지 않고, 분열과 편향을 극복하여 복지국가라는 미래국가 모델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유물론적 방법론에 앞서 인간의 욕망을 극복하는 <섬김>의 정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성공의 길을 찾아서더보기
 황준호의 융합건축더보기
 칼럼더보기
 심종대의 실천하는 행동 더보기
 건강칼럼더보기
 독자기고더보기
 기획연재더보기
 인터뷰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