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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이어보기14]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인목왕후 김씨의 능 ‘목릉穆陵’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19 18:01:24
  • 수정 2023-03-13 13:4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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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상설에 맞게 조성돼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됐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만 생략했을 뿐 상설은 선조의 능과 같다. 특히 의인왕후 능침의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만, 의인왕후의 능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처음 조성한 능이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각미가 다소 떨어지지만,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자각은 원래 의인왕후의 능 앞에 있었다. 그러다가 1630년(인조 8)에 선조의 능이 천장되면서 기존의 목릉 정자각을 이건(移建)하게 되자 의인왕후 능 앞에 있던 정자각은 헐었다. 이 후 인목왕후의 능이 조성되면서 치우친 정자각을 다시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건이 번거롭다해 신로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따라서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선조의 능을 향해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진 건물로 보물로 지정됐다. 



목릉은 처음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가 정유재란이 끝난 직후인 1600년(선조 33)에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유릉(裕陵)이라는 능호로 조성됐다. 이 후 선조가 1608년에 세상을 떠나자, 건원릉 서쪽 산줄기(현 헌종의 경릉)에 목릉이라는 능호로 조성했다가 1630년(인조 8)에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기고 의인왕후의 유릉(裕陵)과 목릉의 능호를 합해 목릉이라 했다. 


1632년(인조 10)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처음 혜릉(惠陵)이라는 능호를 정했다가 목릉과 능역을 합치자는 의논으로 현재의 모습이 됐다.


선조(재세 : 1552년 음력 11월 11일 ~ 1608년 음력 2월 1일, 재위 : 1567년 음력 7월 3일 ~ 1608년 음력 2월 1일)는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에 인달방(현 서울 사직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명종의 아들)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에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인순왕후의 명으로(명종의 양자 입적)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8개월 동안 받았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들을 궁궐에 자주 불러,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곤 했다. 그 중에서도 선조(당시 하성군)를 유난히 아껴 그를 따로 불러 학문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한윤명, 정지연 등을 따로 뽑아 그를 가르치기도 했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익선관을 벗어 왕손들에게 주며 써보라고 했다.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를 알려고 한다.” 명종은 이렇게 말하면서 여러 왕손들에게 익선관을 써보게 했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면서 익선관을 써보았지만, 제일 나이가 어린 선조는 머리를 숙여 사양했다 “이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렇게 아뢴 뒤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명종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는 즉위 초에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했다. 훈구세력의 힘을 억제하고 이황, 이이 등의 인재를 등용해 선정에 힘썼다. ‘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삼강행실’ 등을 편찬케 해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을 신원하고, 그들에게 화를 입힌 훈구세력의 관직을 추탈해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명종 말년부터 일어난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세자책봉 문제로 옥사가 일어났고,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전 국토가 황폐화됐다.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그 후 1608년(선조 41)에 경운궁 석어당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재세 : 1555년 음력 4월 15일 ~ 1600년 음력 6월 27일)는 본관이 반남인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나, 1569년(선조 2)에 왕비로 책봉됐다. 성품이 온화했고 침착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궁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해 친아들처럼 대해줬고, 훗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고,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1600년(선조 33)에 황화방 별궁(경운궁)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인왕후의 국장은 임진왜란 이후에 치른 첫 번째 국장이었다. 원래 왕과 왕비의 산릉으로 결정된 자리에 일반묘지나 민가가 있으면 강제로 옮겨야 했다. 하지만 이때에는 전쟁 이후의 수습상황단계였기 때문에 묘를 옮기거나 철거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의인왕후의 산릉자리는 5개월 동안 정하지 못했다가 겨우 포천 신평에 장지를 정하고 산릉공사를 했다. 하지만 불길론이 일어나면서 공사를 중단하고, 건원릉 동쪽으로 장지를 다시 정했다. 세상을 떠난 지 7개월이 지난 1600년(선조 33) 음력 12월 22일에 장사하면서 겨우 국장을 종료했다.


선조 때 유학자들의 글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왕비의 원찰이 아닌 곳이 없다.”는 통탄의 목소리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의인왕후가 이름 난 기도처마다 자신의 원찰을 설치하고, 아이를 낳기를 발원했기 때문이었다. 


왕후는 전국의 명산대찰에 원찰을 설치하고 부처님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건봉사, 법주사 등 여러 사지(寺誌)에는 의인왕후가 보시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자식을 절실하게 바랬던 이유로 불교에 의지해 평생 불경과 염주를 가까이 하고 살았고 궁중의 여인들은 그녀를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 불렀다. 



의인왕후는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선조실록에는 “의인왕후가 후궁들의 자식을 지나치게 예뻐하여 선조가 장난삼아 질책하면 아이들은 왕후에게로 도망가 숨곤 했는데, 이때마다 왕후는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주곤 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는 의인왕후가 자신의 배로 나은 자식은 아니었을지언정 선조의 모든 자식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해주었음을 알려준다.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재세 : 1584년 음력 11월 14일 ~ 1632년 음력 6월 28일)는 본관이 연안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씨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반송방(서울 아현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1600년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602년(선조 35)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됐고, 1606년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당시 소북정권의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에 입각해 적자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했으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소북정권이 물러나고 대북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광해군 즉위 후 왕대비가 됐으나, 1613년(광해 5)에 계축옥사로 친정아버지와 영창대군이 연루돼 처형당하는 일을 겪었다. 


광해군일기에는 인목왕후의 죄악이 열거돼 있는데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을 저주한 죄,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역모를 꾀한 죄 등의 대목이 나와 있다. 결국 1618년(광해 10)에 대비의 호칭을 삭탈하고 서궁이라 칭해 경운궁에 유폐됐다. 



이 후 1623년에 서인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옹립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대왕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인목왕후는 그 후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 처하면서 국정에 관심을 표해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 금강산 유점사에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첩이 남아 있다. 1632년(인조 10)에 인경궁 흠명전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목왕후 폐비사건을 시작으로 인목왕후의 일대기를 그린 글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글을 ‘계축일기’라고 한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과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둘러싼 붕당을 사실적으로 서술했다. 


이 기사문은 인조반정 뒤 왕후의 측근 나인이 썼다고 전해진다. 그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윗전(인목왕후)이 애통해하며 대군(영창대군)을 내보내지 못하고 시간을 끌자 금부 하인들이 밀고 들어와 대군을 업고 나갔다. 그 후 한 달 만에 대군 아기는 강화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런데 미리 알려 주지도 않고 늦도록 안부 전하는 사람도 찾아오지 않으므로 윗전께서는 수상히 여기시고 근심하시는 것이었다. "어째서 오늘은 여지껏 안부도 알려오지 않는고? 필시 무슨 까닭이 있도다. 아무든지 높은 데 올라가 궁 밖 길의 동정이나 살피고 오너라." 명령을 받고 한 사람이 전에 침실로 썼던 다락 근처에 올라가 바라보니 사람들이 돈의문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성 위로 올라가 굽어보니 화살을 차고 창과 칼을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고 말을 탄 사람도 많았다. 이제 죽이려나 보다 하고 내려와 바깥사람들이 길 닦는 곳이 있기에 거기 가서 물어 보고서야 대군을 강화로 옮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관적 관점에서 쓰였으나, 조선 중기의 궁중에서 전개되는 풍속 및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고, 당시 치열한 붕당의 이면을 이해하는데 보조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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