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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이어보기 19]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 '숭릉崇陵'
  • 이승준
  • 등록 2022-07-25 17:56:00
  • 수정 2023-03-13 13:5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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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릉 정자각(항공 사진)[이승준 기자]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으로,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형식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했고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좌씩 놓여 있다.


그 밖의 석양, 석호,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은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로 배치됐다. 숭릉의 석물은 효종의 구 영릉(寧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영릉(寧陵)이 여주로 천장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했다.



망주석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위쪽에는 ‘세호’라고 불리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돼 있다. 능침 아래에 있는 정자각은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보물로 지정됐다.


1674년(현종 15)에 현종이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숭릉을 조성할 때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해 능을 공사했다.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깊이가 3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했다. 숭릉 조성 후 9년이 지난 1683년(숙종 9)에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 그 다음 해 숭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했다.


현종(재세 : 1641년 음력 2월 4일 ~ 1674년 음력 8월 18일, 재위 : 1659년 음력 5월 9일 ~ 1674년 음력 8월 18일)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아들로 1641년(인조 19)에 청나라 심양 관사에서 태어난 조선 역대 임금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1645년(인조 23)에 인조의 세자인 소현세자가 급서하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동시에 원손이 됐고, 1648년(인조 26)에 왕세손이 됐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된 후 1659년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에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고,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했다.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고,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해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두 차례의 예송논쟁으로 붕당의 싸움이 치열하기도 했다. 1647년(현종 15)에 창덕궁 재려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종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사려가 깊었다.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는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하루 빨리 아버지인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 효종이 있는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볼 정도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어린 현종이 어진 인정을 베푸는 대상은 부모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의 할아버지인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범 가죽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했다. 이 때 현종의 나이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보내지 말라고 명했다. 하루는 궁중에서 나오다가 추위에 얼고 굶주린 궐문 밖 군졸을 보고는, 탄식하며 옷과 식량을 제대할 때까지 제공해주라고 명령하고서야 자리를 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린 현종의 이러한 효성과 자애로움은 할아버지인 인조에게 큰 신임을 안겨줬다.



명성왕후 김씨(재세 : 1642년 음력 5월 17일 ~ 1683년 음력 12월 5일)는 본관이 청풍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송씨의 딸로 1634년(인조 12)에 장통방(현 서울 종로2가 관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고,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됐다. 현종 사이에 1남(숙종) 3녀(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1683년(숙종 9)에 창덕궁 저승전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종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붕당정치의 여파로 숙종 재위 시의 조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제 2차 예송논쟁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고,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남인과 가까이 지내자 서인들은 더욱 위협을 느끼게 됐다. 


그러던 중 명성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김우명은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이 사건을 홍수(紅袖 : 궁녀)의 변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놀란 숙종은 세 사람을 금부에 가두고 심문했으나, 이들이 죄가 없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고, 오히려 김우명에게 무고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조정에서는 한밤중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회의가 열렸는데, 갑자기 정청에서 여인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휘장 뒤에서 대비인 명성왕후가 우는 소리였다. “홍수의 변은 내간의 일이라 과인이 알 수 없다고 생각하여 어머니께서 복평 형제의 간통사건을 설명해주려고 나오신 것이오.”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왕후를 위해 둘러댔지만 수렴청정을 하지 않는 대비가 정청에 나타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명성왕후는 큰 망신을 당하게 됐다. 그녀의 과격한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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