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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이어보기 25] 22대 정조선와 효의황후의 능 ‘건릉健陵’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30 23:24:36
  • 수정 2023-03-13 13: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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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 김씨의 능으로, 건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돼 있다. 능침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했다.


1800년(정조 24)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장조의 현륭원(융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했으나,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 건릉 불길론이 있었고, 1821년(순조 21)에 효의선황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건릉 천장이 결정됐다. 이후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능자리가 결정되면서 합장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했다.



정조선황제(재세 : 1752년 음력 9월 22일 ~ 1800년 음력 6월 27일, 재위 : 1776년 음력 3월 10일 ~ 1800년 음력 6월 27일)는 추존 장조와 헌경의황후 홍씨의 둘째 아들로 1752년(영조 28)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762년(영조 38)에 아버지 장조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을 겪었다. 1762년에 영조는 정조에게 왕위 계승의 명분을 주기 위해 일찍 세상을 뜬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게 했다. 1775년(영조 51) 부터는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했고,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먼저 아버지 장조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노력했고,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를 정계에서 물러나게 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키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해 발전시키고, 규장각 설치, 신해통공(금난전권 폐지 등) 실시,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했고, 임진자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고, ‘증보동국문헌비고’ 등 많은 서적을 간행했다. 



그리고 이론이 중시되는 학문에 치우치지 않고, 실학을 발전시켰고,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가져왔다. 가난한 백성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을 공포하고, 제도 개편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1800년(정조 24)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순조는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올렸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정조선황제로 추존됐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의 원(영우원)을 지금의 자리인 현륭원(융릉)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고 1790년(정조 14)에서 1795년(정조 19)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했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1796년(정조 20)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했고, 그 전까지는 1789년(정조 13) 수원읍치를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행궁으로 고쳐 지은 후에도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 활용했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10월에 이뤄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했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했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함께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효의선황후 김씨(재세 : 1753년 음력 12월 13일 ~ 1821년 음력 3월 9일) 본관이 청풍인 청원부원군 김시묵과 당성부부인 홍씨의 딸로 1753년(영조 29)에 가회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에 왕세손빈으로 책봉됐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해 60세가 넘어서도 정순왕후 김씨와 헌경의황후 홍씨를 공양해칭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됐고, 일생을 검소하게 지내어 수차례에 걸쳐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선왕께서 존호를 받지 못하신 것이 마음속에 지통으로 남아 있는데, 미망인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단 말인가.”하며 모두 거절했고, 1820년(순조 20)에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 후 1821년(순조 21)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의선황후는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자식을 낳을 수 없어 불안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타고난 덕망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순조실록’에 실린 효의선황후의 행장에는 성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랫사람을 반드시 의와 신의로써 대하여 일찍이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을 열고 얼굴을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적인 은정으로 봐주지 않았으므로, 좌우에 있는 궁중의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알았다. 


친척 중에 과실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꾸짖지는 않았으나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아 그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였으므로, 그 사람이 “마음에 부끄럽고 송구하여 벌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하다.”라고 하였다. 또, 자신의 봉양에 매우 검소하여 복식과 기물이 하나도 좋은 것이 없었고 겨우 사용할 수 있는 것만 취할 뿐이었다. 평소의 반찬이 더러 마음에 맞지 않을 때 좌우에서 담당자를 치죄할 것을 청할 경우 “어찌 구복(口腹) 때문에 사람을 치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사진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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