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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46-하동군 편] 절의의 신화, 그리고 동방이학의 조종 정몽주 추모 하동 ’옥산서원[玉山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6 14:13:08
  • 수정 2022-08-19 16: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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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에 있는 조선시대 정몽주를 추모키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조선시대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됐다. 그 뒤 1968년에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후기 문하찬성사, 예문관제학, 인물추변도감제조관 등을 역임한 관리. 학자,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정몽란이라 했다. 뒤에 정몽룡으로 개명했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라 고쳤다.


정몽주는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1362년 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수찬(修撰)이 됐다. 이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김득배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청해 장사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했고,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해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했다. 돌아와서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했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고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旌閭: 미풍양속을 장려키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를 내렸다. 다음 해 예조정랑(禮曹正郎)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했다.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사예(司藝).직강(直講).사성(司成) 등을 역임했다.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돼 일행 12인이 익사했다. 다행히 정몽주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돼 이듬해 귀국했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에 유배됐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정몽주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九州: 현재 일본의 큐수지역)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됐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했다.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雲峯)에서 왜구를 토벌했다.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됐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 전왕의 시호를 요청키 위해 보내는 사신)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고 있었고,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해 고려 사신을 유배시키는 등 고려와의 국교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려했으나 사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긴장상태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돼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시켰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됐다. 그러나 한 번 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는 바람에 요동에서 되돌아왔다.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세워 이듬해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館事)로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당시 조정에서 물러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臺諫)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 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됐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다.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家禮)‘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썼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했고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했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했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했고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했다. 또 의창(義倉)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다. 이듬해 ’대명률(大明律)‘ ’지정조격(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했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王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역으로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했으나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살해됐다.


정몽주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한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를 정도로 뛰어나 모두들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전해지면서 그 내용이 정몽주의 강설내용과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했다고 한다. 정몽주의 시문은 호방하고 준결하고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정몽주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문집으로 ’포은집(圃隱集)‘이 전하고 있다.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은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했다. 정치적으로도 정몽주는 고려 말의 어려운 시기에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일이 나더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경내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1칸의 영각(影閣), 10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3칸의 장판각(藏版閣),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7칸의 주사(厨舍) 등이 있다.


묘우에는 정몽주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영각에는 정몽주의 영정이 소장돼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주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庫子)가 사용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두번째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고,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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