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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함이 넘치는 조선의 민가, 강릉 ‘선교장’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09-24 21:28:59
  • 수정 2023-09-03 03: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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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선교장'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운정동 431번지]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상류 주택으로, 경포호가 현재와 같지 않고 그 둘레가 12㎞였을 때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고 하여 '배다리[船橋]'라는 택호를 가지고 있다.


정자인 '활래정(活來亭)'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 중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에서 집자한 것으로, ‘맑은 물은 근원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내번(李乃蕃)[1703~1781]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해 대대로 후손들이 거처했다. 열화당(悅話堂).안채.동별당(東別堂).활래정 등 모두 4채가 있다. 가장 오래된 안채 주옥(住屋)은 당초에 주거를 정한 때의 건물이라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한국 전통가옥의 최고로 손꼽히는 선교장은 102칸의 대저택이지만 부를 과시하기 위해 지어지지 않았다. 


사람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고 가족과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한 철학이 담긴 집으로 한 시대 문화의 꽃을 피우던 소통의 공간이 바로 선교장이다. 삼백년 역사의 아름다운 전통고택, 선교장의 대저택 선교장 대문은 뜻밖에도 서민들의 집 대문처럼 소박하다. 


鳥宿池邊樹 僧鼓月下門(조숙지변수 승고월하문)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잠들고, 한밤 나그네는 이 문을 두드린다’. 피곤한 길손은 그 누구든 괜찮으니 들어와 쉬었다 가라는 주인의 배려, 선교장은 풍류객들을 위해 활짝 열려있었다. 




선교장은 이 지역 풍류의 중심이었다. 조선시대 풍류객의 가장 큰 소망은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고 그 감흥을 남기는 것이다. 강릉 선교장은 바로 그 길목에 있었다. 그래서 대관령 넘어 관동지방을 오는 유랑객들은 거의 다 선교장에서 머물렀는데 사랑마당은 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워낙 환대해주고 문화적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에 당대의 인사들에겐 선교장이 필수 코스였다. 


선교장은 관동지방 문화의 산실로 오랫동안 수많은 시인 문객들의 교류가 이어졌다. 선교장을 방문한 서예가들은 풍류를 즐기고 그 감흥을 글씨로 남겨놓았다. 선교장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정원은 풍류객들의 정취를 한껏 드높여 주었다.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과 누정은 선교장 내에서도 최고의 풍류공간이었다.

 


활래정은 선교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벽이 온통 문으로 돼 있어 문만 열면 산과 호수, 연못을 볼 수 있다. 활래정은 연못 속에 돌기둥을 담그고 있는 누정형식으로 창덕궁 부용지 연못가의 부용정을 닮았다. 


선교장은 지역 빈민들을 적극적으로 구제하는데 앞장섰다. 흉년이 들 때마다 수천석의 쌀을 베풀면서, 높은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선교장은 근현대사의 뜻 깊고 소중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말 위기에 처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곳간에 학교를 설립,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당시 최고의 신지식인들을 교사로 초빙하고 학비전액을 부담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3년 만에 강제 폐교되고 말았다. 이후 선교장은 독립자금 제공을 통해 나라의 독립을 추구하기도 했는데, 백범 김구는 선교장의 나라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글씨를 써줬다.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한지 삼십년이 되는 1948년 4월, 선교장으로 백범일지와 글씨를 보내온 것이다.



전주 이씨가가 지금의 배다리로 옮겨온 것은 효령대군 11세손으로 가선대부 무경 이내번의 때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안동 권씨가 아들 무경과 함께 충주로부터 강릉으로 옮겨와 저동에 자리를 잡은 뒤로 가산이 일기 시작해, 드디어는 좀더 너른 터를 찾기에 이르른 어느 날,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일이 집 앞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족제비 몇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중엔 한 떼를 이뤄 서서히 서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신기하게 여긴 무경은 그 뒤를 쫓았다. 서북쪽으로 약 1km떨어진 어느 야산의 울창한 송림 속으로 사라져, 그 많던 족제비의 무리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게 됐다. 신기한 생각에 한동안 망연히 서있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 주위를 살피고는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명단이라고 무릎을 쳤다. 하늘이 족제비를 통해 훌륭한 터를 이씨가에 내리신 것이라고 믿은 무경은 그 해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어 오면서 최근까지 이씨가에서는 족제비를 보호하면서 뒷산에다가는  족제비의 먹이를 가져다 주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강릉 선교장에서>



사랑채인 열화당은 1815년(순조 15)에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垕)가 건립한 건물로, 선교장의 여러 건물 가운데 대표적인 건물이다. 건물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쓸어 버리리라....’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러한 열화당은 오은 이후로는 이씨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면서 지금가지 내려오고 있다. 열화당은 계단 대여 개를 딪고 올라가도록 높직하게 위치하고 있고, ‘작은대청’은 누마루 형식을 지닌 운치있는 구조다. 앞툇마루는 상당한 높이를 확보하고 있어, 여름철에 허물없는 손은 여기서 접대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곳의 가장 중심부인 대청의 서북쪽으로 난간을 부착한 툇마루가 앞툇마루를 연결지어 돌게 되어 있다.

 


방은 ㄴ자 형상으로 ‘작은대청’과 ‘대청’ 사이에 위치했고, 장지문으로 사이를 막으면 셋으로 나눌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굴뚝은 대청 뒤로 약 3m가량 물려서 높이 쌓아올렸다. 이 건물의 특징은 대청의 T자형 대들보와 벽이 온통 문짝으로 둘려져 있다. T자형 대들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여름철에 문짝을 전부 떼어 걸어 놓으면 전후좌우로 통풍이 되어 자연의 흥취를 만끽할 수 있다.                                                                                                                                    

안채 주옥은 무경 이내번이 개기한던 당시의 건물이라 전해지고 있다. 당시 번성했던 이씨가의 풍모를 지니면서, 민간형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띠고 있다.  이 건물은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따로 있고, 들어서면 안뜰을 앞에 하고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각 방마다 ‘반침’이 딸려 있어 살림도구를 넣어둘 수 있게 돼 있다.

 

안방은 이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 되는 부인이 거처하는 곳으로, 안방에는 뒤편으로 골방이 달려 있어, 무더운 여름철이면 평상을 놓고, 그 위에서 시원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내밀한 장소이다. 



또 안방이나 건넌방에는 각각 벽장이 붙어 있고, 골방과 건넌방에는 다락이 있어, 한국 민가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전형적인 한국 고유의 대청마루가 있고, 안방 앞에서부터 건넌방 앞까지는 널찍하게 연결된 툇마루가 있다. 


건넌방은 안방을 사용하는 부인의 큰며느리가 거처하는 방으로, 뒤편에는 난간을 붙인 툇마루가 있어, 서별당으로의 통로를 이루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부엌으로 이씨가가 대가족으로 이뤄져 있음을 보여준다.  


동별당은 경농[1877~1938]이 건립했고 안채와 연결된 별당이다. 화강석 장대석 네겁대 쌓기 기단 위에 방형의 초석을 둔 겹처마 팔작기와지붕 형식의 구조물이다. 안채에 이어서 반침이 있는 방이 있고 이어서 대청, 방이 있다. 우측 방의 전면에 지금은 방이 한 칸 더 있으나 원래는 다락이 있었다고 한다. 대청 앞과 뒤에는 우물마루의 툇마루가 있어 방과 대청의 연결 통로로 이용하고 있다. 안채에 가까운 별당으로서 방문객들과 분리해 가족들과의 단란을 위하여 건축했다. 대청은 전면에 네 짝 분합문이 달려 있고 처마의 서까래 사이를 회바르기로 마감하지 않고 판재를 다듬어 멋을 내고 있다.



행랑채는 남.녀의 출입대문이 솟을대문과 평대문으로 각각 열화당과 안채 앞에 있고 곳간, 마구간, 행랑방, 부엌 등이 동별당 앞에서 열화당까지 ‘ㄴ’자로 연결돼 있다. 이곳은 일상용품인 약재, 공구 등의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만들어졌다. 행랑방의 앞에는 툇마루가 달려 있고 처마의 서까래 사이를 회바르기로 마감하지 않고 판재를 다듬어 멋을 내고 있다.


강릉 선교장은 1967년 4월 20일에 국가민속문화재 제5호로 지정됐고, 지난해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돼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됐다.


조선후기 상류 주택의 대표적인 자료로서 전통 한옥의 변천 과정과 주택 변화의 흐름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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