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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94] 사암 천만리를 모신 남원 '환봉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9-30 22:05:58
  • 수정 2022-09-30 22:5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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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환봉 서원(環峰書院)은 1898년에 묘역을 정비하고 신도비를 세웠고 2003년에 준공했다. 중국 영양(穎陽) 천 씨 중시조인 천만리(千萬里), 아들 천상(天祥)과 천희(天禧)를 모시고 있다.


전학 후묘(前學後廟) 형식이고, 건물은 강당(講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사당인 환봉사(環峰祠), 관리사(管理舍), 내삼문(內三門), 외삼문인 충효문(忠孝門), 신도비(神道碑) 등이 있다.



조선시대 명나라의 조병영량사로 임진왜란 당시 원병으로 참전한 무신으로, 본관은 중국 영양(穎陽). 자는 원지(遠之). 호는 사암(思庵). 명나라에서 귀화했다. 


시조 천암(千巖, 1350~?)이 서촉(西蜀) 종북산(終北山) 천고봉(千古峰) 만인암(萬仞巖) 밑에 살았다 해 성을 천씨로 했다. 아버지는 천종악(千鐘嶽)이고, 어머니는 병부시랑 전탁(錢鐸)의 딸이다. 9세에 외삼촌 전촌 전륜(錢倫)에게 의탁돼 공부했다. 1571년 무과에 급제해 1575년에 총절사(總節使)가 돼 몽고군을 격퇴했다. 







그 공으로 내직인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가 됐으나 남의 참소를 입어 양릉(陽陵)에 귀양살이를 했다. 귀양에서 풀려나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 때 조병영량사(調兵領糧使)로서 아들 천상(千祥)과 함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왔다. 평양 전투를 비롯해 곽산.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전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나자 1600년(선조 33) 8월 만세덕(萬世德).이승훈(李承勛)은 귀국했으나 그는 따라가지 않고 조선에 머물러 살았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생각해 그를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전(田) 30결(結)을 급복(給復)했고 그의 아들 천상도 뒤에 한성윤에 승진시켰다.




저서로 시 44수와 문 2편이 '사암천문집'에 전한다. 고성의 호암사(虎巖祠), 청도의 황강사(皇岡祠)에 제향됐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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