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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06] 정이오를 기리기 위한 서원, 창원 '구암서원지'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0-03 08:57:30
  • 수정 2022-10-03 10:4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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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정이오(鄭以吾,1347~1434)와 그의 아들 정분(鄭本,?~1454)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본래 1858년(철종 9)에 창건된 구연사(龜淵祠)라는 사당이었는데, 1864년(고종 1)에 서원으로 승격했다. 서원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으나, 서원 자리에 1920년에 후손들이 복원한 구연사가 남아있다.


정이오의 본관은 진주,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이다. 아버지는 정신중(鄭臣重)이고, 아들은 정분(鄭苯)이다.


정이오(鄭以吾)[1347~1434]는 문과에 급제해 1376년에 예문관 검열이 되고, 공조와 예조의 정랑, 전교부령 등을 역임했다. 1394년(태조 3)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됐고, 이첨(李詹)·조용(趙庸) 등과 함께 군왕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리고, 곧 봉상시 소경(奉常寺少卿)이 됐다. 1398년 조준(趙浚)·하륜(河崙) 등과 함께 '사서 절요(四書節要)'를 찬진(撰進)했다.


1400년(정종 2)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이 됐고, 병조 의랑(兵曹議郎), 예문관 직제학, 예문관 사성을 역임했다. 1403년(태종 3) 대사성으로 승진했고, 1405년 3월에 김과(金科)와 함께 생원시를 관장했다. 1409년 병서 습독 제조(兵書習讀提調)를 거쳐 동지춘추관사를 겸임,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13년 '태조실록' 편찬에 대한 노고로 예문관 대제학이 되면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1418년 72세로 치사(致仕)했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가 돼 진주 각처를 다녔고, 속현인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했다.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젊어서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의 문인과 교유했고 늙어서는 성석린(成石璘)·이행(李行) 등과 교유했다. 특히 정이오는 시(詩)에 재능이 뛰어났다 한다. 영의정에 추증됐다. 조선 태종의 명으로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413년에 예문관 대제학과 지공거를 겸했고, 세종 때에 성균관 대제학과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다.


저술로는 '교은집' '화약고기(火藥庫記)' 등이 있다.


묘는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에 있고, 1997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159호로 지정됐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있는 구암 서원에 배향됐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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