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서원 107] 노경종을 배향한 '첨두 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0-03 16:40:50
  • 수정 2022-10-03 17:04:01

기사수정

사진/윤정숙 기자

[이승준 기자] 첨두 서원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공을 세워 선무 원종 이등 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된 노경종(盧景宗)을 추모해 교하 노씨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로 1981년 향교 유림에 의해 서원으로 승격됐다. 


서원으로 승격된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 1731년에 서원으로 건립됐다가 고종 시기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쇄됐고, 1947년 복원 이후 1950년에 소실됐다가 1955년에 재건됐고 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첨두재로 건립됐다가 1981년 유림의 공의를 얻어 서원으로 승격됐다는 기록도 있다.



최근에 발행한 '첨두 서원지(瞻斗書院誌)'의 중건기에 의하면 근자에 서원으로 승격했다고 해 서원으로 승격된 것이 근래임을 내비쳤고, 같은 책자의 ‘교하 노씨 양현 세덕비명(交河盧氏兩賢世德碑銘)’에서는 서원을 지은 뒤 난리와 훼철령으로 헐었다 다시 지었다고 해 철폐령 이전에 건립됐음을 시사했다. 


첨두 서원은 6.25 때 소실돼 두 차례 중건했고, 최근에는 도시 계획에 따른 토지 문제로 2001년에 신축했다. 이때 백산재(白山齋)에서 채례를 지내던 노정직(盧廷直)을 주향으로 삼고, 노경종을 배향했다.



노경종의 자는 효성(孝誠), 호는 명암(明庵)이고 1555년 창원에서 태어났다. 노경종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초계성을 지키면서 크게 전공을 세워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올랐다. 


정유년에 왜군이 재침하자 이때도 역시 왜적을 소탕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1603년에 특설 무과에 합격해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龍揚衛副護軍)에 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광해군 시기 영창 대군의 옥사 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초야로 내려와서 거처하는 집을 첨두헌(瞻斗軒)이라 이름 짓고 학문에 열중했다. 



‘첨두’라는 이름은 대개 밝은 낮이라도 북두를 바라볼 때에 공북(拱北)의 정성을 잊지 않으려는 공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정문의 편액을 ‘공북문(拱北門)’이라 한 것도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1625년 노경종이 세상을 떠난 후 사림과 자손들이 이 집을 서당으로 이용해 학문 연구의 장으로 삼음과 동시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노산사(盧山祠)와 재실인 첨두재(瞻斗齋)를 세웠다. 해방 후 다시 서원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첨두 서원은 1731년에 창건됐다가 대원군 집권 시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쇄됐다. 해방 후 1947년에 복원됐다가 1950년 6.25 중에 소실됏고, 그 후 중건했고, 2001년에 신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첨두 서원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 건물로 팔작지붕의 구조이다. 첨두서원의 강당 서쪽에 사우가 배치된 이른바 서묘동학의 구조이다.


첨두 서원 정면에 ‘첨두 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서쪽에 사우인 노산사와 내삼문인 집의문(執義門)이 있다. 동쪽에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첨두재가 있다. 마당에는 교하 노씨 양현 세덕비(交河盧氏兩賢世德碑)가 있다./사진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