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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08] 칠원 윤씨 선영, 함안 '홍포 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0-03 17:03:19
  • 수정 2022-10-03 17: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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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홍포 서원(鴻浦書院)은 칠원 윤씨윤환(尹桓)[?~1387], 윤자당(尹子堂)[?~1422], 윤지(尹志), 윤석보(尹碩輔)[?~1505], 윤탁연(尹卓然)[1538~1594] 등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윤환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다섯 임금을 섬겼고, 칠원백(漆原伯)에 봉해졌고, 윤환은 칠원의 유동(柳洞)에 은거할 때 큰 기근이 들자 가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했다. 윤자당은 이방원(李芳遠)의 최측근으로 조선 건국을 도왔고, 박포(朴苞)의 난을 토평(討平)하고 이후에 칠원 부원군(漆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윤지는 세종(世宗) 때 집현전(集賢殿)에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술할 때 서사(書寫)를 맡았다. 문종(文宗)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됐고,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자 사직했다.






윤석보는 여러 관직을 엮임했다. 1480년(성종 11)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됐고, 1504년(연산군 10) 대사간(大司諫)이 됐고, 연산군(燕山君)에게 충언하다 강음(江陰)에 유배돼 이듬해 죽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성공하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됐다. 직언과 청렴한 생활로 1506년에는 염근리(廉謹吏)에, 선조(宣祖) 때는 청백리에 녹선됐다. 



윤탁연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5년(명종 20)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됐다.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582년(선조 15)에 영남에 큰 흉년이 들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특채됐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함경도 순찰사(咸鏡道巡察使)가 돼 의병을 모집하고 시국을 타개키 위해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객사했다.


홍포 서원은 칠원 윤씨윤환, 윤자당, 윤지, 윤석보, 윤탁연 등을 배향키 위해 건립됐다.




홍포 서원은 1782년(정조 6) 건립됐다. 1857년(철종 8)에 개수(改修)됐으나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훼철됐다. 1873년(고종 10) 옛터에 사림들이 유허비를 세웠고, 유허비문은 당시 통정대부(通政大夫) 안동김연한 공이 지었다. 1974년에 홍포 서원이 복설(復設)됐고, 1980년 7월에 현재의 위치인 계내리 수곡상포재(上浦齋) 앞에 홍포 서원을 중건했다.


향사일은 매년 3월 하정(下丁)이고, 칠원 윤씨(漆原尹氏)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사당 영역과 강학 공간이 따로 분리돼 있다. 사당 영역에는 사당과 삼문이 있고, 강당 영역에는 외삼문과 강당, 기타 건물 1동으로 구성돼 있다. 사당 앞에는 비석이 1기 있다. 사당 영역 옆에는 재실과는 별도의 출입문이 있고, 강당의 외삼문 앞에는 재실 방향으로 홍살문이 서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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