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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24]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 ‘덕수궁(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06 10:06:57
  • 수정 2024-04-15 17: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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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전경 [박광준 기자] 덕수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돼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됐다. 이후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 다시 바꾸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해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세워졌다.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됐던 장소로,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으로 지정됐다.


공사할 당시 중층이었던 원래의 중화전. 경운궁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중층 중화전이 지어져 있으므로 1902년경에 찍혔을 사진이다./자료사진덕수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됐다.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죽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 같은 해 창덕궁이 완성되면서 광해군은 이곳을 떠났고,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줬다.


조선 후기에 덕수궁은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킨 일이 있고,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동아시아 제후국 궁궐관제인 3문 3조에 맞춰져 지었던 조원문. 대한문 바로 뒤에 있는 금천교 다음의 문으로 중화전 회랑 바로 바깥에 있었다./자료사진

고종 말년 조선 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기자,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됐다. 1897년(광무 1)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를 전후해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고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했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도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광무 8)에 궁에 큰불이 나서 전각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으나, 곧 복구에 착수해 다음 해인 1905년(광무 9)에 즉조당(卽阼堂)를 비롯해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준명전(浚明殿), 흠문각(欽文閣),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됐고, 중화문(中和門), 조원문(朝元門) 등이 세워졌다. 이후 1906년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됐다. 이후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됐고 궁의 정문이 됐다.


대한문은 현재 공사중(大漢 : 한양이 창대해진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줬고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문다.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910년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됐다.


한편,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897년(광무 1)에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년(융희 1)까지 거처했고, 1904년(광무 8)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 홍씨(明憲太后洪氏)가 인수당에서 별세했고, 황태자비 민씨(閔氏)도 석어당에서 별세했다. 1907년(융희 1)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했고, 고종의 순헌귀비 엄씨(純憲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했다. 고종은 1907년 왕위를 물려주고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했다.


중화전(中和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이와 같이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고, 궁내의 각 건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활용됐다.


그 뒤 별다른 사건을 겪지 않다가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됐고,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이 자리에 들어오면서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됐다.


중화문석조전은 6.25전쟁 중에 내부가 불탔다. 이후 덕수궁은 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됐고, 석조전은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됐다.


덕수궁은 당초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가(私家)이던 것을 선조 때 임시로 왕이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이 된 것인 만큼, 궁이 자리잡은 위치나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함녕전(咸寧 : 모두가 평안하다) 

그 위치는 한성부(漢城府)의 서부 황화방(皇華坊)과 정릉동(貞陵洞)일대로 이곳은 원래 태조의 계비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으로, 능은 태종 때 옮겨지고 그 자리에 월산대군의 집이 지어졌던 것이다.


이곳은 도성 내의 주요 가로와도 직접 면해 있지 않은 곳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은 궁이 있는 곳으로는 여겨지지 않던 것으로 보인다. 덕수궁은 결국 고종 말년에 왕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갑자기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췄고, 건물의 배치도 이때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됐다.


즉조당(卽阼 : 즉위(卽位)) 

현재의 상태에서 그 위치를 알아보면, 궁의 서쪽은 미국대사관 남쪽 길을 따라 러시아공관이 있던 언덕 일대와 신문로 일대에 해당되고, 북쪽은 영국대사관을 거쳐 성공회(聖公會) 앞길을 따라 덕수초등학교 담 위쪽을 지나 신문로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 이 자리에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로 영국, 미국, 러시아의 공관 터를 내주면서 궁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서양식 건물이 지어지고 도로가 생기게 됐다.


건물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정전과 침전(寢殿)이 있는 부분, 선원전(璿源殿)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重眀殿)이 있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궁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해 있고 정남쪽에 중화문, 그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등이 있었다.


준명당(浚明 : 다스려 밝힌다) 정전의 뒤편에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다. 이 두 건물은 고종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건물들이다.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녕전이 있고 함녕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 동북쪽에 수인당(壽仁堂), 동쪽에 영복당(永福堂)이 있었다. 중화전의 서북쪽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고 관명전(觀明殿).보문각(寶文閣) 등이 중요한 것들이었다.


중화전은 처음 중층지붕의 장대한 규모로 세워져, 2층으로 조성된 월대(月臺)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1904년 화재 뒤 재건되면서 규모를 줄여 단층건물로 만들었다. 중화전 주변에는 사방에 행각이 세워져 있어 중화문에 연결돼 있었으나 이것도 철거됐다. 중화문 역시 당초는 중층건물이었으나 재건되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축소됐다.


석어당(昔御 : 옛날에 임어(臨御)하였다)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고, 익공형식(翼工形式)의 간결한 건물이다. 1985년 중화전 및 중화문과 함녕전이 보물로 지정됐다.


석어당은 궁내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본래 이 건물은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됐던 곳이고,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해 선조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1906년 재건된 건물이 지금 남아 있고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정관헌은 서양식 건물로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했다. 조적식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이다.


덕홍전(德弘 : 덕이 넓고 크다) 

평성문 밖 지금 미국대사관 서쪽에는 이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던 중명전이 있었고,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에 대해서는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이밖에 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는 구름다리가 가설돼 러시아공관 북쪽 언덕에서 큰 길을 건너 경희궁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지방법원이 있는 자리로도 이어졌다. 남쪽의 구름다리는 그 건너에 과거 의정부(議政府)가 옮겨와 있었기 때문에 궁과의 내왕을 편하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광명문(光明 : 밝음을 맞다) 

궁의 배치는 1904년 큰 화재가 있은 뒤로 변화됐고,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조화를 잃게 됐다. 특히 나중에 지어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은 기존의 정전 건물들과 축(軸)도 일치되지 않고 그 위치도 정전과 인접해 대규모로 지어지면서 종래의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렸다. 


화재 뒤 건물이 중건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의 변경이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정전의 정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1906년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그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쳐 이 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정관헌(靜觀 : 고요히 바라보다) 

이에 따라 궁으로의 진입은 동쪽 모퉁이에서 시작돼 서쪽을 보고 들어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꺾여 정전에 이르게 됐다. 대한문은 1968년 도시계획에 의해 덕수궁 담장이 안쪽으로 옮겨지면서 1970년에 안으로 옮겨졌다.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다. 이 가운데 돈덕전.석조전이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돈덕전은 평성문 밖 북쪽에 있었으나 철거됐고고, 그 남쪽 가까운 위치에 석조전이 세워졌다.


중명전(重眀 :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다)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건물로, 이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이웃한 궁의 정전과 주변의 한식 건물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건축구성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특히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의 본래의 모습이 상당히 파괴됐다.


덕수궁은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춰진 곳이기는 하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고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사진출처-덕수궁/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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