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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25]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 ‘덕수궁(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06 23:40:03
  • 수정 2024-04-15 17: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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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회에 이어


[박광준 기자]  # 덕수궁 양관


1897년∼1900년 사이에 행해진 중건 과정에서 수옥헌(漱玉軒: 뒤에 重眀殿으로 고침).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 등이 지어졌고, 1900년에서 1910년에 걸쳐 석조전(石造殿)이 지어졌다.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일본 및 서양세력의 진출로 인해 경운궁 부근인 정동일대에는 일찍부터 러시아.영국.일본.미국 등 열강의 영사관이 세워져 있었는데, 경운궁(慶雲宮)을 중건한 시기는 바로 이들 세력의 영향으로 왕조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돼가던 무렵이었다.


중명전 전경 


그 결과 경운궁 중건 당시 정통적인 궁실제도를 부분적으로 따르는 한편, 정전(正殿)이 있는 구역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지역에는 양관을 세웠다.


설계자들도 외국인들이었으므로 건축공사의 주도권이 그들에게 있었고, 전통적인 조영체제 및 기술과의 접맥 없이 그대로 이식됐기 때문에, 한국건축사상 근대를 열지 못하고 피상적인 수용에 그쳤다.


현재 덕수궁 안에는 석조전과 정관헌이 남아 있고, 궁 밖 서쪽 미국영사관 옆에 있는 중명전은 개인 소유였으나 2007년 문화재청이 매입해 덕수궁에 편입됐다.


석조전은 현재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사용하고 있고, 규모가 정면 17칸(54.2m), 측면 10칸(31m)인 3층 석조건축으로서, 기단부인 1층은 시중인들의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및 담화실 등으로 설계됐다.


중명전 내부높은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리스(Doris)식 오더(order: 지붕과 기둥을 기본단위로 한 형식)로 열주랑(列柱廊)을 구성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 튀어나온 현관을 만들고 거기에 각각 박공(牔栱: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을 두었다. 이는 건물 앞의 정원과 함께 18세기 유럽의 궁전건축을 모방한 것으로, 신고전주의양식건축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순수 석조로 된 유일한 건물로서 의의가 있다. 설계자는 영국인 하딩(Harding,G.R.)이다.


한편, 정관헌은 함녕전(咸寧殿)의 북서쪽 언덕에 자리잡은 연유(宴遊) 장소로서, 전통적 요소와 서양식 요소를 절충한 특이한 건물로 설계됐다.


즉,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다음 바깥두리기둥으로는 처마를 받치고, 안두리기둥으로는 천장을 받쳤고, 지붕은 안두리기둥이 받친 부분에만 팔작지붕을 씌우고 바깥두리기둥이 받치고 있는 부분은 지붕을 덧달아 내어 퇴를 구성하고 있다.


구리로 만든 난간을 기단의 동.서.남면에 두르고 사방에 계단을 뒀다. 이 가운데 북쪽 계단은 벽돌로 둘러 막은 내실로 통한다.


중명전 내부 난간동자기둥 위에다 나무를 깎아 코린트식 오더를 기둥머리까지만 만들어 세웠으며, 이 위에는 네모난 나무기둥을 세우되, 그 표면에는 꽃을 꽂은 꽃병을 새기고 채색하고 식물무늬를 투각하여 장식적으로 꾸미고 있다.


안쪽의 독립기둥은 기둥 밑에서 기둥머리까지를 한 개의 돌로 만들되, 둔중한 느낌을 주는 기둥머리를 로마네스크식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서양식 석조건축을 융합한 건물들로서 근대 서양건축 도입을 보여 주는 건축으로서 주목된다.


# 덕수궁 즉조당


덕수궁(德壽宮)에 있는 전각이며 임금이 침전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16세기 말엽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몽진했던 선조(宣祖)가 한양으로 돌아온다. 경복궁(慶福宮)과 창덕궁(昌德宮)이 화재로 소실돼 머물 곳이 없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살았던 집에 거처를 마련한다. 이곳이 훗날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확장된다. 




광해군(光海君)이 이 자리에서 즉위했고, 창덕궁이 완공돼 이궁할 때까지 즉조당(卽阼堂)에서 머물렀다. 즉조당에서 인조(仁祖)가 등극했고, '즉조당'이라는 명칭은 이때부터 사용됐다. 훗날 고종이 경운궁으로 이궁하여 정전(政殿)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소실됐다가 이듬해인 1905년 복원됐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고, 좌측에 있는 준명당(浚眀堂)과 회랑으로 연결돼 있다.


# 덕수궁 덕홍전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의 동북쪽, 침전인 함녕전(咸寧殿)의 서쪽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고종황제의 비인 명성황후의 혼전(魂殿)이었는데, 뒤에 편전으로 사용됐다.



지금의 덕홍전 자리에는 원래 경소전(景昭殿)이 위치했다. 1896년(건양 1)에 고종황제는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했다. 이 때 경운궁(慶運宮)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경복궁 태원전(泰元殿)에 모신 명성황후의 시신을 모실 빈전(殯殿)과 신주를 봉안할 혼전으로 사용키 건립했다. 곧 9월 4일에 명성황후의 시신을 경소전으로 옮겼고, 1897년 11월 21일에 명성황후의 국장을 지낸 뒤에는 경효전(景孝殿)이라고 부르면서 혼전으로 삼았다.


1904년(광무 8)에 경운궁에 큰 불이 일어나 불에 타고 말았는데, 명성황후의 신주는 준명전(濬明殿)의 서쪽 행각에 임시로 모셨고, 그 뒤에는 중명전(重眀殿)의 주변에 자리한 수풍당(綏豐堂)으로 옮겨 봉안했다. 


이후에 경소전 터에 이전과 같은 규모의 건물을 다시 건립했고, 1905년에 을사늑약의 체결로 인해 고종황제가 여전히 중명전에 머물렀기에 신주를 다시 옮기지는 못했다. 고종황제가 함녕전으로 돌아온 뒤에도 신주는 여전히 수봉당에 봉안됐다. 1912년에 고종황제의 알현실로 고쳐 짓고서 덕홍전이라고 불렀다.



'매일신보' 1912년 9월 10일자에는 덕홍전은 고종황제의 알현실이었던 창덕궁 인정전을 따라 지었는데, 이미 낙성해 6일 밤부터 불을 밝혔다고 하면서, 공사비는 6만 여 원이 들었고, 실내 장식이나 다른 것도 매우 화려한데 큰 벽화는 화백 천초신래자(天草神來子)가 그린 걸작이라고 설명했다. 이 공사를 진행하면서 이안청(移安廳), 중배설청(中排設廳), 어재실(御齋室) 등 혼전과 관련된 제례 시설은 모두 철거됐고, 대신에 고종황제를 보필하는 이왕직 청사(李王職廳舍)를 비롯해 찬시실(贊侍室), 귀빈실 등을 만들었다. 한편 고종황제가 쉽게 덕홍전을 드나들도록 함녕전까지 복도를 놓았다고 한다. 현재 주변의 다른 건물은 모두 없어졌지만 복도의 흔적만은 남아 있다.


#덕수궁 광명문

 

덕수궁 함녕전의 정문으로, 1930년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덕수궁의 남서쪽 구석으로 이전된 후 문화재 보관 장소로 변했다. 이에 문화재청은 덕수궁 광명문을 본래 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을 진행해 일제에 의해 왜곡된 지 80여 년 만인 2018년 12월 공사를 마쳤다.


왕의 침전인 덕수궁 함녕전의 정문으로 본래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겹처마와 팔작지붕을 갖췄다. 1904년 덕수궁(당시 경운궁)에 큰 화재가 발생해 함녕전이 소실됐지만 광명문은 불에 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중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석조전 서관을 증축해 이왕가미술관을 개관하면서 광명문은 덕수궁의 남서쪽 구석으로 위치로 옮겼고, 광명문 내부에 물시계인 자격루(국보)와 흥천사명 동종(보물), 신기전을 전시하면서 문의 역할을 상실한 채 유물이 놓여 있는 야외 전시관으로 변했다.


덕수궁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안에 보루각자격루, 흥천사명 동종, 신기전 화차가 전시돼있다. 자격루와 신기전은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옮겨졌고 흥천사명 동종은 경복궁 궐내각사지의 임시처리장으로 이전해 보존 처리한다.2016년 함녕전 남쪽 구역 발굴조사에서 광명문과 동일한 배치 및 평면 형태를 가진 건물지 1동을 확인하면서 문화재청은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이전키로 했다. 이에 문화재청은 2018년 6월 19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기공식을 열고 같은 해 12월 광명문 이전을 완료했다. 이어 2019년 3월 1일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준공 행사를 열면서 일제에 의해 왜곡됐던 광명문이 80여 년 만에 제자리를 찾게 됐다.


한편, 광명문 내부에 있었던 자격루와 신기전은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옮겨졌고 흥천사명 동종은 경복궁 궐내각사지의 임시처리장으로 이전해 보존 처리한다.


# 덕수궁 정관헌


1900년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외교사절단을 맞아 연회를 여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키 위해 덕수궁 안에 지은 회랑 건축물이다. 궁 내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됐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고, 정면과 좌.우측 발코니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벽면이 다양하게 장식돼 있는 등 화려하고 이색적인 모습이다.



다양한 건축재를 사용해 지은 건축물로 서양풍의 건축 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 요소가 가미된 독특한 모습이다. 한때 태조.고종.순종의 영정과 어진을 모시기도 한 곳이다. '정관헌'이란 솔밭과 어우러진 함녕전(咸寧殿) 등의 고 건축물을 고요하게(靜) 내다보는(觀) 곳이라는 뜻이다. 


2004년 2월 등록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됐으나, 사적 제167호 덕수궁(현재 사적 124호)과 지정범위가 중복돼 2008년 6월 지정 해제됐다.


# 덕수궁 대한문(현재 대한문 월대공사 관계로 자료사진 게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왔을 당시, 궁궐이 모두 불타버려서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거처하게 된 것이 덕수궁의 시초이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 이라 했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네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의 건물이다.


덕수궁은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을 짓기 전에는 임시로 즉조당(卽祚堂)을 정전으로 사용하고, 3문(門)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인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명례궁(明禮宮)을 옛 이름인 경운궁(慶運宮)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2년(광무 6) 들어 궁궐을 크게 중건하면서 정전인 중화전.중화문.외삼문(外三門)인 조원문(朝元門)을 세워 법전(法殿: 임금이 백관의 경축일 하례를 받는 정전)의 체제를 갖췄다. 



얼마 뒤 인화문 자리에는 건극문(建極門)을 세우고 조원문 앞 동쪽에 대한문의 전신인 대안문(大安門)을 세워 새로 정문으로 삼았다. 1904년(광무 8) 함녕전(咸寧殿)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자 1904년에서 1906년(광무 10)에 걸쳐 이를 다시 중건했고,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수리하면서 겹처마에 단청을 했고 지붕마루에 양성(兩城)을 하고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얹었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1914년 도로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문 오른쪽에 있던 건물 및 담장이 모두 일제에 의해 크게 파괴됐고, 이때 대한문도 궁 안쪽으로 옮겨졌다. 또한 1970년에도 도시계획으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 앞에는 돌짐승을 배치한 계단을 두어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갖췄으나, 지금은 계단 및 기단이 아스팔트 속에 묻혀 버린 채 돌짐승만이 땅 위로 드러나 있다.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이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다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연결해 짜 맞추고 그 위에 평방을 놓았다. 기둥 위와 기둥 사이 평방 위에 촘촘하게 공포(栱包)를 배열했는데 공포의 짜임새는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이고, 바깥쪽 제공(諸工) 위에 놓인 살미첨차(山彌檐遮)들은 그 끝이 가냘픈 앙서(仰舌)로 돼 있고, 안쪽의 공포에는 판형 부재 끝에 구름모양(雲峰)을 조각했다.



가구(架構)를 보면, 기둥 3줄에 모두 평주(平柱)를 세우되 가운데 줄에 있는 평주 위에 보를 연결하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운 다음, 이 위에 종보[宗樑]를 걸었다. 다시 이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장은 가운데 칸은 서까래를 드러낸 연등천장으로, 양옆 칸은 소란반자로 마감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와 추녀마루를 양성하고 용마루 끝에 취두(鷲頭: 매 머리모양의 장식), 추녀마루에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놓았다. 제자리에서 옮겨지면서 변형되고, 여러 차례의 보수로 인해여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 덕수궁 함녕전


1985년 보물로 지정됐다. 덕수궁 함녕전은 1897년(광무 1)에 고종이 머물렀던 침전으로 세워졌고, 1904년(광무 8)에 화재로 불에 타서 그해 다시 지은 건물로, 순종에게 선위를 물려준 고종이 1919년 1월 22일 승하하신 곳이다.


함녕전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하던 공간으로, 1897년(광무 1)에 건축돼 1904년(광무 8) 화재로 소실됐으나 같은해 12월에 중건됐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은 이곳에서 사망했다.



이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고, 평면은 ㄱ자형으로 돼 있다. 그 중심이 되는 방의 평면은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과 마찬가지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이 좌우에 온돌방과 또 그 옆으로 누마루를 뒀고, 이들 전면과 후면에는 툇마루와 온돌방을 뒀다. 이러한 평면의 모양은 궁궐의 정침(正寢)이 가지는 공통된 것이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귀접이와 쌍사밀이를 한 방주(方柱)를 세웠다. 기둥 윗몸은 모를 둥글게 죽인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고, 기둥 위에는 운두가 낮은 주두(柱枓)를 놓고, 기둥 윗몸으로부터 초각(草刻)된 부재를 놓아 끝머리가 초각된 보머리[樑頭]를 받치게 한 몰익공식의 건축이다.



보머리 안쪽 보 밑은 초각된 보아지로 받치고 있다. 단면이 둥근 굴도리 밑에는 장여를 놓고, 이 장여를 창방 위에 놓은 소로[小累]들이 받치고 있다.


가구(架構)는 내진(內陳)에서는 고주(高柱)와 앞뒤 평주(平柱) 사이에 퇴보[退樑]를 걸고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건 뒤,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樑]를 받치고 있다. 또 종보 밑에는 우물천장을 해 천장 속을 가리고 있다.


함녕전의 우물천장사면 모든 칸에는 벽체를 치지 않고, 우물 정(井) 자살창과 교창을 달았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으로 장식했다.


이 전각의 온돌방에 딸린 굴뚝[煙堗]은 전각 뒤편 석단(石段)을 쌓은 곳에 검은 벽돌로 쌓고, 상부는 기와지붕을 하고 연가(煙家: 굴뚝 위에 얹은 지붕모양의 물건)를 얹어, 연가의 창구멍으로 연기를 뿜게 돼 있다.


# 덕수궁 준명당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로,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많은 건물을 중건했던 1897년에 새로 지었다.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이 나 타 버린 뒤에 즉조당(卽阼堂)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



이 건물의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았고,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모양 평면을 이루고 있다.


왼쪽으로부터 2.3.4번째 칸은 대청으로 통하는 현관으로 개방했고, 대청은 침전에서 흔히 쓰는 3칸대청이 아닌 2칸대청이다. 대청 오른쪽에 온돌방을 두고 다시 그 옆 한 칸은 누마루로 구성해 즉조당의 누마루와 구성상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다. 기둥 위는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고 주두(柱枓 : 대접받침)를 놓아 보머리[樑頭]를 받치고 있다. 또, 끝이 둥글게 된 보머리 밑에는 기둥 윗몸으로부터 초각(草刻)된 부재를 내어 이를 받치고 있는 초익공식을 이루고 있다.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소로[小累]들을 놓아 굴도리로 된 주심도리(柱心道里) 밑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지 않고, 용두(龍頭)를 놓아 장식하고 있다.


앞과 뒤의 대청 툇간(退間)에는 띠살창호를 달고 위쪽에 빗살로 된 교창(交窓)을 달았으나, 온돌방과 이를 둘러싼 툇간에는 井자살로 된 창호들을 달았다. 또, 온돌방에 딸린 굴뚝[煙堗]은 뒤편에 따로 검은 벽돌로 쌓고 위에 연가(煙家)를 놓아 장식하고 있다.



종래 화재가 난 뒤 경효전(景孝殿)과 흠문각(欽文閣)에 모셔져 있던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을 준명전(濬明殿)과 그 서행각(西行閣)에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준명당은 불타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해왔다.


그러나 이는 준명전과 준명당을 같은 건물로 착각한 데서 온 잘못된 판단이고,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를 보면 현재의 준명당은 1904년에 중건된 것임이 분명하다.


중건 이전의 준명당은 1897년에 지은 건물이고, 즉조당은 조선 중기의 건물이므로 두 건물은 서로 다른 건축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중건되면서 새롭게 전체로서 구성됐기 때문에 평면구성을 제외한 구조.색채·형태 등에서 통일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후원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거기에 벽돌로 쌓아 만든 굴뚝이 남아 있어 당시의 후원 조경방법을 일부나마 전해 주고 있다.


# 덕수궁 석조전




동관의 기본 설계는 영국인 J.R.하딩(John Reginald Harding),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했고, 1900년(광무 4)에 착공해 1910년(융희 3)에 완공했다. 지층을 포함한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이고, 지층은 거실, 1층은 접견실 및 홀,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서재 등으로 사용됐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석조전의 기둥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당시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이곳에서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고, 6.25전쟁 이후 1972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됐다. 1992~2004년에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이전했고, 복원 이후 2014년 10월 13일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서관은 1937년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지은 건물로 8.15광복 후 동관의 부속건물로 사용됐다.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 1998년 12월에 개관돼 덕수궁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 덕수궁 석어당



1904년(광무 8) 화재로 원래의 건물은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그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1층 정면 8칸, 측면 3칸, 2층 정면 6칸, 측면 1칸, 중층 팔작지붕 익공(翼工)집이다. 정면에서 보면 8칸 중 가운데 있는 2칸은 툇마루를 깔고 뒷면 역시 쪽마루를 달아냈다. 



기둥은 모두 각주(角柱)를 썼고 두공(枓栱)은 간결한 익공이다. 상층은 퇴량(退樑)과 대량(大樑) 위에 올려 세운 각주로 구성되고 우물마루를 깔았다. 처마는 상하층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에는 망와(望瓦) 외에는 아무 장식도 없다. 이 건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중층건물이고, 궁전건축이지만 권위주의적인 형식을 벗어나 순수한 재래식 민간건물의 성격을 띠고 있다.


# 금천교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와 마찬가지로 덕수궁에도 명당수를 끌어들어 금천(禁川)을 파고 돌다리를 설치했다.


덕수궁 또한 명당수를 끌어들여 금천을 파고 금천교를 설치했지만 지금은 웅덩이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덕수궁의 금천교는 두 개의 홍예(虹霓)를 틀었고 금천교 바닥은 삼도(三道)를 뒀다. 삼도의 가운데는 좌우면보다 한 단 높고 넓찍한 어도(御道)를 둬 위계를 높였다.


한편 덕수궁 금천교는 대한문이 원래 위치보다 14미터 가량 뒤로 물러남에 따라 지금처럼 대한문과 바로 이어서 붙어있게 됐다.


#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1985년 보물로 지정됐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서북으로 피난하던 선조가 환도해 이곳에서 정무를 봄에 따라 행궁의 역할을 하게 됐다. 이후 1611년(광해군 3)에 경운궁(慶運宮)이란 정식 명칭이 붙여졌다.



경운궁의 정전으로 초기에는 즉조당(卽祚堂)이 사용됐는데 1897년에 이 전각의 이름을 태극전(太極殿)이라 고쳤다. 대한제국의 선포로 왕은 황제가 돼 여기에서 하례(賀禮)를 받았고 다음 해 2월 다시 전각 이름을 태극전에서 중화전으로 바꾸었다. 그 후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인 1902년(광무 6)에 즉조당 앞에 새로운 중층의 법전(法殿)을 지어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인정전에 비견될 만큼의 격식을 갖췄으나, 1904년(광무 8) 경운궁의 대화재 때 소실돼 다시 중건된 것이 현재 남아있는 단층의 중화전이다.



중화전의 평면은 인정전과 비슷한 정면 5칸(61.4척), 측면 4칸(58척)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고, 넓은 이중의 월대 위에 높직한 초석을 놓아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월대에는 석계가 마련돼 있고, 석계 한가운데에 답도를 놓아 쌍용을 새겨놓았고, 각 층마다 석계 모서리에는 석수를 조각해 놓았다. 고주와 창방에는 낙양각(落陽刻)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했고, 건물 내.외부 사이의 기둥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언제나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의 다포식 구성을 하고 있고, 중화전에서 사용된 공포 형태는 외부에 쇠서를 달고 있는 운기당초문으로, 이것은 초각형에 속한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후기 다포의 변화에서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모습으로 특히 궁궐건축에서 주로 사용됐다.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어놓고 토수(吐首)를 끼웠다. 단청은 은은한 채색의 모루단청이고 광창과 꽃살분합문을 달아 위관(偉觀)을 돋우었다. 건물의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두 마리를 조각으로 장식해 건물의 위상을 높였다.



중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구성됐는데, 건축양식은 중화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문의 양 측면에는 남회랑(南回廊: 행각(行閣))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실돼 동쪽 모서리 부분만 일부 남아있을 뿐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다.


중화문은 단층의 삼문으로 세벌대의 기단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두, 잡상 등을 얹었다. 석대 앞의 석계는 3등분됐는데 중앙부 좌우에만 석수(石獸)를 두고, 답도(踏道)에는 쌍용문(雙龍紋)이 새겨져 있다. 평면 크기에 비해 기둥 높이가 높아 다른 문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비례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938년에 일본이 덕수궁 석조전 서관을 미술관 용도로 건립했던 것을 1946년 해방 이후, 이왕가 미술관은 덕수궁미술관으로, 총독부박물관은 국립박물관으로 개관했다. 1969년 경복궁에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이 1973년 덕수궁미술관으로 이전했고, 1986년 과천관으로 본관을 옮긴 이후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으로 재개관했다.


넓이는 3,428㎡로, 4개의 전시실과 휴게공간, 아트숍 등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나라 근대미술발전의 터전이 되었던 곳으로 다양한 기획전과 소장품 전시회를 비롯해 조사.연구.출판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시민들을 위한 작품설명회, 강연회, 교육프로그램 등도 실시하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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