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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12] 조선시대 중종의 후궁 '창빈안씨'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15 19:27:44
  • 수정 2024-04-10 10: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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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창빈안씨(昌嬪安氏, 1499년∼1549)의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1507년(중종 2) 궁녀로 입궐했다가, 후에 중종의 후궁이 됐다. 차남 덕흥군(德興君)의 3자 하성군(河城君)이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이다.


아버지는 안탄대(安坦大)이고, 어머니는 황씨(黃氏)이다. 아버지 안탄대는 중종반정의 원종공신으로 적순부위(迪順副尉)의 관직을 받았고, 후에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됐고, 어머니도 정경부인에 추증됐다.


1507년(중종 2) 궁녀로 입궐했고, 1518년(중종 13) 후궁이 됐다. 1521년(중종 16) 장남 영양군(永陽君) 이거(李岠)를 낳았고, 차남 이이수(李頤壽)는 일찍 사망했다. 1526년(중종 21) 정신옹주(靜愼翁主)를 낳았고, 1530년(중종 25) 3남 덕흥군 이초(李岹)를 낳았다. 1549년(명종 4) 사제(私第)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향년 51세였다.



9세에 궁녀로 입궁해 대비전(大妃殿)에서 중종의 어머니인 왕대비 정현왕후(貞顯王后)를 모셨다. 이때 정현왕후에게 품성을 인정받아 중종의 승은(承恩)을 입었다. 20세였던 1518년(중종 13) 후궁이 됐고, 22세가 된 1520년(중종 15) 상궁(尙宮)이 됐다.


영양군과 정신옹주를 낳은 후 31세였던 1529년(중종 24)에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의 지위에 오르게 됐다. 같은 해 3월 왕비였던 문정왕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창덕궁에서 친잠례(親蠶禮)를 할 때 함께 의식에 참석했다. 이듬해 1530년(중종 25) 32세의 나이로 덕흥군을 낳았다. 그가 선조의 아버지이다. 1543년(중종 35)에 종3품 숙용(淑容)이 됐고, 이후 정3품 소용(昭容)의 지위에 올랐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승하하고 3년 상을 치른 후에 궁궐에서 물러나려고 했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배려로 계속 궁궐에서 살았다.


창빈안씨는 성품이 단정하고 온화해 왕대비.왕비의 인정과 신뢰를 받았다. 특히 창빈안씨가 사망한 후에 문정왕후가 그녀의 자녀들을 돌보아주었을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돈독했다.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은 덕흥군의 아들들과도 관계가 돈독해 이것이 훗날 하성군이 즉위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1549년(명종 4) 사망한 이후, 그녀는 소용의 지위에서 1577년(선조 10)에 정1품 창빈(昌嬪)으로 추봉됐다. 장남 영양군에게 후손이 없자, 창빈안씨의 신주를 덕흥대원군의 사당으로 옮기도록 했고,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에게 봉사(奉祀) 토록 했다. 1681년(숙종 7)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의 상소로 창빈의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웠다.


묘소는 원래 경기도 양주군 장흥리에 있었으나, 장소가 좋지 않다고 해 과천의 동작리(현재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국립묘지 내에 있는 창빈안씨 묘소는 198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1683년(숙종 9)에 신정(申晸)이 짓고, 이정영(李正英)이 글씨를 쓴 ‘창빈안씨 신도비(昌嬪安氏神道碑)’가 함께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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