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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52] 봉황이 앉은 곳에 자리한 ‘봉정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31 19:25:28
  • 수정 2024-04-02 03:4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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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전경 [박광준 기자] 봉황이 앉은 곳에 자리한 봉정사는 산들에 빙 둘러싸여 더없이 아늑하다.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는 봉정사는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인 682년에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창건설화가 재미있다. 


영주 부석사에 자리잡은 의상이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려보내니, 이 종이 봉황이 앉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절을 지어 봉정사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의상이 기도를 드리려고 이 산에 오르자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히고 청마(靑馬)가 길을 인도해 이 자리에 다다르게 했으므로 산을 천등산이라 했고 청마가 앉은 곳에 절을 지어 봉정사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러나 극락전의 상량문 기록에 의하면 봉정사는 의상의 제자인 능인이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에 얽힌 신비한 이야기 외에는 19세기에 몇 번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고, 절에 전해오던 사지(寺誌)나 경전이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려 봉정사가 지닌 자세한 역사적 내력은 알 길이 없다. 다만 해체.수리 과정에서 이 절의 극락전이 14세기 중엽에 중수된 건물임이 밝혀지면서 그 전까지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졌던 부석사 무량수전의 자리를 빼앗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목조건물을 지닌 절로서의 유서 깊음을 조용히 자랑할 따름이다. 


고려 중엽의 건물인 극락전, 조선 초기 건물인 대웅전, 또 조선 후기 건물인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있음으로 해서 이 절은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계보를 고스란히 간직해 내려온다.



계단을 올라가면 봉정사의 강당인 덕휘루(德輝樓) 밑으로 난 문을 마주하게 된다. 덕휘루를 들어서서 바로 대웅전 마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기단이 한 단 놓여 몇 계단 올라가야 하도록 돼 있다. 옆쪽인 극락전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처럼 대웅전과 극락전이 거의 동등한 위치에 옆으로 나란히 있어 한 절에 중심이 둘 있는 배치는 매우 드물다. 


극락전은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양옆에 거느리면서 아담한 마당을 누리고 있고, 대웅전은 화엄강당과 승방인 무량해회(無量海會)를 양쪽에 거느리고 앞에 덕휘루를 내세우고 있다. 무량해회 건물을 돌아 너른 마당 뒤쪽으로는 아늑한 암자 영산암으로도 갈 수 있다.


안동의 북쪽인 서후면 천등산은 부석사가 있는 태백산에서 일직선으로 죽 내려오는 한 맥에 있다. 그러나 봉정사에 막상 올라보면 절이 앉은 자리나 그 앉음새는 부석사와는 사뭇 다르다. 부석사가 멀리 내다보는 조망이 그 백미라면 이곳 봉정사는 산들에 빙 둘러싸인 더없이 아늑한 자리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봉정사 일주문 못미처 왼쪽 계곡에 작은 바위가 이루는 폭포가 있어 잠시 눈을 즐겁게 한다.그 건너편에 정자가 한 채 있다. 퇴계 이황이 봉정사에 묵으면서 공부할 때 자주 나가 쉬었던 곳으로, 낙수대라는 밋밋한 본디 이름을, 그곳에서 듣는 물소리가 옥을 굴리는 듯하다고 해 명옥대(鳴玉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 극락전



대웅전 영역의 가운데에 있는 화엄강당을 돌아가면 정면에 극락전이 마주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집인 봉정사 극락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여겨지고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집으로 12세기 중엽에 지어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1972년에 완전히 해체.복원했다. 그때 “신라 문무왕 때 능인대덕이 창건하고 고려 이후 원감.안충.보조.신경.밀암 등 여섯 스님이 무려 여섯 차례나 중수를 했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 23년에 용수사의 축담 스님이 와서 중수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지붕이 허술해 수리한다”고 쓰인 상량문을 발견했다. 


이 글에서 말한 ‘지금’이란 바로 조선 인조 13년인 1625년이고, 축담 스님이 극락전 지붕을 중수했다는 지정 23년은 그로부터 약 260년 전인 고려 공민왕 12년으로 1363년이다. 이때에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 있었으므로 극락전의 중수에 공민왕이 관여했으리라고도 여겨진다.


그런데 한 건물이 지어진 후 세월이 지나서 고쳐 짓게 되는 일은 대개 150년에서 200년을 지낸 뒤에 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의 나이는 1363년에서 적어도 150년을 뺀 13세기 초 또는 200년을 뺀 12세기 중엽까지도 거슬러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산동성 오대현에 있는 남선사(南禪寺)의 대전(大殿)과 비교해, 그 건물과 비슷한 옛 방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와 마찬가지로 8세기경까지로 거슬러볼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다. 



이 건물은 배흘림기둥에 기둥 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식이고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가운데에만 문을 내고 양쪽에는 통풍과 채광이 되는 살창을 단 것은, 최근에 복원하면서 조선시대 때 건물의 모습이 변형된 것을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좀더 건축적으로 깊이 들어가서 알아보면, 기둥 위에 놓인 기둥머리[柱頭]가 굽면이 곡면이며 굽받침이 없는 점, 그 위에 놓인 첨차가 끝이 수직으로 강하게 끊어지고 밑면이 두 번 굽은 S자 모양으로 파인데다가 첨차 위에 놓인 소로도 모두 굽면이 곡면인 점 등이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오래된 방식이다.


또 건물 안쪽에서 보았을 때, 대들보 위에 복화반(覆花盤: 엎어놓은 꽃 모양)을 놓고 그 위에 소로를 놓아 중도리를 받치고, 중도리 위에 같은 방법을 반복해 마루도리를 받게 했고, 이 연결이 자연스럽도록 부드러운 곡선으로 된 솟을합장으로 처리했다. 이처럼 세심한 배려는 1376년에 고쳐 지은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훨씬 역학적이며 정성을 기울인 예스런 모습이다. 


이러한 공포와 결구 처리방식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 고려 초에 삼국시대 복고풍이 일어 건물이나 석탑이 지방양식을 띠고 있는 점 등이 이 건물을 고구려계 건축이라고 보게 하는 요소이다. 



공포의 결구 등은 필요한 구조만 있을 뿐 장식이 거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려 중기의 단아한 건물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극락전은 현재 국보 제15호로 지정돼 있다.


극락전의 건축양식 중 다른 건물에서 보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도리를 받고 있는 복화반과 공포의 결구방식이다. 마치 불꽃이 치솟는 모양의 복화반과 결구방식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것과 유사해 극락전이 고구려계 건축이라고도 여기게 한다.


바닥과 주위에 검은 전돌이 깔려 있는데 이런 방식은 고려시대에는 매우 일반적이었다. 온돌은 조선 중기까지는 일반화되지 않았고, 주거용 건물이 아닌 이같은 공공건물의 바닥에는 경복궁의 근정전의 예와 같이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에도 전돌을 깔았다. 극락전 안에는 후불벽을 치고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셔놓았다. 불상의 위쪽으로 닫집이 설치돼 있을 뿐 내부 치장은 간소한 편이다. 이 닫집은 건축의 구조적인 부분은 아니지만, 고려 말의 다포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이 관심을 끈다.



한편 극락전이 이처럼 오래된 건물임에도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는 것은 1972년에 해체.수리하면서 단청을 완전히 새로 칠했기 때문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화반 모양의 윤곽을 확실히 한다든가 하는 것은 극락전의 본모양을 살리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극락전 마당으로 돌아나와 보면 나지막한 담장이 앞을 적당히 두르고 있어, 높은 지대에 있는 곳인데도 앞이 비어 허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극락전이 중심 법당이었다면 앞이 이렇게 비는 것은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원래 극락전 앞에는 우화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극락전을 해체.수리하면서 지금은 봉정사의 부속암자인 영산암으로 옮겼다. 


극락전 마당에는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높이는 3.35m로 자그마한 마당에 어울리는 규모다. 석가탑의 전형을 충실히 따른 이중기단에 3층 탑신의 석탑으로 상륜부가 비교적 충실하게 보존돼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돼 있다.


# 대웅전


대웅전은 현재 봉정사의 주불전이다. 이 대웅전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건물로 여겨지고 있다.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 가장 오래됐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을 인 다포식 건물이다. 다포식이므로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있다. 따라서 네 면에 다 공포가 있다. 이런 공포는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켜 기둥에 전달해 하중을 견디게 하기도 하지만, 나무들이 얽힌 모습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준다. 안정된 비례와 웅건한 구조인 대웅전은 건물의 짜임새만으로 보자면 극락전보다도 건축적 완성도가 높다.


대웅전을 바라볼 때 특이한 점은 앞이 툭 트인 일반적인 법당 건물들과는 달리, 건물 앞쪽에 마치 조선시대 사대부집의 사랑채에나 있을 법한 난간이 둘러 있다. 그 난간은 건물 앞쪽에 설치된 툇마루의 난간으로, 마당에서 바로 건물로 드는 것이 아니라 일단 툇마루로 올랐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인지 마당에서 대웅전 기단을 오를 때에는 정면으로 오르기보다는 옆으로 돌아서 가도록 계단이 설치돼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단청이 퇴락해서 극락전보다 더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긴다. 벗겨진 단청 아래 나뭇결이 드러나는 맛도 그런 대로 좋다. 안에는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후불벽을 치고 가운데에 석가모니불, 양쪽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건물의 벽체가 아니라 건물 가운데에 이처럼 따로 벽을 마련하는 것은 조선 전기 건물에서나 더러 볼 수 있다. 



얼마 전 이 후불벽에 걸려 있던 탱화를 보수하려고 걷어냈을 때 그 밑에서 벽화가 발견돼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가로 4m가 넘는 이 거대한 벽화는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관무량수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조인다. 


테두리의 연화.당초문이나 꽃비가 내리는 표현, 고려시대의 변상도와 유사한 구도 등으로 보아 이 벽화는 고려시대의 변상도와 상당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어 보인다. 이 벽화가 훼손돼 1712년에 탱화를 새로 마련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이 벽화는 대웅전이 건축됐던 때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벽화는 조선 초기 벽화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전남 강진 무위사의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도보다 더 앞서는 조선 초기 벽화로 인정될 수 있다.


대웅전 후불벽화는 후불탱화를 보수하려고 걷어낼 때 발견됐다. 가로 4m가 넘는 거대한 벽화로 강진 무위사의 벽화보다 앞서는 조선 초기의 벽화로 보고 있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수미단에는 모란꽃이 화려하게 조각돼 있는데, 모란꽃이 불교 장식 문양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 말의 일이라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49재 추모식'이 지난 26일 경북 안동의 천년고찰 봉정사 대웅전에서 거행됐다. 이날 추모식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큰스님을 비롯해 콜린 크룩스 주한 영국대사, 국민의힘 김형동 의원, 대한불교조계종 16교구 본사인 의성 고운사 등운 주지스님 등이 참석했다. 사진은 1999년 방한 당시 안동 봉정사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명록에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라는 글귀를 남겼다.천장을 바라보면 다포계 건물의 천장이 대개 그렇듯이 판자를 대어 우물 정(井)자를 이룬 우물 천장을 하고 있다. 우물 정자 하나하나마다 그 안에 화려한 꽃문양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대웅전 천장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 부처님 자리 위쪽 부분을 깊이 파고 작은 공포들로 굽을 돌려 파올렸다. 이는 궁궐의 정전인 서울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 천장의 한가운데를 파올린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보개천장 또는 닫집이라고 한다. 닫집은 부처나 왕과 같은 귀한 이의 자리를 상징하는 상징물이다. 


극락전 앞에 우화루가 있었듯이 대웅전 앞에도 중문 격인 진여문(眞如門)이 있었으나 역시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그 진여문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이라고도 한다.


# 화엄강당


대웅전과 극락전 사이를 가르는 듯이 앉아 있는 건물이 화엄강당(華嚴講堂)이다. 건물의 명칭을 보아서는 한때 강당이었던 듯하나, 지금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로 쓰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주심포양식의 맞배지붕집이고, 보물 제448호이다.



조선 후기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맞배지붕집으로, 규모에 비해 기둥이 짧고 지붕이 무거워 보인다.


규모에 견주어 기둥이 짧고 지붕이 무거워 보이는 것은 화엄강당 지붕이 대웅전 지붕 아래에 맞물려 들어가야 했기 때문인 듯하다. 


대개 맞배지붕집의 옆면을 지탱하는 가운데기둥은 극락전처럼 긴 기둥이 용마루까지 솟아 지붕을 받치는데, 그와는 달리 이 화엄강당 옆면의 가운데기둥은 대들보 높이에서 멈추고 거기에 가로로 긴 부재가 얹혀 있고 그 위로 살창이 있다. 이는 빛을 들게 하는 채광창인데, 강당으로 쓰였을 때의 용도였을 듯하다.


# 고금당



고금당(古金堂)은 이름의 뜻이 ‘옛 금당’이다. ‘금당’은 삼국시대에는 절의 가장 중요한 중심건물로, 불상을 봉안한 건물을 이르는 명칭이었다. 만약 이 건물의 전신이 금당이었다면 이 금당 자리에는 본래 극락전이나 대웅전이 들어서기 전인 봉정사 초창기에 수도하던 암자가 있었을 것이다. 암자가 있던 그 자리에 금당이 지어졌고 그 금당은 절의 구조와 중심이 대웅전으로 옮겨지면서 다시 ‘고금당’이란 이름으로 남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또 금당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에 사찰의 원로스님 거처로 쓰인 건물에 붙는 수가 많았고, 청도 운문사를 비롯한 몇몇 절에서도 ‘금당’ 이름을 붙인 건물을 볼 수 있다. 이 고금당은 요즈음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이고 있다.



고금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맞배지붕집으로, 1616년에 중수한 조선 초기 건물이다. 봉정사의 다른 건물들이 그렇듯이, 규모가 작은 건물치고는 지붕이 큰 편이고 처마가 매우 깊다.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식 집이지만 조선 중기에 주심포식이 결구가 단단한 익공식으로 발전해가는 과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보물 제449호로 지정된 고금당은 1969년에 크게 해체.수리했다. 해체 전에는 지붕의 북쪽이 팔작지붕이었고 방 앞에는 쪽마루가 달려 있는 등 지금 모습과는 달랐다. 그러므로 지금의 건물은 조선 초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후대에 살기 편하도록 고쳐 지어 변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만세루/덕휘루 



봉정사 대웅전 앞에 있는 2층의 누각형태를 한 누문으로,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2층이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했다. 아래층 가운데 칸에 출입문을 뒀고, 위층은 네모난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다.


봉정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누문으로 원래는 덕휘루로 불리웠으나 언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숙종 6년(1680)에 건립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된 만세루는 17세기 후반의 건실하면서도 당당한 건축수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 공사 중이다. 




능인교

보호수# 영산암


영산암(靈山庵)은 지조암과 함께 봉정사의 부속암자로, 대웅전의 동쪽에 있는 요사채에서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잘 정리된 돌계단을 올라가면 있다. 


봉정사 옆에 있는 한적하고 조촐한 작은 암자이다. 우화루를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마치 여염집 마당에 들어선 듯 아늑하다. 극락전 앞에 있다가 옮겨진 우화루를 통해서 마당에 들어서면, 소나무와 어린 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어 마치 여염집 마당에 들어선 듯한 아늑한 느낌을 받는다. 정면에는 막돌로 쌓았지만 정갈한 기단 위에 법당이 있고, 양쪽에 요사채가 있어 전체로 ㅁ자 공간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당인 응진전 옆으로 삼성각이 있다.



서쪽 건물은 요사채인데도 빛바랜 단청이 칠해져 있다. 들여다보면 문인방(문 위를 가로지르는 문틀)에 도깨비, 용 따위가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다. 또 다른 건물 벽면의 박공판(맞배지붕 끝머리에 붙인 널판) 아래로는 사슴처럼 보이는 상서로운 짐승도 그려져 있어, 마치 조선 후기의 민화를 보는 듯하다. 이 건물과 우화루는 좁은 복도로 연결돼 있어 오고갈 수 있다. 영산암의 건물들은 공간 전체가 짜임새를 지니면서 이처럼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본래 영산암은 봉정사와의 사이에 계곡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영산암으로 가는 길은 계곡을 건너고 좁은 오솔길처럼 꼬부라진 계단을 올라 찾아가는 ‘맛’이 느껴지는 길이었다. 그런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의 무대임이 알려지고 나서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계곡을 메우고 다리와 계단을 설치했고 대웅전 옆을 넓은 주차장으로 만들어버렸다./사진-박광준 기자,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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