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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55] 호국도량 차(茶)문화의 성지...열린 마음 아름다운 도량 두륜산 ‘대흥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05 15:14:11
  • 수정 2024-04-02 03:5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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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전경 

[박광준 기자] 대흥사는 고려 이전에 지어진 사찰로서,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수되면서 17~18세기 서산종의 종찰로 선.교 양종의 대도량역할을 한 사찰이다. 경내에는 국보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해 국가지정문화재 12점과 시도지정문화재 9점, 그리고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의 부도와 비석들이 소재한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다.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로,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고, 서.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꿨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고 말해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근대 승보사찰의 종가집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했다. 즉 제1대종사 풍담(風潭) 의심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의순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됐고,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된 바 있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향로봉, 고계봉, 노승봉, 가련봉, 도솔봉, 혈망봉, 연화봉의 8개 봉우리로 들러 싸여 있다.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표충사, 대광명전, 박물관) 3구역으로 나눠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대향각, 청운당, 선열당 등이 위치하고 있고,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세심당, 적묵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동국선원내에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일주문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 호국도량은 근대 이전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렸다가 근대 이후 대흥사로 정착됐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됐고,  한국불교의 종가집으로 그 역할을 다해왔다. 


대흥사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지금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시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수 존재한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94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명승 제9호로 지정돼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 창건연기


두륜산 대흥사 일원_화장법해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다양한 창건연기가 전하고 있다. 


대흥사의 창건연기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죽미기(竹迷記)’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이 있고, 1823년(순조23) 간행된 ‘대둔사지(大芚寺志)’는 이들 자료를 종합한 내용과 함께 이때까지의 사찰역사를 총정리해 놓은 중요 자료이다.


창건설은 426년(백제 구이신왕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이다. 신라의 정관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 이후 508년(무령왕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했다고 하지만, 이 자료에선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죽미기’는 544년(신라 진흥왕5) 아도화상(阿度和尙)의 창건설을 전하고, 자장(慈藏)스님과 도선(道詵)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했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대흥사의 정확한 창건 시점을 밝히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성보박물관 측면하지만 지금 응진전(應眞殿)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는 상태로,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고찰로 봐야 할 수 있다. 또한 정관존자나 아도화상 같은 분들이 창건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은 그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대흥사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중시돼야 할 내용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고려 후기의 천태종 소속 고승인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스님의 주석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천책스님이 대흥사 북암(北庵)에 한동안 주석했고, ‘대둔사지’를 편찬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님이 사용하던 발우가 이 곳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책스님이 대흥사 인근의 백련사(白蓮寺, 현 대흥사의 말사)에서 출가하고 그곳에서 장기간 주석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이 기록은 상당한 타당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 앞마당에 신암(信菴), 사은(思隱), 성유(性柔) 등 세 분 고승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이들 고승도 역시 고려시대에 활동했던 스님들로 대흥사의 장구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대흥사의 위상이 크게 부각된 시점은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이 곳 대흥사에 전해지고 조정과 불교계에서 모두 대흥사를 중시하기 시작했던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이후 대흥사에서는 13대종사와 13대강사가 계속 배출돼 조선 불교계를 이끌어왔고, 조선의 조정에서는 표충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므로써 호국정신의 근원지와도 같은 위상을 세우게 됐다.


이러한 대흥사는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30본말사법 제도 아래에서 44개의 사암을 관장하는 본사로 지정됐다가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가람배치 형식이 아닌 자유롭게 배치한 독특한 공간 구성


자유롭게 배치한 독특한 공간 구성 '가람배치' 넓은 산간분지에 자리잡은 대흥사는 좀 특이한 가람 배치를 보이고 있다. 절을 가로 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당우들을 배치했다. 다른 절에서 보이는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당우들을 자유롭게 배치하는 독특한 공간구성이 특징이다.


‘대둔사지’에서는 이 같은 절의 공간 구성을 크게 북원(北院)과 남원(南院) 의 2구역으로 구분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청운당, 대향각, 선열당 등의 전각과 요사채들이 하나의 무리를 형성해 배치됐다.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적묵당, 세심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당 그리고 종무소 등의 전각과 요사채들이 또 하나의 무리를 형성해 배치돼 있다.


또 남원의 오른편에는 서산대사의 사우인 표충사와 그 부속건물인 비각, 조사전, 의중당, 강례재, 명의재, 보련각 그리고 최근에 증.개축한 성보박물관이 있고, 표충사 뒤편에는 대광명전, 그리고 요사채로 이뤄진 대광명전이 위치하고 있다.


이 밖에 경내 당우들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들은 당대 명필들이 쓴 조선시대 서예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표충사는 정조대왕,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는 원교 이광사, 백설당 지붕밑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 가허루는 전주에서 활약하던 호남의 명필가 창암 이삼만의 글씨이다.


# 북원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 전경대흥사의 중심법전으로 대흥사 가람 북원에 자리한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고, 여기서 직교해 좌측에 대향각과 우측에 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하면서 배치돼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건물로,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고,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해 평방을 얹었다.


공포는 다포로 내삼출목(內三出目).외이출목(外二出目)을 주간마다 2구씩 공간포를 놓았고, 건물 안팎으로 화려한 조각솜씨를 뽐내듯 처마 아래 촘촘히 배열돼 있다. 포의 형상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외부로 뻗은 쇠서 위에 연봉을 조각했고, 내부는 모양을 판형으로 만들어 운봉형(雲峰形)으로 단장했다.


건물 전면은 주간 모두 2분합의 두툼한 빗살문을 달고 하부 2단을 구획해 화려하게 수장된 안상문양과 태극문을 궁방에 치장했다. 측면과 배면에는 중인방까지 막돌을 쌓아, 상부에 팔상도와 법당을 수호하는 사천왕도를 벽화로 장엄하고 있다.


특히 이 건물의 외부장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 건물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머리 한 쌍이 주목을 끈다.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전 축대 앞에는 괘불을 고정한 용두를 조각해 불전을 수호하는 벽사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이단층의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그 내부에 반자와 운궁형 닫집을 형성한 화려한 불전으로, 대들보 사이에 용두와 칠보문양을 단장하고 있다. 대들보는 자연목을 그대로 이용한 투박한 수법이지만, 대들보 위를 넘어서 뽑아낸 충량의 용두는 불전의 신성함을 더하면서 다소 과장된 장엄의 극치를 보여준다.


후불벽 앞에 가설된 수미단 상부에는 목조 삼세불을 비롯해 육봉선사(六峯禪師)가 화주한 삼불회도가 헌괘돼 있고, 중앙 불단 좌우로 20세기 초 대흥사 불화 조성에 참여한 명응환감(明應幻鑑).예운상규(禮芸尙奎)와 그의 권속들이 그린삼장탱.신중탱.칠성탱.감로탱등이 봉안돼 있다. 


이외 대웅보전에는 영단을 비롯해 수미단 우측에 근래 조성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천수천안관음탱이 모셔져 있고, 천장 상부에 서수를 탄 동자들이 비천하는 목조각이 장엄돼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침계루에 걸린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梁文)’과 ‘대웅전중건기(大雄殿重建記)’를 통해 1667년 건립됐다고 전해지나, 화려한 치장과 치목수법,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이후 육봉선사의 발원으로 중건된 것으로 보여진다.


# 부도전



부도전은 일주문을 막 지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담장 안에 다양한 모습을 갖춘부도(浮屠)와 탑비(塔碑)가 모두 80여기(부도 54기와 탑비 27기 )에 이르고 있다. 부도의 배치는 일정한 간격을 두지 않고 3~4열을 이루고 있어 무질서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질서 속에서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의 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됐다. 


부도와 탑비의 주인공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키고 크게 빛낸 스님들로서,서산대사를 비롯해 풍담(楓潭).취여(醉如).월저(月渚).설암(雪巖).환성(喚惺).호암(虎巖).설봉(雪峯).연담(蓮潭).초의(草衣) 등의 대종사와, 만화(萬化).연해(燕海).영파(影波).운담(雲潭).벽담(碧潭).완호(琓虎) 등의 대강사, 그밖에 고승대덕들의 부도이다.


부도와 비의 주인공들이 조선 중기 이후의 인물들인 만큼 부도와 비의 양식 또한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작품들처럼 세련되고 섬세함을 느낄 수는 없지만 정성을 들여 기품 있게 만들어져 있다.



특히 팔각원당형의 서산대사 부도(西山大師浮屠)는 기단부와 상륜부의 독특한 장식과 옥개의 낙수면, 처마의 목조건물 모각은 이 시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수법으로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보물 제134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 부도가 위치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우뚝 솟아 있는 사적비는 그 크기와 규모만큼이나 당시 대흥사의 위상을 나타내 주고 있다.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숭상(崇尙)하는 세력과 절 분위기가 일치한 때문이다.


# 해탈문[解脫門]



부도밭을 지나 대흥사에 들어서면 천왕문 대신 해탈문이 나타난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수미산 정상에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그곳에 불이문(不二門) 즉 속계를 벗어나 법계에 들어가는 해탈문이 서 있다고 한다.


2002년에 건립된 대흥사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내부에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있고, 현판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와 ‘해탈문(解脫門)’의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쓴 것이다.


코끼리 탄 보현동자/사진출처-문화재청 외부에는 협칸 3면에 도륜(道倫) 박태석(朴泰錫)이 그린 ‘부모은중(父母恩重)’ ‘염화신중(拈花神衆)’ ‘점성가제도(占星家濟度)’ 등이 주제별로 장엄돼 있고, 2002년 해탈문 건립 당시 단청과 함께 조성됐다.


대흥사 해탈문에는 특이하게 사천왕상이 없다.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는 송지 달마산,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로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


# 무염지(無染池)


초의선사가 조성한 무염지초의선사가 조성한 무염지(無染池)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의 연못, 실용면에서는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는 풍수에 근거하고 있다. 실제로 화재시 물 공급지의 역할도 가능하다고 한다.특히 무염지의 전체적인 배치는 절묘한 굴곡 모양 연못과 중심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 섬을 만들어 놓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인다. 특히 절에서 바라보면 마음 '심 (心)자 모양으로 보인다.


#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대흥사 산신각과 청운당 사이에 서 있는 탑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아래.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고,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뒀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 만큼 큰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 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 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됐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67년 1월 보수공사 때 기단 안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軀)가 발견된 바 있다.


# 응진당.산신각(應眞堂·山神閣)


응진당북원 일곽의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이 건물은 왼쪽으로부터 응진당. 산신각을 한 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 건립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사지에 의하면 북원 일대에 나한전이 있었고, 침계루 현판 중 ‘나한전급사리탑축장의록(羅漢殿及舍利塔築墻○義錄)’이라는 현판이1917년 헌괘돼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건물로 2벌대의 장대석을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2익공으로 건물 전면에 1.2분합의 빗살문을 단장하고 측.배면에 막돌과 흰줄눈친 담장과 단청으로 장엄했다.



건물은 응진당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획되고 산신각이 정면 2칸, 측면 3칸으로 나워져 있다. 그 사이 판장으로 담을 쌓고 출입에 용이하도록 쪽문을 달아 놓았다. 그 어칸에는 흑지에 백서로 양각한‘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중 응진당 편액은 명부전과 백설당의 편액을 쓴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연등천장을 가설하고 불단을 설치한 모습으로, 천장 상부에는 구름 위를 비천하는 청룡과 황룡도가 장엄돼 있다.


응진당은 목조석가삼존과 16나한.판관.사자.인왕을 권속으로 모시고, 그 후면에 1901년 금어 석옹철유(石翁喆侑) 외 5인이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사자탱을 봉안하고 있고, 불단 상부에는 관음과 세지의 보살패를 두고 있다. 산신각은 연등천장 상부에 황룡과 청룡도를 단청하고, 불단 위에 1901년 조성된 산신탱과 독성탱을 봉안했다.


# 청운당(靑雲堂)



북원 일곽의 산신각 좌측에 자리한 청운당(靑雲堂)은 스님 및 재가 종무원들의 대중방으로, 현재 요사체 및 스님들 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민도리집 맞배건물로 건물 전후에 툇마루를 가설했다. 건물 외부는 2.3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고 외부 단청으로 장엄했고, 어칸 상부에는 흑지에 백서로 양각된 ‘청운당(靑雲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내부는 감실형의 불단 위에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석가모니후불탱이 봉안돼 있고, 선방으로서의 내부시설을 갖추고 있다. 


# 명부전(冥府殿)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는 명부전은 대웅보전의북 서쪽에 남향하고 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낮은 기단 위에 초석 없이 두리기둥을 세워서 정면 3칸, 측면 2칸을 구획하고, 상부맞배지붕을 얹혀 세운 건물이다.


명부전건물은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뒤 20세기 다시 건립된 것으로, 1901년 지장탱의 봉안과 함께 시왕과 명부권속들이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외부는 1.2분합의 빗살문으로 단장하고 단청으로 장엄했고, 공포는 주심포의 2익공 양식이다. 특히 어칸 상부에 걸려 있는 ‘명부전(冥府殿)’ 편액은 구한말미불체의 대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로,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일 때 대흥사와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건물 내부는 5량가로 우물마루 상부에 연등천장을 수장하고, 지장보살과 무독귀왕.도명존자의삼존을 중앙 불단에 봉안하고 있다. 그 외 좌우로 ‘ㄷ’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과 판관.녹사.사자 등 여러 명부의 권속들을 정렬하게 배치하고 있고, 지장보살 뒷면에는 1901년 금어 경선응석(慶船應釋)이 그린 지장탱이 봉안돼 있다. 이 건물은 건축 양식상 주심포식 맞배집으로 특별한 특징은 없으나 20세기 초의 명부전 양식의 한 예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불화로는 1901년에 조성된 지장후불탱화가 있다. 그 밖에 1906년(광무 10)에 쓴 ‘두륜산대흥사명부전헌답기’ 현판이 걸려 있다

     

# 백설당(白雪堂)


북원 일곽의 침계루 우측에 자리잡은 승방으로 대흥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요사채이다. 대웅전 중정의 서편을 가로막아 널찍하게 자리잡은 백설당은 ‘트인 ㅁ자’형 건물로 대흥사 사중의 대중방으로 이용된다. 구조는 대웅전을 향한 동편이 주건물로 3칸의 고량대실(高樑大室)로 구성돼 있고, 6칸의 큰방과 큰 부엌, 그 끝자락 서편에 작은 승방들이 헛간과 이어져 있다. 


백설당,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 편액/자료사진이외 안마당 서변을 이룬 건물에는 작은 방들이 두줄 겹겹으로 배열돼 앞뒤 툇마루와 함께 연결돼 있고, 그 모서리에 공양간이 자리한다. 안마당에는 겹겹이 겹쳐진 사변지붕과 용마루의 겹침 등 그 꺾임이 맑고 아담한 벽체와 조화를 이루며 구성되어 있어 막돌과 힌줄눈친 담장과 함께 변화있고 재미있는 외관을 보여준다.


원래 북원에는 여러 채의 승방과 선당, 중료(衆寮)들이 있었음을 사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현재 백설당의 규모를 보아 여러 채의 승방들이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백설당 동편 처마 아래에는 제주도 유배 중에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편액과 구한말 명신으로 미불체를 구사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백설당(白雪堂)’이라는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자연 초석을 세우고 두리기둥으로 그 칸을 세분화한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가 소략한 주심포집이다. 건립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대웅보전보다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1899년(광무 3) 10월 서상실(西上室)의 화재로 2년 뒤인 1901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주건물인 대중방은 절 안의 스님들이 모여 공양과 정진수행을 하는 대중법요의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내부에는 근래 널마루 다락을 없애고 사찰의 소임을 맡은 분들의 방명이 적힌 용상방(龍象榜)이 붙어 있다.


# 침계루(枕溪樓)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북원을 가로지르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해 자리한 2층 누각건물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으로 출입하고,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다.


주심포식 겹처마 맞배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그 몸체를 구획지었다. 중층 누각건물로 하층은 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한 광으로 구성되고, 상층은 평면에 널마루를 깐 홀로 이뤄진 강당류의 평면을 구성한다. 건물 외부는 대웅전을 향한 내벽을 제외하고 삼면을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했고, 어칸에는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골기있는 필법의 ‘침계루(枕溪樓)’ 편액과 그 배면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내부기둥이 없는 오량가구를 구성해 상부 서까래 사이로 회골이 드러나는 연등천장을 단장하고 있고, 상하의 기둥을 서로 분리해 상하층의 쓰임새를 구분짓고 있다. 건물은 30평의 규모로 상층에는 법고와 1587년명 범종.목어.운판 등 사물이 봉안돼 있고, 좌우 측벽으로 감실형 틀 속에 금어 현암(玄菴)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걸려 있다. 


이외 대흥사의 사적과 내력을 알 수 있는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天佛記)’ 등24기의 현판과 시액이 침계루 사면에 걸려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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