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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53] 참나를 찾아가는 소중한 경험이 기다리는 '부산 범어사(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13 17:10:58
  • 수정 2024-02-18 20: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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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박광준 기자] # 범어사삼층석탑


범어사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이 탑의 특징은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에서 찾을 수 있다. 위.아래층 기단의 옆면을 기둥 모양으로 장식하지 않고 대신 안상(眼象)을 큼직하게 조각한 것으로, 탑신부는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평평하고 얇은 지붕돌은 처마가 수평을 이루고, 밑면의 받침이 4단으로 돼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 위에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만 남아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어졌다.


통일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때에 세운 탑으로, 일제시대에 크게 수리를 할 때 기단 아래부분에 돌 하나를 첨가하는 바람에 기단부가 너무 크고 높은 느낌을 준다. 밑에 둘러진 난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 범어사 대웅전 



경상남도 3대 절 중 하나로 유명한 범어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통일신라 문무왕 18년(678)에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 일본인이 침입 했을때에는 이곳의 승려들이 전쟁에 직접 참여해 함께 싸우기도 했던 중요한 곳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1993년 문화재연구소 정밀실측 중 대웅전 종도리 묵서명에서 효종 9년(1658) 상량식을 거행한 내용이 발견됐다. 이를 통해 대웅전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02년 당시 현감이 임시 복구했고 1658년 효종 9년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암막새 명문과 기단 각자, 목부재 기록 등으로 볼 때 현재 대웅전은 17세기에 중건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석가모니불상만을 모시는 일반 대웅전과는 달리 이곳 범어사 대웅전에는 미륵보살과 가라보살을 각각 석가모니의 왼쪽과 오른쪽에 함께 모시고 있다.


앞면.옆면 3칸 크기를 가진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 불상을 올려놓는 자리인 불단과 불상을 장식하는 지붕 모형의 닫집에서 보이는 조각의 정교함과 섬세함은, 조선 중기 불교건축의 아름다움과 조선시대 목조공예의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 범어사 조계문




경상남도 3대 절 중 하나로 유명한 범어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통일신라 문무왕 18년(678)에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 일본인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의 승려들이 전쟁에 직접 참여해 함께 싸우기도 했던 곳 가운데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을 세운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조선 광해군 6년(1614)에 묘전화상이 절내 여러 건물을 고쳐 지을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추측한다.


정조 5년(1781)에 백암선사가 현재의 건물로 보수했다. 앞면 3칸 규모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은 높은 돌 위에 짧은 기둥을 세운 것이 특이하고 모든 나무재료들은 단청을 했다. 부산 범어사 조계문은 모든 법이 하나로 통한다는 법리를 담고 있어 삼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부산 범어사 조계문은 사찰의 일주문이 갖는 기능적인 건물로서의 가치와 함께 모든 구성 부재들의 적절한 배치와 결구를 통한 구조적인 합리성 등이 시각적으로 안정된 조형 및 의장성을 돋보이게 한다. 한국전통 건축의 구조미를 잘 표현해 우리나라 일주문 중에서 걸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 부산 범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이 삼존좌상은 범어사 대웅전의 주불로서 개금시(改金時) 복장에서 발견된 불상기문(佛像記文)과 불상기인발원축(佛像記因發願祝)을 통해 석가불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의 수기삼존불로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 또 순치 18년(조선 현종 2년, 1661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와 수두(首頭) 희장(熙莊)을 비롯한 보해(寶海), 경신(敬信), 쌍묵(雙黙), 뇌영(雷影), 신학(信學), 청언(淸彦) 등이 조각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수조각승 희장은 1639년 하동 쌍계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을 조각한 청헌(淸憲)과 같이 활약했고, 1646년에는 천은사 수도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조각한 승일(勝一)과도 함께 작업을 했다. 1950년대는 선종대선사(禪宗大禪師)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청도 대운암 불상(1654년)을 제작했다. 이외에도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그의 작품이 확인됐다. 범어사 대웅전 불상은 그가 완숙기에 조성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전하는 자료를 통해 그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17세기 중.후반기의 대표적인 조각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삼존불은 비례가 적당해 당당하고 균형 잡힌 형태를 보이고, 상호(相好)는 풍만한 양감 속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우러져 자비롭고 단정 우아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법의 주름은 직선의 선묘로 간략히 처리해 여백을 많이 남겼지만, 전체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잘 정돈돼 있다. 무릎 아래에는 넓은 띠 모양의 주름이 좌우대칭으로 펼쳐져 부채꼴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희장 유파의 조각적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범어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은 불상기문을 통해 정확한 존상명칭은 물론, 조성시기와 조각가 그룹을 알 수 있는 불상으로서는 매우 완성도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 범어사 등나무 군락 



등나무는 콩과에 속하는 낙엽 덩굴성 식물로 봄에 보랏빛 꽃을 피우고, 줄기는 오른쪽으로 꼬여 감으면서 10m 이상 자란다. 우리나라에는 남쪽에서 자라는 애기등과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등나무 등 2종이 자생하고 있고 정원수, 환경미화용 등 조경의 소재로 많이 쓰여지고 있다.


범어사 등나무 군락은 부산 금정산 중턱에 있는 범어사(梵魚寺) 앞의 계곡에 있다.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의상대사가 절을 세운 이후 여러 고승들이 깊은 깨우침을 받았던 곳이다. 계곡의 큰 바위 틈에서 자란 약 500여 그루의 등나무가 소나무, 팽나무 등의 큰 나무를 감고 올라가 뒤덮여 있다. 등나무가 무리지어 사는 계곡을 등운곡(藤雲谷)이라고도 하고, 금정산 절경의 하나로 꼽았다.


범어사 등나무 군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것은 등나무가 무리 지어 사는 것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생물학적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 범어사 당간지주



산지를 이용한 특이한 가람배치로 잘 알려진 범어사는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조건이 아름다운 곳이다. 숲 한가운데 수많은 비석과 유물들이 있다. 이 당간지주도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둔다. 깃발을 다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옆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은 두 기둥만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기단(基壇)과 당간의 받침돌이 모두 사라지고 양쪽의 두 기둥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기둥 윗부분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켰던 네모난 홈을 두고 양 기둥 끝은 곡선으로 처리했다.


돌을 다듬은 흔적이 고르지 않아 둔중한 감이 있으나, 장식이나 조각이 전혀 없어 소박한 모습이다.


# 범어사 석등 


범어사 안에 있는 석등으로, 석등은 보통 금당이나 탑 앞에 둔다. 이 석등도 원래는 용화전(龍華殿) 앞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에 절내의 종루와 그 자리를 바꿔놓은 것이다.



석등은 3단의 받침 위에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과 지붕돌을 올린 일반적인 형태로, 각 부재가 8각을 이루고 있다. 받침부분은 가운데 기둥을 사이에 둬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아오르는 연꽃무늬를 새겨 대칭적으로 표현했다. 화사석은 4면에 네모난 창을 두었는데 창의 가장자리마다 창문을 달았던 10개의 구멍 흔적이 남아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고,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위로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후대에 보수한 받침의 가운데기둥이 빈약하고, 윗받침돌이 두터워서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안정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범어사삼층석탑(보물 제250호)을 세운지 3년 후인 통일신라 문무왕 18년(678)에 만들었다고 하나 양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9세기경인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인 이 건물은 현재 범어사 대웅전 서쪽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부속 불전의 하나로, 적어도 1706년 이래로 존속했던 위치에서 변함없이 존속해 온 건물이다.



1902년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당시까지는 중앙의 천태문(天台門)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팔상전과 나한전이란 별개의 건물이 서 있다가, 1905년 11월~1906년 11월까지 약 1년에 걸친 공사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됐다.


따라서 서측의 팔상전 부분과 동측의 나한전 부분의 건축 형식은 변형되거나 고쳐지지 않고 1906년 중건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만, 팔상전과 나한전의 노후화 된 부재의 교체와 내부 가구(架構)가 수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06년에 단장된 독성전(獨聖殿) 부분은 문틀을 하나의 통재를 사용해서 반원형으로 구부려 만든 독특한 모습이고, 창방 사이의 삼각형 벽체 부분에는 통판(通板)으로 넝쿨 형상을 초각했고, 창호도 팔상전과 나한전이 교살창인데 비해 독성전은 화문살로 아름답게 꾸미는 등 장식수법이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


이처럼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은 1906년에 중건된 건물임에도, 간살, 가구(架構)와 평면, 입면 구성 등에서 1706년 이래의 건축 형식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하나의 건물에 세 불전(佛殿)을 모신 점, 중앙에 위치한 독성전 개구부(開口部)의 뛰어난 의장과 초각수법은 그 예가 극히 드문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건물로 평가된다.


# 범어사 동종 



범어사 종루에 매달려 있는 이 동종은 높이 127.0cm, 종구(鐘口) 지름 92.5cm인 규모가 제법 큰 범종이다. 천판(天板) 정상부에 쌍룡의 용뉴(龍鈕)가 조형돼 있고, 동체 윤곽선이 아래로 가면서 서서히 배가 부른 원만한 곡선미를 보여 주고 있다. 종신(鐘身)에는 유곽(乳廓), 보살상, 전패(殿牌)가 양각돼 있는 등 조선 후기 동종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종신에는 주성한 시기, 무게, 주종자, 산중질(山中秩), 시주자, 연화질(緣化秩) 등의 명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산화로 인해 표면이 푸른색을 띠고 있는 것 외에는 파손된 부분이 없이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1728년에 제작된 범어사 동종은 우리나라 18세기 범종 주성에 활발한 활동을 펼친 전라도 출신 김성원(金成元)과 김선봉(金善奉)이 주성한 것으로, 현존하는 18세기 범종으로는 규모가 제법 큰 편에 속하는 작품이다. 조선후기 범종의 대표작으로 언급되기도 하는 문화재로서 조선후기 동종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범어사 비로전


범어사 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부불전(副佛殿)으로, 처마는 전면만 부연(附椽)을 둔 겹처마이고, 배면은 홑처마로 돼 있다.


2014년 시행된 비로전 해체수리 때 종도리 밑면에서 발견된 ‘동래도호부북령금정산범어사비로전상량문(東萊都護府北嶺金井山梵魚寺毘盧殿上樑文)’이란 제목의 묵서(墨書)한 상량문을 통해 1684년(康熙 24)에 중창(重創)된 건물이라는 건축 연혁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됨으로써 그동안 간접사료에 기록된 범어사 비로전의 건립연대를 확인했을 뿐 아니라, 부산 지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임이 입증됐다.



범어사 비로전의 고졸(古拙)한 익공식 공포(翼工式 栱包)는 조선 중기에 유행했던 익공식 공포의 선구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어 조선 중기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익공식 공포의 발달과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문화재적으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범어사 비로전은 1684년 중창 때 작성된 상량문이 남아 있고, 주요 구조 부재들도 대부분 중창 당시인 17세기 말(1684년)의 부재를 유지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부산 지역 목조 건축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던 익공식 맞배집의 우수한 사례로 익공식 공포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 범어사 미륵전 


범어사 미륵전은 대웅전 아래 중정(中庭)의 왼편에 비로전과 함께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맞배지붕 부불전(副佛殿)이다.


범어사 미륵전은 2014년 미륵전 해체수리 때 어칸 종도리 기문장처(記文藏處)에 보관된 상량문을 통해 1887년(고종 24)에 대대적으로 수리됐음이 확인돼 건물의 건립연대가 밝혀졌다.


미륵전은 범어사의 창건 내지는 중창에 즈음한 역사적 상황과 가람배치, 건축 상황을 기록한 문헌자료인 ‘범어사창건사적(梵魚寺創建事蹟)’ 등의 핵심적 서술 대상이고, 임진왜란 이후 미륵전의 소실과 재건, 중수(重修) 등 건물의 연혁에 관한 기록이 다른 어떤 건물보다 풍부하다.


또한 상량문은 건물의 조영(造營) 의도, 사찰 대중들의 상황, 목수 등으로 구성된 당시의 공역(工役) 조직 등을 살필 수 있어 건축사적 가치 뿐아니라 불교사적으로도 가치가 큰 문헌자료이다.


범어사 미륵전은 각종 기록을 통해 볼 때 범어사 창건가람(創建伽藍)의 주불전(主佛殿)이었고, 적어도 고려시대까지 주불전(主佛殿)으로서 존속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소규모의 부불전으로 그 위상이 낮아졌지만 범어사의 창건이념과 불교정신 뿐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다른 어느 지역보다 경제사정이 어려웠던 당시 부산(동래)의 절실했던 역사적 사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한 풍부한 조영 기록을 갖추고 있어서 건물의 건립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고, 나아가 임진왜란 이후 부산 지역의 시대적, 건축적 지역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중요한 건축유구(建築遺構)이다.


# 범어사 금샘 


금정산성 북문에서 고당봉 쪽으로 300 여m 쯤 오르다 보면 고당샘이 나오고, 이곳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100여m쯤 내려가면 바위군 맨 끝에 우뚝 솟은 바위 정수리에 언제나 금빛 물이 고여 있다는 금샘이 있다. 금샘의 유래에 대해서는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동래현조’와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동래현’ ‘산천조’에 기록돼 있다.



금샘 주위에는 낙동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낮에 햇빛의 열기로 데워지고, 데워진 바위가 밤이 되면 주변 수분을 빨아들이는 작용으로 샘물이 차게 된다고 한다. 지금도 10월의 해 질 무렵에 금샘을 보면 물 안에 물고기 형상의 홈이 파여 있어 석양과 단풍빛이 반사돼 금빛 물로 변화하고, 바람에 파장이 일렁이면 마치 금빛 물고기가 헤엄치면서 노니는 것 같이 보인다.


금샘은 샘 둘레의 곡선미, 물결의 금빛 파장과 함께 사방이 확 트인 아름답고 장엄한 풍광을 가진 곳으로, 부산의 진산이자 제일 명산인 금정산의 이름이자 범어사 창건 설화와 절 이름의 탄생 배경을 간직하고 있는 명소이다. 많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한 채 신비한 모습으로 오랜 세월을 담아 왔다. 지금도 범어사에는 금샘의 물이 마르면 큰 재앙이 온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백악기 말인 8천만 년 전부터 형성된 화강암체가 오랜 세월 동안의 풍화과정과 기후변화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금샘은 그 자체로서도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고, 주변에 널리 분포하는 토르와 암괴류가 이 일대에 자생하는 등나무군락지 등과 조화를 이루면서 절경을 자아내고 있어 경관적 가치도 매우 뛰어난 곳이다.


# 범어사 고려삼층석탑


범어사 고려삼층석탑은 전체 높이가 1.8m이고, 상하 이중기단에 전형석탑 양식을 지닌 삼층석탑이다. 지대석과 1층 옥개석, 2.3층 탑신석 및 상륜부가 결실됐고, 석탑 부재도 부분적으로 파손돼 있다. 또한 4매로 구성된 하층기단 면석 중 1매는 별도의 석재로 보강됐다.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은 면석과 갑석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하층기단 면석에는 고려 전반기의 규모가 작은 탑들에서 종종 보이는 것처럼 하대저석을 아래 부분에 조출한 후 그 위에 우주와 탱주를 각각 모각하고 있다.


석탑 부재 중 가장 온전한 1층 탑신석은 1매로 조성돼 있고, 모서리마다 우주가 모각돼 있다. 또한 1층 탑신석의 상면에는 지름 10㎝, 깊이 8.5㎝의 사리공이 있음에도, 특이하게도 하면에도 역시 지름 11㎝, 깊이 7㎝의 사리공이 마련돼 있다.


이 탑은 이중기단에 옥개받침을 지닌 옥개석 등 통일신라시대의 전형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석탑이다. 다만 석탑의 전체적인 규모와 하층기단 면석에 하대저석을 조출한 점, 3단 각형으로 얕게 표현된 옥개받침 양식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석탑으로 판단된다.


또한 범방동 삼층석탑(부산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제23호), 경남 의령의 성황리 삼층석탑(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14호)과 많이 닮았고, 전체적인 짜임새와 날씬한 옥개석 형태 및 치석 등은 앞의 두 탑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파악된다./사진-박광준 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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