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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60] 호국도량 차(茶)문화의 성지...열린 마음 아름다운 도량 두륜산 ‘대흥사(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13 19:25:16
  • 수정 2024-04-02 03:5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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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박광준 기자] # 천불전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 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두륜산(대둔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한 넓은 산간분지에 계류를 끼고 자리한 대흥사는 여러 불전들을 지형적 조건에 맞춰 독립된 군을 이뤄 배치함으로써 정연한 가람배치에서 느낄 수 없는 자유로움과 조화를 느낄 수 있다.


대흥사의 입지는 '대둔사지(大芚寺誌)'(1823)의 기록에 나타나듯이 절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나눠 당우들을 배치했다. 현재 북원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백설당, 청운당이 자리잡고 있고,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종무소 등이 또 하나의 군을 이뤄 배치됐다. 또한 남원의 오른편에는 표충사와 부속건물, 성보박물관이 있고 그 뒤편에 대광명전 영역이 별원을 형성하고 있다.



천불전은 대흥사 남원(南院)의 중심 불전이다. 큰 대문채와 같이 평범한 단층 5칸 맞배집으로 구조된 가허루의 중앙 문간을 거쳐 천불전 안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의 높은 장대석 축단 위에 서향해 자리한 천불전이 마주보이고 왼쪽에는 봉향각이, 오른쪽에는 옛 강원이던 용화당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독립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대웅전에 비해 마당은 크지 않지만 공간에 맞게 각 건물의 규모와 형식을 갖췄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인 천불전은 높은 장대석 축단 위에 자리하고 있어 남원(南院) 공간의 중심건물로서 격식과 품위가 느껴진다.


천불전은 1813년에 중건된 건물로 대흥사 남원의 중심건물로서 격식을 갖추고 있고,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楓溪賢正, 1821) 등을 통해 건물의 중건과 천불 조성 및 봉안의 역사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천불전 내부/사진출처-문화재청 건축적으로는 평면 비례, 공포 배치, 상부가구 등에서 천불을 봉안키 위한 합리적인 계획수법을 볼 수 있고, 공포의 구성과 세부적 조각수법, 빗천장과 우물천장의 장식과 구성, 창호 등은 화려하지만 지나치지 않고 구조 또한 견실하다. 이러한 공포, 빗천장, 우물천장 등의 구성 및 세부적 수법은 인근의 국가지정문화재(보물)인 미황사 대웅전(1754), 불갑사 대웅전(1764), 불회사 대웅전(1808) 등과 유사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비교돼 가치가 높다.


이처럼 대흥사 천불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천불전 건물을 대표할 수 있는 건물로서 역사적, 학술적으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 가허루(駕虛樓)


남원(南院)의 출입문으로, 사찰의 중심에 있다. 휘어진 자연목으로 만든 문턱을 넘어 짧은 통로를 지나가면 천불전(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8호)을 비롯해 용화당.동국선원.봉향각.승방 등이 나온다. 단층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건물 중앙은 통로로, 나머지 공간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좌우측에는 돌벽을 쌓았고, 뒷면은 판장문으로 단장했다. ‘가허루(駕虛樓)’라는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다.


# 용화당(龍華堂)



대흥사 천불전 서쪽에있는 요사로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고 익공양식으로 매우 단조로운 건물이다. 승려의 교육학당인 강당 겸 선방(禪房)으로 사용하기 위해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가 1811년(순조 11)에서 1813년에 준공했다. 그뒤 이용에 편리하도록 증축된 부분이 있다. 


건물의 남쪽은 ‘ㄱ’자로 꺾여 돌출시킨 부분이 있어 맞배지붕을 얹어 연결시켰고, 다른 쪽은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남쪽에는 온돌방 3개와 부엌을 놓고 건물의 가운데에는 큰 선방과 그 북쪽으로 작은 방 2개가 있다. 이 선방의 동서면에는 큰 퇴와 작은 툇마루를 뒀고, 부엌 쪽에는 넓은 다락방을 위쪽에 두어 부엌 한쪽에서 오르내리는 계단을 뒀다.



건물 외벽에는 세살문, 붙박이 살창, 판벽 등을 만들었다. 기둥 일부의 주두(柱頭) 위에는 연화(蓮華)를 조각한 주심포작(柱心包作)을 꾸몄다. 전면 외부포작의 공법이 초익공인데 그 초각이 매우 간략해 좌로부터 다섯번째까지만 익공양식이다.


자연석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왼쪽에서 여섯번째 기둥만이 네모기둥으로 돼 있고 두리기둥에는 배흘림을 뒀다. 전면 처마도리는 각을 둥글린 납도리인데 받침장혀를 대고 덧장혀로 받쳤고 소로를 끼워 창방을 보냈다. 종도리도 역시 각을 죽인 납도리로 장혀만 받쳤고 동자주대공으로 지지됐다. 대들보는 자연목을 사용했다. 후면 처마도리는 모접이 납도리를 장혀가 받치도록 한 간단한 구조로 돼 있다.


# 보현전


대흥사의 남원(南院) 쪽,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보현전. 정면 7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조성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가까이에 또 다른 신생불전인 문수전이 있다.


안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모셔져 있다. 보현전과 그 앞마당에서는 학술강연, 산중총회, 연수교육, 작은 음악회, 녹차관련 행사, 수련회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 표충사


의중당은 봄가을 서산대사를 기리는 제사를 봉행할 때 제수를 차리는 곳이라고 한다.

의중당 뒤로 1669년 서산대사 제자들이 건립한 표충사당이 보이는데 편액은 정조대왕이 직접 써 내려준 것으로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처영, 서산대사 그리고 사명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표충사는 서산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사액사우(賜額寺宇)로서,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키 위해 1669년(현종 10)에 건립됐다.표충사 일곽의 풍제문인 내삼문 정면에 위치하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자리한다.


건물 외부는 자연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전면에 2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했고, 측면과 배면은 판벽으로 마감했다. 어칸 상부에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이란 편액 두 기가 있고, 단조로운 채색의 단청으로 사당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표충비각은 당연히도 서산대사의 공을 기리기 위해 정조 12년인 1778년 왕이 친히 사액을 내리고 현판 글씨까지 쓴 곳이다.

특히 표충사 사액(賜額)은 1788년 천묵(天?).계홍(戒洪) 스님이 서산과 유정.처영의 영정을 모실 사우의 건립을 모색하면서, 당시 호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802)이 서산대사의 사적과 사우건립의 정당성을 왕에게 주청해 건립허가와 함께 ‘표충사’이라는 사액을 받게 된 것이다.



건물은 전반적으로 조선후기의 건축기법을 살펴볼 수 있고, 건물 내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동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처영의진영이 봉안돼 있다. 현재 이곳은 부처의 삼보도량 가운데 승보(僧寶)를 존중하고 받들어 불가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도량으로 이용되고 있고,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 조사전[祖師殿]



천불전 일곽의 돌담길을 따라 표충사 영역에 들어서면 표충사당 좌측편에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조사전은 3단의 바른층쌓기 방식의장대한 기단 위에 단촐하게 세워져 있고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외부는 다듬어진 2단의 원형 초석 상부에 두리기둥을 세워 전면 1.2분합의 격자창호로 장엄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3폭의 조사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진영은 창건주 아도조사(阿度祖師)를 비롯해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으로 구분되는데, 6명(1폭).5명(2폭)으로 2단 구성 아래 진영을 배치하고 있다.


# 표충비각(표충사)


표충비각은 서산대사의 공을 기리기 위해 정조 12년인 1778년 왕이 친히 사액을 내리고 현판 글씨까지 썼다.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 격퇴에 앞장선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됐다. 서산대사는 어려서 고아로 자란 후, 출가하여 선가의 법을 체득했다.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도 16조 도총섭이 돼 유정, 처영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 건물은 조선 정조12년(1778년)에 대사의 높은 공을 기리기 위해 왕이 친히 사액을 내리고, 직접 정조대왕이 표충사라는 현판 끌씨까지 썼고,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혜를 받았다.이후 관아의 보호를 받으면서 선암사, 송광사와 견줄만한 지위로 향상됐다. 한편, 서산대사의 유품인 금란가사, 발우와 정조 임금이 하사한 금병풍 등이 유물관에 전시돼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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