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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62] 송광사의 말사 고흥 '능가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14 13:38:32
  • 수정 2024-04-02 03:5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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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능가사는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팔영산(八影山) 밑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인 420년(눌지왕 4)에 아도(阿道)가 창건해 보현사(普賢寺)라 했다고 하지만 지리적으로 보아 아도가 과연 이 절의 창건자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1644년(인조 22)에 벽천(碧川)이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뀌었다. 그뒤 1768년(영조 44)과 1863년(철종 14)에 중수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능가사대웅전(보물 1307)과 천왕문(天王門),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350여 년 전에 나무로 만든 뒤 개금한 불상 8위와 나무로 만든 뒤 도분한 불상 22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범종(梵鐘), 목조사천왕상(木造四天王像) 및 귀부(龜趺) 위에 세워진 능가사사적비(전남유형문화재 70)가 있다. 






특히 능가사 범종은 1698년(숙종 24)에 주조된 것으로 이 종을 치면 인근 점암면 일대에 울려퍼질 정도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탐을 내 헌병대까지 끌고 가 종을 쳐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밖에도 절의 경내에는 광조(廣照), 사영당(泗影堂), 추계당(秋溪堂) 등의 부도(浮屠) 8기가 있다.


영조 때 이중환(李重煥)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 류큐[琉球]의 태자가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다. 이 절의 관세음보살의 도움으로 파도를 넘어갔다고 하고, 절의 승려들이 법당 벽에 그 모양을 그려 놓았던 것이 영조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속 암자로는 만경암(萬景庵)과 사불암(四佛庵)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신라 때 10대 사찰로 꼽혔다고 전해진다. 


# 고흥 능가사 동종 




현존하는 김애립(金愛立)의 작품 가운데 가장 뒤늦은 시기인 1698년에 제작된 작품이지만,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종신의 전체적인 외형은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넓게 벌어져 여수 흥국사 동종과 유사하고, 용뉴는 쌍룡(雙龍)으로 구성됐다. 연곽대와 연곽대 사이에는 4구의 보살입상이 유려한 모습으로 부조됐고, 종신 한쪽에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殿牌)가 마련됐다.


이 종은 용뉴의 웅건한 표현과 단정한 보살입상, 세부 문양의 정교함 등 김애립 범종의 완숙한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17세기를 대표하는 범종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 ‘고흥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


사진출처-문화재청 '고흥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은 능가사 응진당(應眞堂)에 봉안돼 있는 불상 일괄로,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해 1685년 6월 전라도 홍양현(洪陽縣) 팔영산(八影山) 능가사(楞伽寺) 비구(比丘) 상기(尙機)가 불자(佛子)들을 모아 발원하고,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조각승 색난과 그의 동료.제자들이 주도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색난은 화엄사 각황전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통해 ‘팔영산사문(八影山沙門)’, 즉 팔영산 능가사에 주석한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능가사 응진당 존상의 제작자 뿐 아니라 가섭존자의 시주자로도 등장한다. 


그밖에 1698년 능가사 범종 시주, 1707년 능가사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 간행 시주, 1730년 능가사 기와 시주 등 능가사 불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팔영산 사문으로 큰 역할을 했다. 이로써 고흥 능가사는 수조각승 색난의 본사(本寺)이자 활동의 본거지로서, 이곳의 응진당 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은 그가 주석한 본사에서 대단위 불사를 진행하고 남긴 작품이라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고흥 능가사 석가여래삼존상과 십육나한상은 응진전 조상(造像)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석가여래와 미륵보살, 제화갈라 보살 삼존상을 비롯해 문수.보현보살과 아난.가섭존자가 육대보살로 이뤄진 이채로운 구성이라는 점에서 연구가치가 높다. 이는 이러한 형식의 응진전 도상이 1624년의 순천 송광사 응진전 존상에서 시작해 이후 색난에 의해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한 사실을 통해서도 조각사적으로 주목되는 현상이다. 


비록 일부 존상이 남아 있지 않지만, 현존하는 상만으로도 구성이 거의 완전하고, 나한상의 표정과 자세, 지물(持物)과 대좌 등에 채택된 동물 등 창의성이 뛰어나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어 예술성도 탁월하다. 


특히 나한상 상호와 세부표현은 색난조각의 스승으로 판단되는 응원(應元)과 인균(印均)의 조각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바위 대좌에 동물 소재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색난의 또 다른 조각 스승인 무염(無染)의 영향도 엿보인다. 


# 능가사 대웅전




능가사대웅전은 18세기 중엽에 중건된 정면 5칸, 측면 3칸, 57.58평의 건물로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 다포계의 일반적 수법을 따랐지만 정면 기둥머리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외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보물로 지정된 영광의 불갑사대웅전, 부안의 개암사대웅전과 그 맥을 같이 하면서, 포벽 수장재에 도드라지게 새긴 첨차(檐遮)는 사찰건물에서 보기 드문 예에 속하는 등 조선 중·후기 호남지역 사찰건축의 일면을 보여주는 건물로 학술적.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 고흥 능가사 추계당 및 사영당 부도


고흥 능가사 추계당 및 사영당 부도는 조선시대 후기 승려로 사제간인 추계당과 사영당의 부도이다. 능가사에는 경내에 팔각원당형 부도 1기, 능가사 외곽의 계곡 곁에 9기 등 10기의 부도가 있다. 9기 가운데 추계당(秋溪堂) 부도와 사영당(泗影堂) 부도는 원 위치로 알려져 온다.


사진출처-문화재청

추계당 부도는 석종형으로 기단부는 방형의 하대석 위로 8각의 복련을 새겼다. 16엽의 연화문으로 화려한 문양이 없어 오히려 소박한 편이다. 그 위에 원형의 홈을 파고 탑신부를 얹었다. 탑신부는 크게 나눠 상대, 하대로 구분된다. 


하대에는 돌아가면서 물고기, 게 등이 조각됐다. 탑신 중앙에는 4군데의 유곽과 그 안에 9개의 유두가 돌출되고 있으나 그 기법도 매우 간략화 됐다. 북쪽인 두개의 유곽 사이에 방형의 위패형을 새기고 그 안에 ‘추계당(秋溪堂)’이라는 당호를 새겼다. 상대로 올라와서는 주위에 아무런 문양이 없고 바로 천판으로 연결되는데 희미한 연화문이 장식됐다. 상륜부는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구름문양을 새겨 더욱 장엄을 더했다.


사영당 부도는 석종형과 8각원당형의 양식에서 벗어난 이형(異型) 부도이다. 일반적으로 부도의 기단부는 방형 아니면 8각의 하대석에 8각의 복련과 중석 그리고 앙련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사영당 부도는 복련과 방형의 하대석이 한돌로 되면서 그 위에 바로 중석이 이어지고 앙련이 생략된 것이다. 


사진출처-문화재청 방형의 큼직한 하대석을 앉히고 귀퉁이에 각기 4방을 향하고 있는 용두를 조각했고 그 위로는 한 돌로 연결된 복련이 이어지고 있는데, 각 면이 2엽씩 모두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됐다. 다시 복련 위로는 8각의 중석이 연결됐고 탑신은 중앙 몸통부분이 배가 부른 편구형이다. 북쪽에는 직사각형의 위패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사영당(泗影堂)’이라는 당호를 새겼다. 옥개석은 방형인데 상당에 팔작지붕형의 합각을 나타냈고 상륜부는 옥개석과 한 돌로 해 연결되는데 노반없이 복발과 보주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 부도의 조성연대는 능가사 사적비문(1750년), 능가사 사천왕상 복장기(1667년), 응진당 16나한 조성기(1685년), ‘해동불조원류(海東佛祖源流)’들의 기록을 통해 보면 추계당 성안(性安)의 제자로 사영 신희(泗影 信熙)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추계당 부도는 17세기 중반경, 사영당 부도는 17세기 후반경으로 보인다. 


# 고흥능가사목조사천왕상



능가사의 천왕문에 모셔져 있는 4구의 사천왕상으로,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능가사는 신라 눌지왕 3년(419)에 아도화상이 창건했고, 창건 당시에는 ‘보현사’라 이름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것을 인조 22년(1644) 정현대사가 다시 건물을 지어 ‘능가사’로 고쳐 불렀다.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은 조선 현종 7년(1666)에 처음 지어진 후 순조 24년(1824), 1931년에 다시 고쳐 지어졌다.




이 사천왕상은 천왕문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현종 7년(1666)에 조성됐다. 나무로 만들어진 이 사천왕상은 원통모양의 보주에 특이하게도 동방지국천왕은 비파, 남방증장천왕은 칼, 서방광목천왕은 뱀을 쥐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것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능가사의 사천왕상은 만들어진 시기가 확실해 다른 문화재의 시기 추정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다.


# 고흥 능가사 사적비


사진출처-문화재청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로, 이 비는 능가사의 창건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능가사는 비문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3년(419)에 아도화상이 창건했고, 창건 당시에는 ‘보현사’라 이름했다 한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것을 인조 22년(1644) 정현대사가 다시 건물을 지어 ‘능가사’라 고쳐 부르게 됐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새겨진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고흥 능가사 사적비 건립연대 표기 ‘숭정기원후재경오(崇禎紀元后再庚午)’는 1690년으로 알려 졌다. 숭정 재위 기간의 경오(1630년)는 포함하지 않고 그 뒤로 이어지는 두번째 경오로 보아야 하고, 비문 찬자, 서자, 관련 인물의 활동연대와 비교해 보면 건립연대는 1750년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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