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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9] 만주 청산리에서 침략자 일본군 상대로 연전연승허면서 괴멸 상태로 격퇴한 '서일'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18 07:35:50
  • 수정 2022-11-18 18: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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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서일 徐一 ,1881.02.26 ~1921.09.28 . 함경북도 경원 , 독립장 1962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그 전투의 실질적 지도자인 서일 선생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교육자 종교인 언론인이기도 했던 그는 만주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한 분이다. 일제(日帝)를 깨부술 수 있는 것은 힘뿐이라고 믿었던 젊은 혁명가, 그 힘은 강고(强固)한 정신력과 무장을 바탕으로 나온다고 생각한 지휘관이 서일 선생이다.


# 사범학교 졸업 후 서른 한 살 때 항일 위해 만주로 망명


서일(徐一, 1881. 2. 26 ~ 1921. 8. 27(음), 9. 28(양)) 선생은 1881년(고종 18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포(白圃)이며, 처음 이름은 기학(蘷學)이라 했지만 나중에 일(一)로 바꿨다. 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에 있던 성일(成一)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나중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보아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意)와 기(氣)를 살리는데 앞장섰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그러나 그의 20대는 날이 갈수록 어두운 색깔로 채색되어갔다. 혈기왕성했던 스물다섯 살에 을사조약 체결을 겪었고 서른 살에는 망국(亡國)의 경술국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와 망명지 만주 등에는 사범학교 설립이 급증했다. 이는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 역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망명 후 선생이 교육에 정신(대종교)과 힘(무장투쟁)을 융합시킨 사실이 그 증거이다. 선생은 서른 한 살 때인 1911년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의 어려움과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통분해하며 당시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동만주 왕청현으로 떠났다. 만주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 10년의 시작이었다.



# 명동학교에서 독립정신 가르치는 교사생활, 대일항전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 조직


그는 한승점(韓承点)이 설립한 대종교(大倧敎) 계통의 명동(明東)학교에서, 왕청현 덕원리로 물밀 듯 이주해오는 한인자녀들을 가르치며 조국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붙여 주었다. (이 명동학교를 서일 선생이 설립했다는 설도 있지만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듬해 10월 선생은 대종교에 귀의한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 된다. 선생이 단순한 무장 독립운동가가 아닌 교육자·종교인·언론인으로도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만강을 넘어 망명해오는 열혈청년들이 줄을 이을 때 서일 선생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을 규합,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다. 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 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대종교의 이념계승에도 몰두했다.


그는 대종교 입교 후 포교에도 나서 3년 동안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여 만명의 교우(敎友)를 얻어 도력(道力)이 큰 도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서일 선생은 교우들 중 젊은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일반 교우들에게는 군량조달 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독립군에 편성된 청년들의 강고한 정신무장을 위해 그는 한배검에 귀의하게 했다. 한배검은 대종교에서 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


독립기면관 내에 있는 어록비# 대종교 입교 후 교도들을 독립군으로 육성, 무장독립 주장하는 ≪일민보(一民報)≫ 등 신문 발간


선생은 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는데 신도 1만5천명을 모아놓고 “독립군 양성기금으로 1인 1원씩 거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이러는 한편 선생은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 '신화강의(神話講義)' '진리도설(眞理圖說)' '삼문일답(三問一答)' '회삼경(會三經)' 등 경전도 저술했다. 당시 선생은 중광단(重光團) 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 문제 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투쟁은 전개하지 못했다. 이에 선생은 수많은 독립군 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1918년 김좌진(金佐鎭), 김동삼(金東三), 신팔균(申八均), 손일민(孫一民), 신채호(申采浩) 등 39인 연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와 함께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민보(一民報)' '신국보(新國報)' 등 신문을 발간, “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논조를 내세웠다.



# 중광단 개편하여 북로군정서로 확대, 발전. 러시아군 체코군으로부터 3만여 정의 무기 확보



이듬해 1919년 7월부터 청산리전투가 전개된 1920년 10월까지 선생은 중광단을 확대․개편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 정규병력 1천5백 명을 청산리전투 주역인 사관(士官)으로 양성하고 러시아·체코군으로부터 3만여 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상당히 겁을 먹고 주목했는데, 이들은 <북간도 지방의 항일단체 상황>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제 정규군 3천3백여 명이 사살당하는 청산리전투를 짐승처럼 예감하고 있었다.


‘…군정서는 서대파구(西大坡溝)에 근거를 두고 서일이 통솔한 단체로서 대부분 단군교도(대종교)이다. …그들 행동은 극히 흉포하여 부단히 선내지(鮮內地)에 대한 무력침습을 양언(揚言)하고 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 현천묵(玄天黙), 사령관 김좌진, 부사령관 김성(金成),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등이다. …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일하(一下) 동원소집을 할 수 있을 것이다.…’-일제의 <북간도 지방의 항일단체 상황>에서


# 1920년 10월 만주 청산리에서 침략자 일본군 상대로 연전연승, 괴멸 상태로 격퇴


일제는 이 같은 정보 하에 만주의 항일 단체들과 독립군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간도 지역으로 배치하였다.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단은 일제의 압력을 받던 중국 관리들의 강요로 본래의 근거지인 북간도를 떠나 허룽현 이도구 삼도구 등지의 삼림 지대로 근거지를 옮겼다. 일제는 이 같은 이동 정보를 파악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마침내 1920년 10월 20일 독립군에 대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선생이 이끌던 북로군정서군은 김좌진 장군의 지휘 하에, 그리고 대한독립군은 홍범도 장군의 지휘 하에 매복과 기습, 작전상 퇴각과 연합 공격 등 치밀한 작전을 벌이며 10월 26일까지 일본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다. 만주 허룽현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등지에서 벌어진 10여 차례의 전투 지역에는 거의 전멸되다시피 한 일본군의 잔해가 즐비했다. 이름하여 청산리대첩으로 일컬어지는 이 전투는 한국 무장독립운동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일대의 사건이었다.


청산리 전투 후 여러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령(領) 밀산(密山)으로 이동한다. 여기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서일·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홍범도 등 10개 부대는 전(全)만주 3천5백 병력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고, 선생이 총재로 추대되었다.


독립군 총재 서일씨 자장(自戕)

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 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소련영토 안에서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日)공사 요시자와의 위협에 소련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소위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이라는 참변이 발발해 독립군은 힘을 잃었다. 여기에 토비(土匪)들의 습격까지 겹쳤다.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 비분강개한 선생은 1921년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8일) 마을 뒷산 산림 속에서 자진(自盡), 순국했다. 41세의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은 처절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사진-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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