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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40] 이덕형을 추모키 위해 창건한 '용연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21 22:5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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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용연서원은 1691년(숙종 17)에 이사상(李師相) 등 남인계 유생들의 주도로 이덕형(李德馨)과 조경(趙絅)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했다. 이듬해인 1692년(숙종 18)에는 용연(龍淵)이라는 사액을 받았는데, 포천의 명소인 연못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음 이덕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화가로, 요직을 두루 지냈고 임진왜란 중에 큰 활약을 했으나, 영창대군 처형과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했다. 이덕형과 이항복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오성과 한음' 설화로 전한다. 이덕형은 서화를 잘했다고 전해지지만 현전하는 작품이 적다. 현전하는 그의 간찰을 보면 초서, 송설체, 행서를 모두 잘 썼다.



이덕형(李德馨)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화가로, 그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사제산인(莎堤散人), 사부(莎阜)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1561년에 태어났다. 이덕형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다. 이덕형의 증조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이수충(李守忠)이고 조부는 증(贈) 좌찬성(左贊成) 이진경(李振慶)이다. 이덕형은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했다. 남인(南人) 출신인 이덕형이 북인(北人)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덕형은 남인과 북인의 중간노선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




이덕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침착했고 문학에 능통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조선 전기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이덕형은 158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 관원이 됐고, 이후 정자(正字), 박사(博士),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583년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학문에 전념키 위한 휴가 제도인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이듬해인 1584년에 이덕형은 서총대(瑞葱臺)의 응제(應製)에서 수석을 했다.


응제는 임금의 명령에 응해 시문을 짓는 일을 말한다. 이덕형은 이후 부수찬(副修撰), 정언(正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됐다. 그는 1588년에 이조정랑으로서 일본 사신인 겐소(玄蘇) 등을 접대했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부제학(副提學),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등 여러 요직을 두루 지내고, 1591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대제학(大提學)을 겸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덕형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일본 사신과 화의를 도모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이덕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항복(李恒福)과 명(明)나라에 가서 지원군 요청에 성공했다. 전쟁 중에 이덕형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으로서 보필과 통역을 맡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훈련도감(訓鍊都監) 당상(堂上)을 역임했다. 1595년에는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 체찰부사(體察副使) 등을 지내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극혼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이후에도 이덕형은 명군을 위무했고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1601년에 그는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 체찰사(體察使)를 겸해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를 진행했다. 이 시기에 이덕형은 대마도 정벌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서화가인 허목(許穆)은 이덕형이 임진왜란 중 세운 공을 칭송하며 그를 ‘중흥명신’(中興名臣)이라고 칭했다.


이덕형은 1602년 영의정에 올랐고, 1606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됐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1608년에 진주사(陳奏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명나라에서 귀국한 후에는 다시 영의정이 됐다. 1613년 이덕형은 이항복 등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적극 반대했다. 이에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에서 이덕형 등의 처형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광해군이 이덕형 등의 관직을 삭탈해 이를 수습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덕형은 용진(龍津)에서 살다가 1613년 병으로 사망했다. 이덕형은 용연서원(龍淵書院)과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됐다. 이덕형의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이덕형은 어린 시절부터 이항복과 친했고, 임진왜란 중에도 함께 활약했고, 영창대군 처형과 인목대비 폐모론에 대해서도 입장을 같이 했다. 이들이 어렸을 때 했던 기발한 장난들에 관한 일화들이 ‘오성과 한음’ 설화가 됐다. 용연서원은 경기도 내에서 유일하게 남인세력의 근거지에 설립됐고, 이덕형이 임진왜란 때 세운 공로가 인정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사우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됐다. 1986년 이후 사당.내삼문.강당.외삼문.홍살문 등을 복원했으나 동재와 서재는 복원되지 않았다. 

포천은 이덕형의 외향(外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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