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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12] 만주 일본군 사령관 처단 계획 추진하다 체포된 ‘이희영’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24 00:11:21
  • 수정 2022-11-28 06: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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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이회영 李會榮. 1867.03.17 ~1932.11.17. 서울 서울, 독립장 1962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선생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손으로 명문세가(名門世家)의 후손임에도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났다. 약관 20세부터 신지식을 받아들여 평민적 사고(思考)와 행동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역사는 선생을 독립운동가 또는 아나키스트로 평가하고 있지만,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로 기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 9대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명문가 자손


이회영(李會榮, 1867. 3. 17 ~ 1932. 11. 17) 선생은 서구와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1867년 서울 남산골(苧洞)에서 이유승(李裕承)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다. 아버지는 이조(吏曹)판서를 지냈을 뿐 아니라 그의 10대조는 임진왜란 이래 다섯 번의 병조판서, 세 번의 좌.우정승과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다. 백사 이래 이유승(李裕承)에 이르기까지 9대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승·판서·참판을 지낸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이 가문에서 우당을 비롯해 형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과 아우인 시영(始榮) 호영(頀榮) 등 일곱 형제 중에 6명의 형제 50여 가족이 1910년 국치(國恥)를 당하자 모두 만주로 가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 6형제 50여 가족이 만주로 망명, 항일한 후 20여명만 살아남아


이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가문 차원의 헌신으로, 서양에서 말하는 단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가문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것)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하겠다. 만주와 상해 등 광활한 대륙에서 그들 형제가 인재양성과 독립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전 가족이 겪은 고초와 희생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석영.회영.호영 3형제가 만주와 중국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받아가며 장렬하게 순국했다. 해방 후에 아우 시영이 임정요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간 지나온 세월이 그들 가문에게 얼마나 잔혹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이들 형제 중 우당은 가장 먼저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고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대가족 망명 역시 우당이 주창했음은 물론이다. 형 석영도 말을 앞세우기보다 자기 살을 도려내서 실행을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6천 석(石)이라는 거대한 재산을 모두 독립 운동자금으로 내놓았다.


만주 삼원보 지역# 여동생이 청상과부가 되자, 관습 깨고 과감하게 재혼시켜


우당은 스무 살을 지나면서부터 집안의 노비에 대해 존대 말을 씀은 물론 평민으로 풀어주기까지 했다. 새로운 제도와 사상을 배웠으면 이를 즉각 행동에 옮긴 우당의 한 단면이다. 선생의 혁명가적 기질은 청상과부가 된 누이동생들을 개가(改嫁)시킨 데서도 나타난다. 당시 정서로서 판서 집 딸이 재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당은 아무도 모르게 누이동생을 시집으로부터 데리고 온 뒤 “이 판서 집 딸 아무개가 급환(急患)으로 죽었다”고 거짓 부고(訃告)를 냈다. 그런 후 간단하게 장사를 치르고 새 혼처를 찾아 개가(改嫁)를 시켰음은 물론이다. 


선생의 이 같은 풍모와 대인(大人)다운 행동은 만주 망명 후는 물론 이승을 떠날 때까지 일관되게 나타났다. 반상(班常)에 대한 차별적 언동을 고치고, 적서(嫡庶)의 차별을 폐지하고, 개가 재혼을 장려하는 등 선생의 혁명적인 사고 전환과 실천은 오늘에서 되돌아볼 때 실로 선각자가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이다.


선생은 21세 때인 1898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상재(李商在) 이상설(李相卨) 이범세(李範世) 서만순(徐晩淳) 조한평(趙漢平) 여규형(呂圭亨) 이강연(李康演) 등과 교류하면서 민중의 계몽, 신진 정치가들의 협력, 내치(內治)와 외교정책의 수립 등 기울어져가는 나라 일을 수습하려 힘썼다. 


선생은 이 같은 운동의 자금 조달을 위해 선산(先山)인 풍덕(豊德)에 인삼 밭을 경작, 경영했는데 1901년 채삼기(採蔘期)에 이르러 일인(日人)들이 작당, 착취.노략질해가는 것을 일경에 엄중 항의하는 한편, 당시 내장원경 이용익(內藏院卿 李容翊)을 통해 고종 황제에게 진언케 했다. 


이를 전해들은 고종은 선생을 “실로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예”라고 칭찬하고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를 제수했으나 강직한 선생은 벼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처럼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심이 없어 선생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혁명가의 길을 걸었음에도 어떤 단체.모임에서 장(長)을 맡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우당(友堂)은 아우 시영의 그늘에 가리워져 후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 아우 시영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독주에 맞서 부통령직을 스스로 헌신짝처럼 버림으로써 우당의 6형제들이 50여 가족들을 데리고 ‘솔가망명(率家亡命)’한 저력을 확실히 엿볼 수 있게 했다.


일본 영사관과 일본군 수송선 폭파, 청산리 전투 주역 배출한 불꽃 같은 삶송일본정부서(送日本政府書, 1922.7)


우당이 명문(名門)을 팽개치고 형제.가족들과 함께 온몸을 바쳐 독립투쟁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3.1운동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기이고, 둘째는 중국에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 이념과 노선에 따라 일제에 대한 테러 등 격렬한 운동을 전개한 시기이다.


송일본정부서(送日本政府書, 1922.7)이 과정에서 선생이 해온 일들을 꼽아 보면 이렇게 된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 운동(1898년),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규탄(1905년),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신채호(申采浩) 노백린(盧伯麟)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활동(1906년), 중국 동삼성(일제는 만주라고 불렀음)에 이상설 이동녕 등을 특파해 교포 자녀교육을 하게 한 서전서숙(瑞甸書塾) 개설(1907년), 서울 상동(尙洞)교회의 상동청년학원 개설(1908년), 농업 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자치단체 경학사(耕學社) 조직(1911년),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1912년), 재(在)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1924년), 항일구국연맹 조직(1931년) 등 하나하나 모두 놓칠 수 없는 투쟁을 거칠게 전개했다.


선생이 중국인 동지들과 함께 구축한 항일구국연맹은 생애 막바지에 사른 혁명의 불꽃이다. 상하이 북역사건, 아모이 일본영사관 폭파사건, 톈진항 일본군수물자수송선폭파사건, 톈진 일본영사관 폭파사건 등 잔인한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을 흔들기 위한 의거는 사명감 속에 계속 실행됐다. 이 같은 꺼지지 않는 독립 투쟁의 기운 속에 이듬해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폭탄투척의거가 실현된 것이다.


# 나이 65세에 만주 일본군 사령관 처단 계획 추진하다 체포돼 순국


그러나 1932년 11월. 당시 중앙일보(中央日報) 사회면에 실린 3단짜리 기사가 피압박 한국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배에서 나리자 경찰에 잡혀서 취조 중

류치장 창살에 목매 죽은 리상한 로인’



이 같은 기사의 실체는 즉각 확인되지는 않았다. 일경(日警)이 사실을 은폐하고, “그 노인이 이회영(李會榮) 선생”이라는 당시 소문을 극구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후 선생의 죽음은 사실로 판명됐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선생이 “유치장 안에서 빨랫줄로 목을 매 자결했다”는 일경의 발표는 거짓말이었다는 점이다.


선생은 다롄(大連)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65세 노인의 신체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몸서리쳐지는 고문을 받고 순국한 것이었다. 일제는 서둘러 화장까지 했다. 일(日) 군국주의의 서곡인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난 지 1년만의 일이다. 1932년 초 선생은 중국국민당을 찾아가 교섭해, 자금과 무기 지원을 약속 받았고, 11월에는 만주의 독립운동 지하조직을 굳건히 하고 만주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는 작전을 추진키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옮겨가려고 하던 차였다. 고통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고 땅을 치면서 통곡했다.


선생을 기리는 우당기념관이 1990년 세워졌고, 2001년에는 서울 종로구 신교동으로 옮겨졌다. 그의 묘소는 국립현충원에 모셔졌고, 2000년 중국정부는 우당 선생에게 항일혁명열사 증서를 수여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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