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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14] 의병 해산령에 눈물을 머금고 해산, 일본 대마도에 유배된 '최익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25 00:29:48
  • 수정 2022-11-28 06: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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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최익현 崔益鉉, 1833.12.05 ~1907.01.01. 경기도 포천, 대한민국장 1962


최익현(崔益鉉, 1833.12.05 ~ 1906.11.17) 선생은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盡忠報國)하였던 분으로서 구국의병항쟁의 불씨를 점화시켰을 뿐 아니라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 있으며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일제 강점기의 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됐다.


# 위정척사 사상을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으로 체계화


선생은 1833년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찬겸(贊謙)이고 호는 면암(勉庵)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이라고 했다. 선생은 집안이 가난해 4세때 단양으로 옮긴 것을 비롯해 여러 지방으로 옮겨 다니면서 살아야 했다. 14세때에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 이항노의 문인이 돼, 우국애민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했다. 23세 때에 명경과 갑과(甲科)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재임 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했다. 선생의 정치사상은 이항노 계열의 위정척사였고 공맹(孔孟)의 왕도정치구현을 이상으로 했다.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자 선생은 그 부당함을 상소했다. 이로 인해 고종의 신임을 얻어 호조참판이 된 뒤, 누적된 적폐를 바로 잡으려다 오히려 기득권층의 반발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됐다.


최익현상소문첩

1876년에는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면서 지부소(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리며 답을 기다리는 것)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당했고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1905년 소위 을사 5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와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 을사 5적(五賊)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晴討五賊疏)를 올린 일 등은 흐트러짐 없는 인간 최익현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1906년 2월 21일(양력 3월 15일), 선생은 가묘(家廟)에 하직을 고하고 집안사람들과 이별,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상소만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다시 한번 참담함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판서 이용원, 김학진, 참판 이성열, 이남규 등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국난에 대처할 것을 바랐으나 한 사람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선생은 애제자였던 고석진의 소개로 임병찬을 만나게 된다. 임병찬은 낙안 군수까지 지내다가 왜인들의 정치를 마다하고 사퇴한 올곧은 선비였다. 임병찬이 “호남의 선비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盟主)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고 고하자 선생은 남으로 내려가 영호(嶺湖)와 호서(湖西)가 기각의 행세를 갖춰 서로가 성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뜻을 굳힌 다음 거사에 앞서 세의 규합에 힘썼다. 이후 두 달 남짓 동안 거의(擧義)가 준비됐다. 시골 포수들로부터 총칼이 모아지고 2백여 명의 우국지사가 모여들었다.



崔益鉉의 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 강회(講會)로 민족혼 일깨워


4월 13일(양력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있은 선생의 강회(講會)는 항일의병의 역사적 분기점을 이룬 날로 기록된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 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死生)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불꽃에 민족혼을 일깨운 의병들은 이날 정읍에 무혈입성, 총칼과 탄환을 거두고 군사를 모집했다. 또한 일제의 16개 죄목을 들어 국권의 침략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통렬하게 지적한 장문의 규탄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 후 정읍에서 흥덕으로, 다시 순창 구암사에서 순창 읍내로 행군했을 때에는 의병의 수가 5백여 명을 넘게 됐다. 힘을 얻은 선생의 의병들은 파죽지세로 곡성을 거쳐 남원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으나, 순창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남원방비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병은 8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4월 20일(양력 6월 11일), 광주 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보내 황제의 칙지를 전해왔다. 선생은 큰 기대를 갖고 이를 펼쳐 보았으나 그 내용은 엉뚱하게도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의병 해산령에 눈물을 머금고 해산, 일본 대마도에 유배율수재고 표지

율수재고 표지선생은 “이미 소장(疏狀)을 올려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말씀 드렸으니, 나의 진퇴는 관찰사의 직권으로 지휘할 바가 아니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남원 진입을 꾀했다.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왜군이 아니고 우리측 진위대(鎭衛隊)임이 확인됐다. 진위대 측은 “대감이 민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통보를 세 차례나 보내왔다. 선생은 괴로워했다. 선생은 임병찬에게 동포끼리 서로 박해를 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 쉽사리 흐트러지지 않던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했다. 선생 곁에 끝까지 남은 의병은 12명뿐이었다. 4월 23일(양력 6월 14일), 선생 등 의병 일행은 서울로 압송돼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대마도 감금 3년’은 그렇게 시작됐다. 선생은 1906년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단식끝에 한 많은 적지에서 숨을 거뒀다.


대마도일기


1906년 11월 20일(양력 1월 4일) 일본 대마도 수선사(修善寺)에서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 후 이틀 후에 부산 초량에 닿았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유림시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나와 맞았고 영구(靈柩)를 붙들고 통곡했다. 상여가 마련돼 정산(定山) 본가로 운구하는 곳에 따라 노제로 전송하고 울부짖는 민중들 때문에 하루에 10리 밖에 운구하지 못했다. 영구는 구포, 김해, 성주, 공주를 거쳐 15일 만에 정산에 도착해 그 해 4월(양력 5월) 노성 무동산에 안장됐다. 위대한 유학의 거봉(巨峰)이요 항일의 선봉이 돼 독립운동의 선구자가 된 선생의 충혼은 영원히 불멸의 빛이 되어 오늘에 사는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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