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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16] 두만강 건너 일군 수비대 습격, '琿春호랑이'라는 별명 얻은 '황병길'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1-26 07:12:51
  • 수정 2022-11-28 06: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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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황병길 黃炳吉, 1885.04.15 ~1920.06.01. 함경북도 경원, 독립장 1963


경술국치 이전부터 연해주, 훈춘 등지에서 무장항일 활동을 전개했고 훈춘시 3․1만세의 평화적인 시위를 주도했던 지도자였다. 일신을 돌봄이 없이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적인 무장항일 활동을 하다가 1920년 6월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 함북 경원에서 출생


중국 훈춘(琿春)지역의 3.1운동 지도자 황병길(黃炳吉) 선생은 일반 국민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선생은 1885년 4월 15일(음) 함북 경원군 양하면에서 출생해 20세까지 고향에서 생활했다. 소년시절에는 향학열이 높아 가세형편으로 서당에 다닐 수 없었으나 동료들의 글읽는 모습을 넘보면서, 또는 훈장이 읽는대로 따라 읽는 등으로 독학했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1904년에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가 급격하게 그 세력을 팽창시켜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자행,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노령 연추(露領 煙秋) 지역으로 망명했다.


1905년 을사5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때를 전후해 많은 애국청년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만주, 연해주 등 해외로 망명해 항일 무장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훈춘지역 일대에서 1908년 러일전쟁 전의 우리나라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인 이범윤(李範允)의 사포대(射砲隊)에 참가했고 안중근, 최재형이 지휘하는 의병대에 속해 두만강을 건너 회령, 온성, 경원지방을 여러 차례 공략했다.


황씨의 의거# 두만강 건너 일군 수비대 습격, '琿春호랑이'라는 별명 얻어


특히 경원군 신아산(新阿山) 주둔 일군 수비대를 습격했을 때는 혼자서 일군 14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거두어 '훈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琿春義勇隊組織'1919년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훈춘에 거주하고 있던 선생은 노종환(盧宗煥).양하구(梁河龜)와 함께 거사계획을 수립, 3월 20일에 훈춘의 전시민이 자진철시하는 가운데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위군중 5천여 명이 모여 3.1독립선언 축하민중대회를 개최했다.


# 대규모 3․1독립만세의 평화적 시위 주도


이 대회에서 5천여 명이나 되는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시가행진을 했는데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질서정연하고 평화적인 시위가 이뤄졌다.


이어 3월 30일에는 훈춘현(琿春縣) 한덕자(漢德子)에서, 4월 1일엔 탑도구(塔道溝)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자질을 과시했다.



不逞鮮人의 동정에 관한 건# 애국부인회를 조직 군자금 모집과 부상독립군 치료 등 총체적인 독립운동 펼쳐


1919년 3월말에는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했고 같은 해 9월에는 훈춘 거주 여성들로 하여금 훈춘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밖에도 조직들을 활용, 군자금 64루블 모금과 전상병자의 치료, 구제사업 등을 전개하는 등 총체적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또한, '급진단(急進團)'을 영도하면서 노령지역에서 무기를 확보하는 데 힘써 소총 1백 3자루, 탄환 5천여 발, 군자금 85만 6천여 루불을 조달하기도 했다.


혼춘에서 독립단이 대활동 황병길씨의 열렬 용감그뿐 아니라 군정사후원회 숭례향(崇禮鄕)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20년에는 군무부장(軍務部長)이 되어 국내로 진격, 고건원(古乾源), 용당(龍堂), 경흥(慶興) 일대에서 왜정기관을 폭파하고 왜밀정을 주살하는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 일제에게는 '목의 가시', 오직 독립투쟁으로 일관


이같이 선생의 독립운동이 치열해지자 일제 영사관 측은 "모든 반일투쟁이 황병길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면서, "그는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니 체포에 총력을 집중하라"고 전 일경(日警)에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일제에 있어 '목의 가시' 같은 존재가 됐다.


일제는 그들의 앞잡이를 총동원, 선생의 은신처를 찾아 헤매다가 토문사(土門寺) 북쪽 숲속에 있는 초막을 발견하고 포위망을 압축시켰다.


이날은 억수같은 폭우가 내렸는데 선생은 칠흑 같은 어둠을 이용, 포위망을 뚫고 어느 농가에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黃丙吉의 病死 보고의 건그러나 선생의 몸은 이미 지칠대로 지치고 설상가상으로 급성폐렴까지 얻게 됐다.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이같은 급보를 비밀리에 전해 들은 부인 김숙경(金淑卿)은 70리 길을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러나 깊은 산속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죽음을 감지한 선생은 유언을 남겼다.


"우리나라가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굳세게 싸우시오"


1920년 6월 1일, 선생의 나이 고작 35세였다. 너무나 짧은 일생이었다.


선생이 가신지 어언 105년, 지금도 훈춘(琿春)지방에서는 선생이 영웅으로 추앙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아는 이가 드문 실정에 있다.


# 1992년 유해봉환, 국립묘지 안장


1992년 중국과의 수교에 따라 유가족의 희망으로 훈춘(琿春) 연통랍자(煙筒柆子)에 안장됐던 선생의 유해를 모국으로 봉환하고 12월 10일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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