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93] 일하는 동작, 새로운 변화 '동작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1-28 14:48:13
  • 수정 2024-03-14 06:47:37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서울특별시 동작구는 동쪽으로 서초구, 서쪽으로 영등포구, 남쪽으로 관악구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한강 건너 용산구와 영등포구 여의도와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6°45'∼126°59', 북위 37°28'∼37°30'이다. 면적은 16.35㎢, 인구는 40만 641명이다.(2015년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15개 행정동(9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2동에 있다.


동작구청 전경# 자연환경


동작구 상징몰 국화/국화, 기품과 온화함을 느끼게 함.(화합과 온화라는 뜻이 있음)/여러 송이의 꽃이 서로 어울려 탐스럽게 피며 그윽한 향기로 우리의 마음을 온화하게 하고 늘 주변에 있어 친근감을 주는 꽃으로 동작구민의 성품을 나타낸다.(사진출처-동작구청 홈페이지 캡처)동작구에 위치한 명수대(明水臺) 부근은 한강의 심한 곡류로 인한 공격사면(攻擊斜面)으로 침식을 많이 받아 침식애(侵蝕崖)가 발달해 있다. 또한 동작천은 북쪽으로 흐르다가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여의도의 샛강은 영등포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작구의 연평균 기온은 13.3°C이다. 1월 평균기온은 0.4°C, 8월 평균기온은 26.5°C이고, 연 강수량은 1212.3㎜이다.


# 역사


동작구는 한강을 끼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신석기시대 이래 사람들이 거주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작구 지역 내에서 선사시대에 해당되는 토기와 유구 등이 출토된 바 있다. 특히 신석기시대에는 사람들이 강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생활했기 때문에 한강을 끼고 있는 동작구 지역은 이러한 점에서 사람들이 활동하기 좋은 생활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사홍의 노량진(18세기)

삼국시대에 들어와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주민들은 주로 현재의 가락동이나 몽촌토성 주위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영토 확장 정책에 의해 동작구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게 됐다. 이때에는 행정구역 상으로 고구려 남부에 속해 대방동.신대방동.상도동 지역은 잉벌노현(仍伐奴縣)에, 노량진동.동작동.사당동.흑석동 지역은 율목군(栗木郡)에 속해 있었다.


이후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면서 행정조직이 주군현(州郡縣) 단계로 정비됐고, 고구려에 속했던 동작구 지역도 새로운 지명으로 바뀌었다. 즉 잉벌노현은 곡양현(穀壤縣)으로, 율목군은 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됐다. 


이를 지명상으로 볼 때 현재의 대방동 지역은 농업 지역이었을 것으로, 노량진 동쪽 지역은 밤나무가 많았던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시대에 와서 진(津)이라는 명칭이 시작된 것으로 보아 노량진 일대에 나루터가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노량진 나루터 표지석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지방의 행정명칭이나 체제도 다시 바뀌게 됐다. 940년(태조 23)에는 전국 주군현의 명칭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곡양은 금주(衿州)로, 율진군은 과천(果川)으로 개칭됐다. 또한 1018년(현종 9)에는 행정구역을 개편해 금주를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에, 과주(果州)는 광주목(廣州牧)에 속하게 했다. 


금주현은 995년(성종 14)에 단속사(團束使)를 설치했던 곳이었으나, 이를 없앤 1005년(목종 8) 이후부터는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군현에는 중앙정부의 관리가 파견된다는 전래에 근거할 경우, 금주현과 광주군에는 감무(監務)라는 지방관이 파견되기 전까지 호장(戶長)이 지역을 책임지면서 중앙정부의 간접적인 관리를 받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금주현은 명종 이래로 행정구역상의 큰 변화는 없었으나, 과주군은 1308년(충렬왕 34)에 용산처(龍山處)가 부원현(富原縣)으로 승격돼 분리됐다.


동작구 상징물 소나무/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는 충절의 고장 동작구의 이미지를 잘 표현/언제나 변함없는 선비적 성품을 나타내고 우리구의 사육신묘와 국립묘지등과 어울려동작구민의 꿋꿋한 기상을 표현한다.(사진출처-동작구청 홈페이지 캡처)1018년(현종 9) 실시한 행정구역 개편에서 ‘경기’라는 행정명칭이 최초로 생겨 관심을 끈다.  초기에는 임진강 이북 지역을 관할해 장단현령이 그 책임을 맡고 상서도서의 직속으로 했으나 1069년(문종 23)에 와서 현재의 경기도 지역과 유사한 행정구역을 흡수했고, 이때부터 금주군과 과주현은 경기도라는 행정구역 속에 포함됐다. 1390년(공양왕 2)에는 다시 경기도 좌도와 우도로 나뉜다. 현재의 동작구는 경기도 좌도에 속하게 됐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에도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 경기도는 고려시대에 좌우도로 나누었던 행정구역을 다시 합해 경기좌우도라고 했다. 또한 대대적인 읍호개정(邑號改正)이 실시돼 ‘일주’를 산이나 천으로 고쳤다. 이에 따라 금주(衿州)는 금천(衿川)으로, 과주(果州)는 과천(果川)으로 바뀌게 됐다. 


현재의 동작구 전지역은 과천현 상북면과 하북면에 속했다. 특히 이 두 면은 과천현 전체 인구의 33%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한강의 동작진을 통해 사당동을 거쳐 남태령으로 통하던 삼남대로 변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현재의 대방동길보다는 동작동을 거쳐 사당동으로 가는 길이 중심로였음을 알 수 있다.


1795년(정조 19)에는 행정명칭의 변화가 있었다. 금천이 시흥(始興)으로 변경됐다. 이후부터 금천이라는 명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됐고, 현재까지 시흥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지게 됐다. 또한 시흥군에 속한 과거 상도리(上桃里)의 표기가 다시 상도리(上道里)로 개칭됐다. 


동작구 상징물 백로/백로/청아하고 고결한 기개로 동작구민의 높은 기품을 상징, 노량진의 어원이 된 새로 청아한 모습으로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고 세상 속에 물들지 않는 깨끗함과 고고함을 간직해 동작구민의 높은 기품을 상징한다.(사진출처/동작구청 홈페이지 캡처)한편 과천현 상북면에 속해 있던 동작리(銅雀里)는 현내면(縣內面)으로 통합됐다. 현재의 장승배기를 기점으로 시흥군과 과천현이 경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같은 동작구에 속해 있으나 이러한 행정구역의 분할은 정조 이전부터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동작구 대부분은 과천현 하북면에 속해 있었고 특히 이 지역에서 옹기를 굽고 판매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5년(고종 32)에는 칙령 98호로 지방행정제도와 명칭이 개혁됐다. 이때 동작구가 속해 있던 지역인 과천현은 과천군으로 바뀌게 됐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1호 ‘도의 위치·관할구역 및 부군명칭.위치.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행정구역 개편이 실시됐다. 이때 과천군에 속해 있던 동작구 지역은 시흥군 북면으로 통폐합돼 자연부락 단위로 설정돼 있던 마을들이 행정단위로 정착하게 됐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영등포에 있던 북면사무소가 영등포의 읍 승격과 함께 노량진으로 이전했고, 1936년에는 사당동을 제외한 동작구 전 지역이 경기도에서 경성부로 편입됐다. 1936년 4월 1일부터 시행된 부령 제8호 ‘부군의 명칭.위치.관할구역 개편’에 의거해 이들 지역도 서울이라는 행정구역의 일원이 돼 영등포출장소가 관할하게 됐다. 이때 사당리는 시흥군 신동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43년 부령 제1163호에 의해 출장소제도가 폐지되고 구제로 바뀌게 되면서 사당동을 제외한 동작구 전지역이 영등포구에 편입됐고, 동의 명칭도 정(町)으로 명명됐다.


서울 국립현충원/사진출처-국립현충원 홈페이지 캡처 광복 후인 1946년에는 일본식 동의 명칭인 정(町)이 원래의 동(洞)으로 환원됐고, 1949년 8월에는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이 이뤄져 경기도 시흥군 동면의 번대방리가 영등포구로 편입됐다. 그리고 사당리는 1962년 12월에 공포된 서울특별시조례 제276호에 의해 영등포구 신동출장소로 편입됐다.


1973년 7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6548호에 의해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구됐고, 관악구는 영등포구의 동쪽 지역을 분할해 현재의 동작구 전지역과 봉천동.방배동.신림동을 포함한 지역이 됐다. 이후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관악구를 분구해 동작구가 신설됐다.


동작구는 구 전체가 거의 주택지대로, 흑석동.본동.노량진동 일대는 개발연대가 오래된 주택이 많은 재개발지역이다. 상도동은 1960년대 초반, 서울에서 최초로 국민주택단지로 개발한 곳이고, 사당동은 중산층 주택지로 개발됐다. 또한 구로공단과 인접한 신대방동 일부에는 공업지대가 형성돼 있다. 한편 본동에 사육신묘(死六臣墓), 동작동에 국립묘지가 있어 쾌적한 주거환경을 이루고 있다.


# 유물.유적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84년 지정)동작구에 자리한 문화재로는 사육신 묘(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양녕대군 이제 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창빈 안씨 묘역(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 효간공 이정영 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94년 지정), 조석견과 완성군 이귀정 묘역(서울특별시 기념물, 2001년 지정), 부안군 이석수 묘역(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2005년 지정),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84년 지정), 독립투사 강우규(姜宇奎)를 비롯한 178위(位)의 애국지사 묘가 있는 충렬대 등이 있다. 


수죽정공 신도비와 제곡정공 신도비는 각각 198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으나 2008년 지정 해제됐다. 


불교문화재로는 사자암 지장시왕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5년 지정), 지장사 철불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이 있다. 사자암 소장 불화로 지장시왕도, 신중도, 영산회괘불, 현왕도는 19세기 후반 서울.경기 지역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장사 철불좌상은 고려시대 철제 여래좌상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용양봉저정(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현판

용양봉저정(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은 조선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묻힌 화산(華山) 현륭원(顯隆園)에 거둥할 때 노들강[漢江]에 배다리[舟橋]를 놓고 건넌 다음, 잠시 어가(御駕)를 쉬기 위해 지은 누정이다. 건조연대는 1879년(정조 13)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박물관

청동기시대의 구리거울인 정문경(국보, 1971년 지정)한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박물관에는 청동기시대의 구리거울인 정문경(국보, 1971년 지정), 전 영암 거푸집 일괄(국보, 1986년 지정) 등 13점이 있고,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소장돼 있다. 이밖에 19세기 후반 최한기가 제작한 지구의(보물, 1986년 지정)와 안중근의사 유묵(보물, 1972년 지정)이 있고, 기상청에는 금영 측우기(보물, 1971년 지정), 대구 선화당 측우대(국보, 2020년 지정)가 소장돼 있다.


노량진동에는 사충서원(四忠書院) 터와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있다. 사충서원은 1721년(경종 1) 신임사화 때 노론 4대신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이이명(李頤命)을 모신 곳으로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한편 민절서원은 사육신을 모신 서원이다.


북청사자놀음 본동에는 노강서원(鷺江書院)이 있는데,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죽은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를 모신 서원이다.


그밖에도 동작구에는 북청사자놀음(국가무형문화재, 1967년 지정), 종묘제례(국가무형문화재, 1975년 지정), 유기장(국가무형문화재, 1983년 지정) 등이 전해지고 있다.


# 교육.문화


동작구는 예로부터 충신들이 많이 배출된 충효의 고장이고, 다양한 문화축제를 통해 전통과 현대가 함께 하는 수준 높은 문화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다.


중앙대학교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1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 7개교, 특수학교 2개교가 있고, 중앙대학교, 숭실대학교, 총신대학교 등 3개 대학과 대학원 29개가 있다. 서울삼성학교는 청각장애인 특수학교, 광성해맑음학교는 장애인 특수학교이고, 직업학교로는 한국직업전문학교, 원화직업전문학교, 한독간호학원, 소망직업학교가 있다.


동작문화복지센터, 사당문화회관에서는 문화교실을 실시해 사회교육에 앞장서고 있고, 동작도서관과 동작구 사이버어학당, 사이버도서관이 운영되고 있다.


사당문화회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안면도 동작휴양소문화시설로는 공연장, 문화의집,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등을 비롯해 지역문화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동작문화원과 동작문화복지센터가 있다. 구민회관 대강당은 종합공연장 구실을 해 연극.영화와 음악회 공연이 있다. 특히 보라매공원 내에 위치해 주민들의 복합 문화생활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사당문화회관은 안면도에 동작휴양소와, 경기도 화성시에 동작추모의 집(납골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보라메공원 내에 위치한 동작구민체육센터지역언론기관으로는 동작구구보, 동작구소식, 동작인터넷방송, 동작구뉴스매거진이 있다. 이밖에 동작구에는 구립합창단이 조직돼 정기적으로 공연을 열고 있으며, 2005년에는 동작소년소녀합창단이 창단돼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 동작구에 위치한 여성사 전시관은 여성의 삶의 역사를 다룬 전문전시관이고,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중앙대학교 박물관 등이 박물관.미술관의 기능을 하고 있다.


체육시설로는 보라매공원 내에 위치한 동작구민체육센터가 있어 골프, 체육관, 헬스장, 수영장 등 다목적실을 갖추고 있고, 흑석체육센터는 수영장, 체육관, 관람석을 갖추고 있다.


# 민속


남묘사당동에는 관운장묘인 남묘(南廟)가 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서울에는 4개의 묘가 세워지게 됐는데, 이 중 하나가 남관왕묘(南關王廟)이다. 이밖에 동작구에는 본동 용궁당, 노량진1동 서낭당과 부군당, 노량진2동 대방(大方)장승, 상도1동 서낭당, 상도1동 도당, 흑석1동 도당, 흑석2동 산신당, 흑석동 산신제 등 국가와 마을의 안녕과 개인의 구복을 비는 용궁당(龍宮堂), 도당(都堂), 산신제(山神祭)가 전해지고 있다.


# 설화.민요


동작구에는 박태보(朴泰輔)가 노강서원(鷺江書院)에 모셔진 일과 관련해 전해지는 설화가 있다. 설화는 다음과 같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로웠고, 얼굴이 남중일색(男中一色)이었다. 어느 날 참판 이종엽(李宗燁)의 집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어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를 해보았다. 


노강서원/1695년(숙종 2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숙종 15년의 민비(閔妃) 폐출 때 죽음으로써 이를 충간(忠諫)하였던 박태보(朴泰輔)를 기리기 위해 노량진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해 남편 서계공(西溪公)에게 아들을 좀 달래보라고 청했다. 그리하여 그 부친이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라 훈계했고 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 여인은 박태보의 양친을 뵙고 스스로 머리를 쪽지어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이 흘러 박태보가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동작 구름카페1689년(숙종 15)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해 왕이 중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直言)을 잘 하던 박태보는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을 가게 됐다. 그러나 귀양지로 가는 길에 국문시 입은 장독(杖毒)과 화상(火傷)이 심해 친구 집에 있는 노량진에 머무르게 됐다. 


이때 어느 여인이 찾아왔는데 그 방문객은 바로 예전 박태보를 사모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멀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해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 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울고 또 울다가 일어나 나갔는데, 이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달아 싸늘하게 죽어갔다고 전해진다.


# 산업.교통


노량진수산물도매시장/수도권 지역의 수산물 판매, 저장, 가공시설을 모두 갖췄다.동작구는 전체면적이 16.35㎢로 이 중 4.2%가 녹지지역이다. 상업지역은 1.7%에 불과하고 94.1%가 주거지역으로 이뤄져 있다. 동작구는 시가지역 또는 풍치림(風致林), 공원 등으로 이뤄져 있어서 농업은 물론 산업도 특기할 만한 것은 없다.


구로공단과 인접한 신대방동 일부에는 공업지대가 형성돼 있는데 한국모방, 태평양화학, 신화방직, 유한양행 등의 큰 공장이 있고, 이외에 전기.전자기구공장이 있다. 1973년 ‘농수산물 도매시장법’에 따라 노량진 수산시장이 수도권 지역의 수산물 판매, 저장, 가공시설을 모두 갖추게 됐다. 


서울에서 거래되는 전체 수산물 중 49.5%의 물량이 이곳에서 거래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인 관광객 등이 연간 1만여 명이나 찾아오는 국제적인 시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현재도 노량진 전철역은 시내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는 대표적인 곳으로 가장 붐비는 전철역의 하나이지만 이 지역을 중심으로 입시학원과 고시학원 등이 밀집돼 있다.


한강철교1900년(광무 4)에 한강철교가 준공되고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동작구 지역에서 나루는 점차로 자취를 감추게 됐다. 1910년 용산구 한강로와 동작구 본동을 잇는 한강대교(제1한강교)가 건설됐고, 한국전쟁 이후 한강인도교가 가설됐으나 영등포구.구로구.동작구 등 강남 지역의 도시 확장과 인구 증가에 따라 1981년 한강대교가 건설됐다.


동작대교동작대로는 서울 남북을 가로질러 남부순환로와 이어져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고, 상도터널이 한강대교와 일직선으로 뚫리면서 도심과 원활한 교통이 이뤄졌다. 또한 용산구 이촌동과 동작구 동작동을 잇는 동작대교가 건설됨으로써 전철 복선 차도가 중앙에 설치된 중앙부 전철교 위로 지하철 4호선이 운행된다. 


이 지역에는 여러 교량이 있어 한강 이북과의 교통을 원활하게 연결해주는 한편, 구 내외를 동서남북으로 연결해 주는 도로들이 구내를 원활히 연결해 주고 있다.


시흥대로는 신대방동을 통과해 남쪽의 경수산업도로와 이어진다. 한편 동작구에는 구 내외를 동서남북으로 연결해주는 대방로, 현충로, 노량진로, 관악로, 상도동길, 신림로, 사당로, 장승배기길, 강남3로, 강남4로, 올림픽대로 등이 있다.


# 관광


국립현충원/동작구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수호지사를 모신 국립현충원과 조선시대 충신의 상징인 사육신묘가 있고, 옛날 선조들의 수호신인 장승이 서 있던 마을 장승배기, 양녕대군이 올라가서 국사를 걱정했다는 국사봉, 정조가 사도세자 묘역을 참배할 때 강을 건너 잠시 쉬어가던 용양봉저정, 우리나라 철도의 시발지인 노량진역 등 수많은 명소가 위치하고 있다.


사육신묘 사당또한 사육신 추모제향, 장승배기 장승제, 노들 한마당축제 등 구민과 함께 어울리는 다양한 문화축제를 통해 전통과 현대가 함께 하는 수준 높은 문화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이와 함께 동작구에는 노량진중앙시장, 사당시장, 사당중앙시장, 삼거리시장 등 14개의 민속시장이 있다. 노량진역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노량진수산시장, 남쪽으로 노량진중앙시장, 동쪽으로 사육신묘, 서쪽으로 학원가가 자리하고 있고, 학원가를 중심으로 음식점과 기타 서비스 관련 산업이 활발하다.


장승배기 장승/일제가 철거한 장승을 동민이 다시 세우고 장승제를 지낸다. 한편 사육신추모제향이 매년 개최된다. 사육신의 충절과 드높은 선비정신을 기리는 전야제 행사로 사육신의 혼을 부르고 영혼을 달래는 살풀이춤, 사물놀이굿, 판소리, 단종 복위 모의과정을 재연한 무용극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장승배기 장승제도 매년 개최되는데 일제가 철거한 장승을 동민이 다시 세우고 장승제를 지내는 민속을 되살리는 전통놀이이다. 또한 동작구민의 날 축제, 구민노래자랑(노들가요제), 구민체육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린다./다음 호에 계속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