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독립유공자를 찾아서 23] 붓으로 일제의탄압에 저항한 '정인보'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02 05:59:33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정인보 鄭寅普, 1893.05.06 ~(1950.11). 서울 서울, 독립장 1990


일제가 날조한 역사 대신 우리의 역사 속에 흐르는 ‘얼’을 강조하는 ‘얼사상’을 주창했던 위당 정인보 선생. 젊은 시절 중국 땅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했고, 귀국 후에는 붓과 펜으로 일제와 싸웠다.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역사 연구에 몰두하면서 “일언(一言)·일사(一事)·일행(一行)·일동(一動) 깡그리 골자(骨子)가 ‘얼’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선생은, 국학(國學) 보급과 민족문화 앙양에 일생을 바쳤다.


# 재산과 젊음을 독립운동에 바치다


정인보(鄭寅普, 1893.5.6 ~ 1950.11.) 선생은 1893년 5월 6일 서울 종현(鍾峴, 현 명동성당 부근)에서 호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정은조(鄭誾朝)와 어머니 달성 서씨(達城徐氏)의 독자로 태어나 후손이 없는 큰집의 양자로 들어간다. 본명은 인보(寅普)이고 어렸을 때 이름은 경업(經業)이라 했다. 자(字)는 경시(京施)라 하고 호(號)는 위당(爲堂)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이 능숙하고 재기가 넘쳐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총애를 받으면서 자랐다. 1910년 17세 때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난곡 이건방(蘭谷 李建芳)으로부터 한국화한 양명학을 배워 학문과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11년과 1912년 두 차례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넌 선생은, 중국 동북성 회인현(懷仁縣) 흥도촌(興道村)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곳에서 독립기지를 건설하고 있던 이회영(李會榮) 형제를 만나게 되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부평의 전답을 팔아 신흥강습소 등 이회영 형제의 독립군양성소를 위한 군자금으로 지원했다.



선생은 1913년 중국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어 일제와의 투쟁을 다짐하는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김규식(金奎植) 등 많은 청년애국지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이들과 비밀결사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조국광복운동에 정열을 바치는 한편, 굶주림과 외로움을 견디면서 동서양의 많은 서적을 탐독하여 연구에 몰두했다.


# 한평생 검은 옷으로 지조를 지키다


선생은 부인 성씨(成氏)가 동년 9월에 첫딸을 출산한 후 엿새 만에 산고로 타계했다는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검은색 한복과 모자, 검은색 안경과 고무신 차림으로 다니게 됐다. 이것은 부인을 애도하는 뜻뿐만 아니라, 나라 잃은 슬픔을 조복으로 나타내어 독립에 대한 염원이 변치 않았음을 보이고자 한 것이었다.


지산외유일지선생은 1922년 4월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초빙을 받아 조선문학론과 한문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 후 중앙불교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국학 및 동양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환기시키는 한편 '동아일보'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면서 민족사관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일본인들의 왜곡된 학설에 철저히 반론을 제기함은 물론 우리 고대사의 심층연구를 위해 안재홍(安在鴻), 신채호(申采浩), 문일평(文一平), 손진태(孫晋泰) 등과도 힘을 합쳤다.


# 붓으로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다


선생은 1926년 융희 황제가 서거하자 6.10만세운동을 지원했고,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창립, 현충사를 중건했고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실었다. 이후 같은 신문에 ‘단군 개천’, ‘5천년간의 조선의 얼’을 연재했고 실학연구를 위한 학문행사도 주도했다. 1937년 '경훈훈민정음서' '훈민정음운해해제' 등을 저술해 국학보급과 국어 보존에 기여했다. 그 해 7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일어교육을 강요하자 연희전문학교에서는 선생이 강의하던 조선문학과목이 폐지됐다.


담원시조 본문1940년 10월에는 중앙중학교의 노국환(盧國煥), 조성훈(趙成勳), 황종갑(黃鍾甲), 이기을(李氣乙), 유영하(柳永夏) 등이 중심이 돼 소위 ‘5인 독서회’가 조직됐다. ‘5인 독서회’에서는 선생을 비롯해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등으로부터 역사연구를 명분으로 국제정세와 조국독립에 관한 강의를 듣는 등 독서회 운동을 진행했는데, 활동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황종갑의 편지가 일제의 검열에 발각됐다. 이로 인해 선생도 적지 않은 고초를 당했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기에 이르자 선생은 견딜 수 없는 모욕감 속에서 “얼은 암흑 속에 사라지는가. 이제 어디에서 우리의 얼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가증하다”고 말하며 더 이상 교편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병을 핑계로 휴직을 한 뒤, 1943년 가족을 이끌고 전북 익산군 황화산(皇華山)으로 들어가 산중 생활을 했다.


담원국학산고 본문

여유당전서 본문# 국학대학을 설립해 국학진흥에 힘쓰다


1945년 마침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게 되자 선생은 서울로 귀경goT다. 이후 선생은 일제하의 식민정책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연면하게 이어온 국학을 부흥, 발전시키기 위해서 국학대학을 설립했다. 일제로 인해 단절된 우리 얼을 선양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사연구(1946)국학발전에 몸 바치고 있던 중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감찰위원회가 구성됐고, 선생은 여러 인사의 천거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으로 새 정부의 감찰위원장에 취임, 관기 확립 및 부정부패 일소에 나섰다. 그러나 취임 1년이 지날 즈음 뜻하던 바가 자신의 의지로는 이루어 질 수 없음을 깨닫고 감찰위원장 자리를 떠났다.


다시 국학대학장에 돌아온 선생은 더욱 우리 얼을 밝혀내는 데 정진했고, 국학대학장을 그만둔 뒤 서울 회현동에서 역사연구와 집필생활에 몰두하다 6.25전쟁을 맞았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선생은 1950년 7월 북한으로 납치돼 한동안 생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그 해 11월 사망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성공의 길을 찾아서더보기
 황준호의 융합건축더보기
 칼럼더보기
 심종대의 실천하는 행동 더보기
 건강칼럼더보기
 독자기고더보기
 기획연재더보기
 인터뷰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