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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64] 달량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한온의 위패를 모신 장흥 죽천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03 03:49:33
  • 수정 2024-03-14 08: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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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장흥 죽천사는 1688년(숙종 14)년 최초 충렬사로 건립됐다. 이는 임진왜란의 전초인 달량진사변 당시 장흥부사로 왜구를 토벌하다 순절한 한온과 임진왜란시 왕이 의주로 피난할 때 근왕하면서 충성을 다한 청계 위덕의를 배향한 사우였다.


이후 새로 장흥읍 충렬리의 충렬사에 한온의 위패를 이안함에 따라 청계공만을 독향하게 돼 사우의 명칭도 죽천사로 바뀌었다.





재 죽천사 강당인 양춘재(陽春齋)는 죽천사 복건 이전 조선후기부터 장흥위씨 재실로 사용돼 왔고 현 건물은 1917년 중건됐다.


한온은 1511(중종 6)∼1555(명종 10).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군수(君粹). 관직은 가덕첨사·장흥부사에 이르렀다.


1555년(명종 10) 왜적이 왜선 60여척으로 전라도 달량진(達梁鎭)에 쳐들어오자 장흥부사로 절도사 원적(元績),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달량진을 구원하기 위해 갔으나 왜적이 거짓으로 도망했다.




이에 절도사 원적이 입성, 방비했다. 적의 수가 너무 많고 원병이 오지 않은 데다가 3일이 지나자 식량이 떨어져 군사들로 하여금 옷과 모자를 벗어 항복하는 모양을 취하도록 했으나, 왜적이 세가 약함을 알고 공격헤 성이 함락되고 절도사 원적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뒤에 그의 죽음에 대해 남주역의 벽에 “장흥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듯이 슬퍼하니 한공(韓公: 韓蘊)의 어진 정치를 알겠도다”라는 시가 붙여졌던 것으로 보아 그가 덕정(德政)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1683년(숙종 9)에 읍인(邑人)들이 건립한 충렬사(忠烈祠)에 봉사(奉祀)됐고, 병조판서에 증직됐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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