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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25] ‘청포도’ 등 30여 편의 시를 발표해 민족의식 일깨운 '이원록'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05 19: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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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이원록 李源祿, 1904.04.04 ~1944.01.16. 경상북도 안동, 애국장 1990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선생의 시 ‘광야’ 중에서 -


# 경북 안동 출신으로 신의와 의리가 강한 선비로 알려지다


이육사 선생[본명 이원록, 1904. 4. 4(음력) ~ 1944. 1. 16]은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아은처사인 부친 이가호와 모친 허길 사이에서 5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고 본명은 원록(源祿)이나 후에 원삼(源三) 또는 활(活)이라 했고, 자(字)는 태경(台卿), 아호는 육사(陸史)이다.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우애가 지극했고 용모는 청수하고 깨끗한 선비형으로서, 한번 사귀면 생사를 같이 할 만큼 신의와 의리가 강했다고 한다. 12살이 되던 해에 조부 이중직이 숙장이었던 예안보문의숙(禮安普文義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7세가 되자 대구로 이사해 시내에 있는 교남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담음 해에 영천에 살고 있던 안일양과 혼인했다. 영천에 있는 백학서원에서 학문을 연수했으나, 끊임없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해 1923년에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동경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가 이후 1925년에 귀국했다.



백학서원의 강당 모습

# 의열단에 가입 활동 중,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붙잡히다


그 당시 중국에서 국내에 들어와 일제 주요기관 등을 파괴,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윤세주의 의열투쟁에 큰 감화를 받은 선생은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맹했다. 당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중국 길림에서 북경으로 이동해 의열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북경에 왕래하면서 국내정세를 보고하고 군자금을 전달했다. 그러던 중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북의 경찰, 헌병, 관공서 직원 등을 총동원해 과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수색 검거하게 되자 선생은 형, 아우 등과 함께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됐다. 이때 미결수 번호가 264번이었는데 이때 수감번호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라 했다.


일경은 선생의 형을 이 사건의 지휘자로, 선생은 폭탄운반자로 그리고 동생은 폭탄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키 위해 온갖 고문을 가했으나, 일본 대판(大板)에서 장진홍 의사가 붙잡히게 되자 2년 4개월여 간의 옥고를 끝으로 석방했다. 출옥 후 선생은 윤세주가 경영하는 '중외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청년지도 등에 힘썼다. 선생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게 돼 요양하고 있을 때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북경으로 가던 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심양(瀋陽)에서 김두봉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후 다시 귀국했다.


경북 안동에 소재한 선생의 생가# 남경에 있는 한국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다


1932년 6월초 중국 북경에 가서 루쉰을 만나게 돼 동양의 정세를 논했고며, 후일 루쉰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했다. 선생은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항일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1932년 10월 22일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인 조선군관학교(교장 김원봉, 남경 소재)에 입교했다. 이 훈련반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재학당시 장개석에게 요청해 설치한 한국 청년간부 속성 양성기관이었다. 조선군관학교는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배양에 중점을 두고 총기사용법 등 군사훈련과 정치, 경제, 철학 등 정신무장과 교양 함양을 위한 과목으로 편성했다. 훈련기간은 전시(戰時)를 고려해 6개월 간으로 했다. 교관은 한국인 20여 명으로 편성했고, 지원부서에 약간의 중국 군인이 파견됐다. 교생 전원은 합숙, 수용되고 교내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토록 했다.


선생은 이 학교 제1기생 정치조에 소속돼 6개월 동안 비밀통신, 선전방법, 폭동공작, 폭파방법 등 게릴라 훈련을 받고 1933년 4월 23일 수료한 후 상해, 안동, 신의주를 거쳐 귀국해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 국내 민족의식 환기, 국내정세조사 등의 비밀임무를 띠고 활동 중 1934년 5월 22일 서울에서 일경에게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 ‘청포도’ 등 30여 편의 시를 발표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선생의 친필 서한(1942)이때 선생은 건강이 매우 악화돼 앞으로 진로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하게 됐다. 그것은 의열단의 밀명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에서 이탈할 것인가 하는 결단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시와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복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문인으로써 새출발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선생은 정치, 사회분야에 걸쳐 폭넓은 작품생활을 통해 1935년 '개벽지'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중국청방비사(中國靑幇秘史)] 등을 발표했다. 다음해인 1936년에는 처음으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 시인으로서 출발해 ‘해조사’, ‘노정기’ 등 산문을 발표했고,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작품과 [조선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월],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비판> 지,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발표했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시작과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시나리오 문학의 특징]과 같은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인문평론>, <문장> 등지에 게재했고 이어 1940년에는 ‘일식’, ‘청난몽’ 등을 <인문평론>, <문장>, <냉광> 등 잡지에 발표했다. 1941년에 들어서자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으로 민족혼을 억압하는 상황하에서 선생의 건강은 아주 극도로 악화됐으나 문필생활은 의연히 계속돼 ‘파초’, ‘독백’, ‘자야곡’ 등의 시를 지었다. 한편 선생은 중국인 호적(胡適)이 쓴 [중국 문학의 50년사]를 초역하기도 했으나, 글을 발표하던 <문장>, <인문평론>지마저 일제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詩] 曠野(遺稿)1942년에는 사실상의 유고(遺稿)인 ‘광야’를 발표하는 등 시를 비롯해 수필, 평론, 번역 등 매우 광범위한 문필활동을 계속했다. 선생은 이와 같은 작품 활동 속에서 다시 북경으로 갔다가 모친과 백형의 소상으로 1943년 5월에 귀국했으나 같은 해 7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피체돼 북경으로 이송됐다.


이육사시비# 북경감옥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 고국에 돌아오다


무슨 영문으로 붙잡혔는지 영문을 모르고 있던 가족들은 뜻밖에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옥에서 별세했다는 부음을 들었고 막내 동생 원창이 북경으로 달려 갔으나 선생의 유해는 이미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에 의해 한줌의 재로 변해 조그마한 상자에 담겨져 있었다.


아! 천애(天涯)의 고아와 같이 일가친척 한 사람 임종을 지켜주는 이 없이 이국에서 유명을 달리 하였으니 그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형언할 수 있으리요.


이육사문학관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유해를 받은 원창은 서울에 도착해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년 봄에는 선생의 유해가 고향 원촌으로 이장돼 낙동강을 바라보는 곳에서 고이 잠들게 됐다.


선생의 시에서 나타나듯 선생의 일생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광복의 열의와 복국의식(復國意識)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무한한 사색과 영혼 깊은 곳에서 울어난 선생의 시문은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고 이 민족에게 한없는 용기와 희망을 갖게 했다. 무려 17회에 걸쳐 옥살이를 하면서도 오로지 독립을 위해 의열투쟁 대열에 앞장섰고, 육신이 쇠약해지자 민족시인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등 암흑기에 주옥 같은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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